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린의 소설 “황진이” 중에서 -
재색(才色)을 겸비한 명기(名妓), 보통 이렇게 황진이(黃眞伊 152X-5X)를 평한다. 명월(明月)은 기명(妓名)이며, 명월관(明月館)은 그녀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이름은 그냥 진(眞)이었는데, 허물없이 부르는 호(號)로 “진이”가 되였다. 진이의 생몰(生沒) 연대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문헌을 종합하면 1520년대에서 1550년대까지 생존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적 진이는 입과 입을 거치면서 또 여러 소설을 통하면서 조금씩 전설적 여자로 바뀌었다. 오늘날까지 정립된 이미지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요부(妖婦) - 가무(歌舞)에 능하고, 특히 사내를 잘 후리는 끼로
2. 작가(作家) - 애정을 시조와 한시로 자연스럽게 창작하는 능력으로
3. 반체제(反體制) - 남존여비,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온몸으로 저항하여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황진이가 과연 누구냐?” 할 때, 위에서 지적했듯, 여기서 그녀의 세 가지 측면이 고루고루 나타나고 있다.
우선 시추에이션은 요부이다. 떠나려는 한 남자(벽계수)를 유혹하여 자기(명월) 품에서 더욱 머물게 하려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작가적 묘사이다. “밝은 달이 텅 빈 산에 가득하다”는 구절은 정말 남자의 심금을 울린다. 끝으로 시를 읊는 자세가 저항적이다. “수이 감을 자랑 마라”는 경고는 양반과 천민의, 또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뛰어넘어 비굴하지 않다.
그렇다면 황진이는 요부-작가-반체제로 구성된 삼각형 인품의 극치인가? 아니다.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살펴보면, 결코 진이가 각각에서 극상에 속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이를 거쳐 간 남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극찬했다. 다른 여자에 비하여 진이가 종합평가에서 상대적 점수가 높았기 때문일까? 글쎄, 그 중에는 당대의 초일류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이다. 화담이 활동하던 시기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철학이 4대 학파를 기둥삼아 만개할 때였다. 4대 학파로 나눠져 개시한 학자가 당대의 퇴계, 남명, 율곡과 함께 화담이다. 화담학파에 속한 제자 중에 초당 허엽(草堂 許曄 1517-80)과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菡 1517~1578)이 유명하고, 황진이도 그 제자로 들어갔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황진이가 교접에 실패한 유일한 남자가 화담이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당시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에는 30년 면벽수행(面壁修行)의 생불로 칭송받던 지족선사가 있었는데, 진이는 그를 유혹하여 파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숭유척불(崇儒斥佛)의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거짓말 같다. 그 반대라도 괜찮고, 사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황진이가 창녀처럼 몸을 판 적이 있었던 듯하다. 20대 후반에 교방에서 은퇴한 후 금강산을 필두로 태백산, 지리산 등을 거쳐 이곳저곳 떠돌며 세상을 유람할 때였다. 끼니를 위해 산사에서, 문둥이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저자거리에서, 바닷가에 머물면서 몸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 “몸이란 무엇인가?”하고 스승이 물었다. 이때 진이의 응답이 바로 서두에 예시된 글이다.
황진이는 자유를 위하여 기생이 되었다. 한평생 아버지-남편-아들 세 남자에 따라야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에서 벗어나는 여자의 길이 그 길밖에 없었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으나, 그보다 한 남자를 쳐다보며 안방에 갇혀야하는 갑갑함은 더욱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황진이는 요부도 작가도 반체제 사회운동가도 아니다. 그녀는 다만 모든 남자를 위한 사랑의 어메니티(amenity)를 달빛처럼 뿌렸다. 그것은 생명이었다. 진이는 밤하늘에 홀로 우주를 가로지르며 지상을 비추는 보름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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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아래 막걸리 한잔은 어떠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