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진행된 '해고자 복직! 가압류 해지! 단협 체결!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결사투쟁 선포식 및 삭발 결의식'에서 참가자들이 투쟁발언을 ⓒ 한국시그네틱스노조 | ||
경영 정상화를 촉구하며 노조와의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다 회사로부터 강제로 쫓겨나 길거리로 내몰리며 700일 가까이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조파괴 음모를 중단할 것과 고용불안 및 경영부실을 부추기는 무분별한 안산공장 신설 반대를 주장하며 2001년 7월 전면파업에 돌입했던 전국금속노조 한국시그네틱스지회 노조원 150여명이 그들이다.
한국시그네틱스는 1966년 다국적기업 필립스가 투자하여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투자기업이다. 반도체 조립업체인 이 회사의 생산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80%가 여성이며, 이중 대부분이 기혼여성이다.
한국시그네틱스 노동조합은 회사설립 이듬해인 1967년 당시 조합원 300명으로 결성되었다. 이 회사는 그 동안 평균 근속 13년에 이를 정도로 안정된 노사관계를 유지하며 기혼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비교적 안정된 일터였다.
누가 이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나
하지만 1995년 거평그룹이 필립스로부터 한국시그네틱스를 인수하면서 회사는 빚더미에 숨통이 막혔으며, 급기야는 1998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노조는 임금반납과 휴가반납, 퇴직금 누진제 폐지 등을 통해 회사의 경영위기 극복 노력에 기꺼이 동참했다. 서울 강서구 염창동공장의 매각과 파주공장으로의 이전을 통한 부채 상환계획에도 동의했다. 그리고 1999년 파주공장 이전을 '전제'로 사용자측과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그러나 한국시그네틱스는 2000년 또 다시 영풍그룹으로 넘어가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영풍그룹은 산업은행으로부터 수백억원의 공장신설 자금을 대출받아 이중 100억원을 들여 기존의 공장과는 별도로 2001년 3월 안산공장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노조와의 갈등이 불거졌다.
파주공장으로의 이전을 믿고 있었던 노조에게 영풍그룹 경영진은 단체협약과는 달리 안산공장으로의 이전을 강요했다. 노조는 즉각 중복투자에 따른 공장신설 반대와 파주공장으로의 이전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약속'을 인정하지 않았다.
노사간에 믿음이 깨지자 2001년 7월 23일 노조는 "아무런 투자계획과 사업성 검토가 없는 안산공장은 필연적인 고용불안을 야기시키고, 급기야는 경영부실과 노조와해를 불러올 것"이라며 회사측의 공장신설 입장에 반발해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해고노동자들 복직 요구하며 지난 9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 돌입
회사에서는 2001년 11월부터 파업참가자 100여명을 전원 해고하며 노조에 강경대응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지난 1월에는 법원에 화의신청을 하면서 이들을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그 동안 한강대교 고공농성 등을 통해 복직을 요구해오던 이들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9일부터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삭발·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 민주노조 사수.. 이날 투쟁 선포식 및 삭발 결의식에서 한국시그네틱스 노조 간부 3명이 삭발을 하고 있다 ⓒ 한국시그네틱스노조 | ||
"이제 저들은 시그노동자들의 시체를 치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시그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살아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리하여 마침내 승리를 가져오겠다는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지난 9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에서 진행된 '해고자 복직! 가압류 해지! 단협 체결! 민주노조 사수를 위한 결사투쟁 선포식 및 삭발 결의식'에서 한 해고노동자는 결의발언을 하면서 그 곱던 머리칼이 다 잘려나가고 파랗게 밑둥만 남은 친구를 보며 복받치는 서러움에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빼앗긴 일터를 돌려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 "가압류를 해지하고 단체협약 체결하라!" "목숨을 걸더라도 민주노조 사수한다!" 누군가가 흐느끼듯 외쳤다. 그리고 민중가요 '철의 노동자'가 흘러 나왔다.
오늘로써 664일째 농성 중이다. 하지만 외롭고 고단한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냉담한 반응뿐이다. 지난 12일에는 부실자금을 대출해줘 경영을 악화시킨 책임을 물어 산업은행 총재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화장실 사용 불가 통보였다.
그 동안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반드시 자본의 무릎을 꿇리고 말 것
16일 농성현장에서 만난 전국금속노조 한국시그네틱스 정혜경 지회장은 "시그네틱스 노사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살아서 이 자리를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며 "어쨌든 이번에는 반드시 끝을 보고 말겠다는 각오로 투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영숙 부지회장도 "이번 투쟁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바로 보고 살아야 하는지 배웠다. 그것만으로도 반 이상은 승리했다"며 "처음부터 우리들은 함께 손을 맞잡고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 비록 힘들지만 마지막 승리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을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는 "그 동안 피눈물도 많이 삼키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또 "모든 청춘을 다 바쳐서 일했는데 회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배신감을 느낀다. 자본은 그런 배신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싸움을 접을 수가 없었다. 힘들지만 반드시 영풍자본을 무릎 꿇리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7년에 입사했다는 조합원 김현금씨는 "우리 싸움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다른 사업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는 이번 투쟁이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결코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반드시 승리하는 싸움이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그치고 있다"고 밝혔다.
▲ 이들은 가압류 해지, 해고자 복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 석희열 | ||
그는 '왜 싸우는가'라는 물음에 "우리 아들 딸들에게는 엄마가 흘린 눈물과 같은 서러운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싸운다"면서 "그 동안 우리는 자본과 권력에게 군림을 당하며 주눅들어 살아왔다. 그러한 것을 깨기 위한 싸움은 필요한 것"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5월 사용자측의 단체협약 해지 통보로 법적으로 무단협 노조가 된 이들 한국시그네틱스 해고노동자들은 경영 정상화를 위해 △부당해고 철회와 해고자 복직 △단체협약 체결 △노조에 대한 가압류 해지 △부실경영진 퇴진 및 새 경영진 선임 △해고기간 임금 지급 △안산공장 매각을 통한 부채상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금속연맹 서울지역 투쟁본부는 지난 15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 앞에서 '해고자 복직·가압류 해지·영풍그룹 규탄 금속노동자결의대회'를 개최한 뒤 "법원은 부실경영진을 돕고 공적자금을 탕진하고 노사문제를 악화시키는 화의 인가에 동조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개질의서를 서울지방법원 파산부에 전달했다.
깔축없는 세월과 함께 그 동안 계절이 일곱번이나 바뀌고 2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의 기약없는 투쟁과 울부짖음은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가난한 자들,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부짖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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