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총을 들고 있는 광주시민들 | ||
"유신 언론인은 방문 할 테니 기다려" 협박전화로 사색이 된 모습을 지켜보던 이차장이"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자네는 빨리 피신하게..폭도들이 총을들고 찾아올 것 같네" "빨리 서둘게나 남은 식구들은 내가 지킬테니" 피신할것을 권유하나 마땅히 찾아갈곳이 없다.
경찰서가 철수한 마당에 어디로 피신 한단 말인가? 동료가 우선 예비군대대로 피신 하라며 나를 위로 한다. 나는 1년전인 79년 10.26사태때 "죽이겠다"는 협박전화에 이어 두번째 받은 협박전화인 셈이다.
박정희대통령 "유고"의 변란속에 "유신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고 밤세워 술판을 열고 "축하파티"를 한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를 한 이후 그날밤 걸려온 "유신 언론인은 숙청 대상이다" 란 협박전화를 웃어 넘겼는데 지금은 총을든 폭도들이 아닌가?
예비군 대대로 전화를 돌렸다 대대장 정 소령의 음성이 들린다.
"김 차장이네, 부대로 피신 해야겠네, 부대사정은 어떤가?"
"여기도 이미 전화국 앞 송전탑 부근은 버스에 무장한 폭도들이 부대 정문을 차단하고, 마구 위협 사격을 하고 있오"라며 당황해 한다.
"무조건 부대만은 지켜야 하네. 부대가 무너지면 큰 일이네" 날이 밝은대로 부대로 가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유신 언론인"이란 협박전화가 심상치 않다 개인감정을 드러낸 단순 협박전화라면 0기자나 아무게로 호칭할 일인데도 "유신언론인"이란 표현이 예사롭지가 않다.
당시는 10.26사태로 박 대통령의 서거에 따라로 계엄령이 선포 되고 부터 자칭 민주화 운동권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가 '유신잔당' '유신1중대'며 특히 언론사를 향해'유신언론'이란 신종어를 사용했기에 '유신언론인'이란 협박전화를 받고 보니, 야당 정치권이 개입된 사태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도 '전남매일신문'은 전남지방의 유일한 야당지로 알려져 있어 내가 "유신언론인"이란 말을 들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 준위가 몽둥이와 각목으로 무장한 야당 선동꾼에게 놀라 도망쳐온 일. 경찰서가 피습되고 삽시간에 대량의 총기가 탈취되고, 예비군부대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면 이는 분명 폭동이요 반란으로 생각된다.
문득 6.25동란때 7살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쫓겨 다니던 피난생활 피난길 영산강 강변에서 학살된 아버지와 형님의 주검 앞에 통곡 하시던 우리 엄마의 치마자락을 붙잡고 울기만 했던 기억들,
성장한 후 아버지와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군에 자원 입대했던 일들 .. 만기제대 4개월을 남겨두고 월남전이 터지자 파병을 지원했던 지난 날 겪었던 전쟁의 참상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치자 전신에 피가 끌어 오른다.
1980년 5월 18일 하오 8시 평화스러운 햇불시위로 조선대 광장에서 해산 되었던,5.18광주의 시위가, 하룻만에 나주경찰서 까지 점거 되었다니? 이건 민주화운동이 시작한 시위나 대모가 아니라 폭동이자 반란이며 재2의 6.25 전쟁이다. 더구나 월남전 에 참전했던 전쟁경험자로서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껴 더욱 불안해진다.
"이 차장 우리가족들을 부탁하네. 날이 밝는 대로 군부대로 들어가겠네"
마치 월남전에 지원하면서 전우들에게 남긴 유언처럼 동료에게 당부했다.
그 역시 부인과 어린애들을 데리고 처가인 완도로 피신하려다 나주에서 버스가 중단되는 바람에 이곳을 찾은터라 협박전화 이후 내 신변을 걱정한다.
간간히 들려오는 총성에 불안과 초조함이 엄습하는데 한 순간 나를 차분하게 함은 왠 일일까?.
<6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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