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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일성을 정의의 사도라고 표현했다

 
   
  ▲ 김구  
 

역모-멸문의 가문 출신, 김구의 또 다른 반역

1600년대, 김구의 조상 김자점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한 죄로 귀양을 갔고, 그 후 효종을 폐하려는 역모를 벌이다가 아들과 함께 능지처참 된 바 있었다. 김자점은 능지처참의 대명사가 돼 있다.

멸분 가정에 유일하게 강보에 싸여 누군가에 의해 황해도로 간 김구는 18세때 전봉준이 일으킨 전라도 반역사건, 동학란의 선봉장 역할을 하다가 그를 뒤쫓은 일경을 살해했다. 토벌된 다음 안중근 가의 식객이 됐다.

빨갱이들은 김구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첩자를 죽였다고 선전하지만 이는 마치 유시민이 애매한 사람들에게 폭력과 린치를 가해 감옥에 가 놓고도, 지금에 와서는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갔었다고 거짓 선전하는 것과 유사해 보인다.

명성황후를 죽인 자가 황해도까지 쫓아와 김구의 뒤를 쫓았다는 것은 참으로 코미디 같은 거짓말로 들린다. 동학란을 진압한 것은 일본군이요, 김구는 패자로 일본군에 쫓기다가 그를 잡아려 일본인이 따라오자 그 자신이 살기 위해 그를 죽였을 것이다.

또한 애국심을 가지고 일경을 죽이려면 한양에 와서 죽여야지, 어째서 동학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 쫓기다가 황해도 어느 지방에서 "꼼짝 마라"하고 소리치는 일본인 한사람만을 살해하는가?

또 있다. 동학란은 조정을 뒤엎기 위한 난이었다. 조정을 뒤엎으려는 자가 조정의 국모에게 충성심을 품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한 이야기다.

동학란을 주도한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군(지금의 정읍시)에서 태어났으며 체구가 작아 '녹두'라 불리웠다. 37세에 동학에 입교하자마자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정읍)의 동학 접주로 임명되었다.

동학난은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했지만 농민군은 아직도 황해도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다. 지금의 노동자 농민 단체가 폭력을 쓰듯이 당시에도 그러했을 것이다. 농민출신들이 난장판을 부리는 것을 보다 못해 당시 양반이요 부자로 살았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켜 이들의 토벌에 나섰다.

김구는바로 이 때 안태훈 진영에 투항하여, 안중근 가의 식객이 되었다. 당시 안중근은 15세, 김구는 18세였다.

1947년12월2일, 우익정당 한민당 당수인 장덕수가 피실되었고, 김구는 그 피살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미군정의 조사를 받았다.

1948년, 73세의 김구는 이승만을 질투한 나머지 김일성이 보낸 간첩 성시백의 꼬임에 빠져 김일성을 장군으로 칭하며 1948년4월19일부터 23일까지 김일성이 주도한 평양회의에 참석했다.

4.19일, 김구는 “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줄줄이 누운 부하들을 피해 담장을 몰래 넘어 4월20일에 평양에 갔지만 4.22일에야 비로소 회의장에 초대됐다. 22일 회의에서 김구,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가 주석단에 보선됐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이런 축사를 했다.

“위대한 회합에 참석하여 기쁘게 생각한다. 조죽이 없으면 국가가 없으며 국가가 없으면 정당이나 사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공동목표는 단선(남조선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남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을 막론하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조선일보 1948.4.24)

1948.5.31. 국회는 189 대 8 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추대했다. 그해 7.17.일 유사 이래 최초의 민주헌법을 발표했고, 이 헌법에 따라 7.20. 이승만은 200명중 180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었다. 질투많은 김구는 겨우 16표를 얻었다.

1949년6월26일, 애국청년으로 알려진 안두희 소위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를 두고 노무현은 이승만을 기회주의자라 했고, 김구와 김일성을 정의의 사도라고 표현했다.

김구 가문의 마지막 벼슬 : 김자점 [金自點, 1588~1651]

1623년의 인조반정, 유능한 광해군을 폐하고 무능한 능양군을 추대하여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의 무능한 무장이다.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이루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 시절 그는 탐관오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됐다.

병자호란(1637)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초래케 했다.

광해군 시절, 용맹한 임경업장군이 청의 남침로인 의주산성을 지키고 있어 범접을 못하게 하였는데, 무능한 김자점이 임장군을 남침길목에서 백리나 떨어진 고지 자모산성으로 이동시켜 길을 열어주었다. 황해도에서도 방어군을 작동시키지도 않고, 피란부터 서두르다 삼전도의 항복을 하게했다.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1640년(인조18) 1월 강화유수로, 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계속된 비난 속에서도 인조의 비호를 받아 승진을 거듭,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淸)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 반청적인 성향의 임경업(林慶業)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효종 즉위 이후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사림(士林)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된 처지에서도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익(釴)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를 “김자점의 역모사건”이라 한다.

요약하면 청나라를 정벌하려는 왕의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적장과 내통하였고,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하였고, 광양으로 유배됐고, 다시 아들과 함께 역모를 획책하다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런 반역-모반-밀고 등의 역적 가문에서 태어난 김구 역시 농민 동학란의 선봉장에 섰다. 그라고 이승만의 건국을 사사건건 방해하는데 김일성의 힘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김대중, 노무현 그리고 정권 실세에 드러 있는 수많은 반역세력들의 자식들, 모두가 김자점-김구의 가문과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김구를 애국자로 부각시키는 것, 그리고 빨치산으로 복역한 간첩들을 애국자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들에게도 김자점 역모-김구의 농민 반란-건국에 대한 방해 등으로 이어지는 역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을 반역-파괴해온 인간들이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주사파와 발치산의 자식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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