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버클리와 1965년 뉴욕시장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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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버클리와 1965년 뉴욕시장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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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보수에게 주는 교훈

 
   
  ^^^▲ Bill Buckley^^^  
 

한국에선 ‘보수’가 실종 ?

요즘 한나라당이 뉴라이트라는 정체성이 불분명한 일단의 세력과 연계하는 모습을 보고 착잡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선거까지는 아직도 1년 이상 남아 있지만, 이상한 슬로건을 내건 ‘위장 보수’가 판치는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의 보수 유권자들이 대선에서 대거 기권하는 사태가 올 수 있지 않은가 우려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1965년 뉴욕 시장 선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윌리엄 버클리 2세

1925년에 태어나 이제는 80세가 넘은 윌리엄 버클리 2세(William Buckley, Jr.) 만큼 미국 보수 지성계에 큰 자취를 남긴 사람은 없다. 부유한 석유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일대학을 나왔다.

근엄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그는 예일대학의 진보적 풍토에 크게 실망했고, 자신의 그러한 생각을 정리해서 ‘예일에서의 인간과 신’(Man and God at Yale)이란 책을 1951년에 펴냈다.

당시 소련 간첩 앨저 히스와 히스를 고발한 휘태커 챔버스가 벌인 진실게임을 보고 미국 지성계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선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는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를 창간했다. 창간 반세기를 넘긴 ‘내셔널 리뷰’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보수를 다시 일으킨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버클리는 수많은 칼럼과 논평을 각종 매체에 기고했고 수십 권의 책을 썼다. 흔들림 없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에 입각한 그의 글은 오늘날 미국 사회에 보수주의가 자리잡는 데 공헌했다. 그는 평생 딱 한번 글을 쓰는 본업을 떠나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었는데,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서였다.

1965년 뉴욕 시장 선거

1965년 미국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나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1964년 대선에서 공화당내의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은 민주당의 존슨 대통령에게 크게 패배했다. 골드워터를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위험한 인물로 몰아세운 존슨은 자기가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존슨은 야심적인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시작해서 오늘날 미국판 복지병(病)의 기초를 만들었다.

선거에서 대패한 공화당에선 보수파의 입지가 사라졌고,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가 대표하는 실용주의적 진보파가 득세했다. 석유재벌의 후예인 록펠러는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거두어 공공분야에 지출하는 뉴딜식(式) 정책을 지지했다.

당시에는 모두들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알았고, 록펠러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석유재벌의 후예라는 사실을 희석해서 대통령이 되고자 했다. (록펠러는 닉슨이 워터게이트로 사임하고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이 되자 부통령으로 지명되어 부통령을 지냈고, 1979년 젊은 여인과 정사를 하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복상사(腹上死)했다.)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선 넬슨 록펠러 보다 더 진보적인 존 린지가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 민주당은 시 감사관이던 유대계 에이브 빔을 후보로 내세웠다. 린지가 내건 정책이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보다 더 진보적이었고, 뉴욕타임스 등 진보언론은 린지를 ‘공화당의 케네디’라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당시 뉴욕시는 재정은 파탄에 빠졌고, 사회 인프라는 쇠락했으며, 백주에도 범죄가 성행하는 중환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윌리엄 버클리는 뉴욕 보수당(Conservative Party of New York)의 후보로 시장 선거에 나선 것이다. 뉴욕 보수당은 공화당의 진보성향에 불만을 갖은 뉴욕의 보수 공화당원들이 1962년에 만든 정당이었다. 윌리엄 버클리는 시장 선거에서 13%를 얻어 낙선했지만 뉴욕에도 보수세력이 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뉴욕시를 망친 진보 시장들

1965년에 뉴욕 시장이 된 존 린지는 사회복지를 확충해서 일하지 않고도 살수 있는 뉴욕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복지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자 맨해튼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공공노조는 봉급인상을 내 걸고 툭하면 파업을 했다. 지하철 차량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해도 그것이 예술행위라는 진보세력을 말을 듣고 그대로 방치해서 온 뉴욕이 낙서로 뒤 덮였다. 지하철은 범죄의 온상이 됐고, 노상강도와 살인이 밥먹듯이 일어났다. 중산층은 뉴욕에서 탈출해서 이웃 뉴저지 등으로 이사해 나갔다.

그럼에도 린지는 1969년에 재선됐고, 1971년에는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가 두 번째 임기를 마칠 즈음에 뉴욕은 완전히 파산해서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자금지원으로 연명하는 도시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뉴욕시민들은 계속해서 민주당 시장을 뽑았다. 1974년 - 1977년에는 에이브 빔이 시장을 지냈지만 린지 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1978년부터 1989년까지 시장을 지낸 에드 카치는 그나마 재정적자를 줄이고 법과 질서를 잡아 보려고 노력한 편이었다. 1989년 시장 선거에는 흑인 데이비드 딘킨스가 민주당 후보로 나와서 공화당 후보로 나온 루디 줄리아니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러자 시장실이 자칭 흑인 시민운동가들의 사랑방이 돼버렸으니, 뉴욕시의 꼴은 뻔한 것이었다. 1993년 선거에서 민주당과 진보세력에 지친 뉴욕시민은 공화당의 줄리아니를 새 시장으로 선출했다.

루디 줄리아니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뉴욕 주재 연방검사로 임명되어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서 명성을 얻은 줄리아니는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크고 작은 범죄를 소탕하고 불필요한 정부조직을 없애서 공무원 숫자를 줄였으며, 시 예산을 삭감하고 세금을 낮추었다. 얼마 후 기업과 중산층이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 왔고, 뉴욕이 다시 살아났다. 줄리아니는 평등을 내세운 흑인단체, 공무원 노조, 그리고 사회복지 마피아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뉴욕을 살린 것이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줄리아니는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해서 현장을 지휘했다. 그의 용기 있는 대처가 아니었으면 수천 명이 더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비록 결혼을 세 번 했다는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줄리아니는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본류(本流)를 대변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08년 대선에 대해 지난 1년 여 동안 행해진 어떠한 여론조사에서도 줄리아니는 민주당의 힐러리 및 앨 고어를 쉽게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의 ‘완전 깽판’으로 (‘깽판’이란 말은 ‘노무현 어록’에 나오는 용어이다.) 주가가 올라 있기는 하나 정체성도 분명치 않거니와, 당 내외에 ‘트로이의 목마’가 우글우글한 형상이다. 그런 상황에 이제는 목사와 교수와 함께 ‘한판 굿’을 벌이려고 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이런 한심한 작태를 벌이는 데는 보수 표는 당연히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의 보수세력은 한나라당에 대해 분명한 선(線)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점에서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 제3당 후보로 출마한 윌리엄 버클리의 결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버클리는 비록 시장에 당선되지 못했지만 그의 형인 제임스 버클리는 뉴욕 보수당의 후보로 1970년 상원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뉴욕에도 보수 유권자가 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곡학아세(曲學阿世) 이론을 만드는데도 부족해서 괴상한 단체를 만들어 정치판에 뛰어들기에 급급한 한국 교수들의 모습은 평생 글을 써온 버클리와 너무나 비교가 된다.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윌리엄 버클리에게는 30년을 기다려 온 승리였다. 그러나 버클리는 레이건에게 자기는 정부 고위직에 관심이 없다고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이에 매우 실망한 레이건은 버클리에게 아프가니스탄 주재 대사로 나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버클리는 자기에게 10개 사단의 경호원을 붙여 주면 가겠다고 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군의 점령 하에 있었다.) 버클리, 레이건, 그리고 줄리아니 같은 지도자만이 침몰하는 한국호(號)를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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