광주사태의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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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지켜본 그때 그날은..

 
   
  ▲ (자료사진) 광주사태 현장  
 

역사의 현장이 밝힌 "광주사태"

1980년 5월18일 부터 시작된 광주 시민들의 시가지 데모는 날이 갈수록 격화, 유혈사태를 빚는 비극적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5월19일부터는 목포.나주.담양.화순 등 인접 도시까지 번졌으며 전남도청과 경찰국등 경찰 공무원들이 모두 철수, 치안및 행정 공백 상태로 악화 되었다.

정부는 계엄사령관이 특별 담화를 발표하면서 사태수습 대책에 나섰다. 광주데모는 당초 18일은 전남대생 등 학생을 중심으로 시국 성토 시위였으나 진압에 나선 군과 경찰의 충돌로 과격해져 서로간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격화되기 시작 19일부터는 시민이 가담하는 데모가 되었다.

이로인해 광주일원의 모든 행정은 마비되고 공공기관은 비워졌고 상가는 완전 철시했다. 20일 아침부터 시내외 전화가 불통되고 철도와 고속버스, 시외버스도 광주 시내까지는 들어가지 못했다.

시위대는 광주세무서 및 여러곳의 파출소와 광주KBS, 광주문화방송 등 공공건물을 불태웠고, 그밖에 많은 공공기관이 파괴되었다. 5일동안의 데모로 시민 군인 경찰관 수십명이 사망 했으며 1백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나 행정의 마비로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감정 격화는 데모대들 사이에 갖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아 20여만에 가까운 시민들이 데모대열에 드나들고 시내버스,트럭,택시들까지 가담했고, 각종무기와 화염병,각목 철재등을 들고 대항하는 등 사태악화로 군경이 진압할수 없었다.

4.19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유혈사태는 23일까지 6일째 계속되면서 시민 대표사이에 사태수습을 위한 방안이 모색되고 더 이상의 유혈사태 확산의 위기를 넘겼다.23일 오전 사태수습을 위한 협상이 진행 되었으며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수습회의를 지켜보며 일단 자제의 움직임이 보여 평온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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