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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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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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①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기계공업의 태동」에 대해서는 분량이 많아 「자동차공업 육성」「조선공업 건설」로 나누어 설명키로 한다.

▶▶자동차공업(the Automobile Industry) 육성

독자와의 대화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1992년 7월 27일 『한국경제신문』「산업전략군단사(産業戰略軍團史)」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은 1994년 4월 13일 207회까지 계속됐고, 그 후 『월간조선』, 『월간동아』, 『WIN 월간중앙』 등 여러 월간지에 이어갔다. 그리고 이들 글은 『한국형경제건설』이라는 책으로 엮어 지금까지 7권을 출간했다. 필자의 앞으로의 소원은 이 글이 계속돼서 「중화학공업의 추진상황」, 「인력개발」,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는 책이 출간되는 것이다.

「산업전략군단사」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경제신문(1992.7.27)을 보면,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록으로 남기는 데 소질이 없는가 보다. 불과 30년전인 1960년대의 기록을 찾으려니 없어진 것이 너무나 많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물으면 기억이 희미하다고 한다. 그래서 남길 만한 이야기를 써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권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최근 30년 동안의 경제서적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각 회사에서는 30년사, 50년사등 기업체 나름의 社史를 펴내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돈과 물건의 흐름, 정책이나 제도의 변동, 공장의 커가는 모습만 있다. 사람의 움직임이 없고, 나온다 해도 고위층 이야기뿐이다. 역사는 사람의 활동상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운이 경제를 바꿔갔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이 작업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1) 내가 한 일을 기억나는 대로 쓴다.
(2) 내가 생각했던 일을 그대로 쓴다. 내 개인 이야기도 쓴다.
(3) 당시의 사회 분위기도 넣는다.
(4) 지금은 사소한 일이라도 50년, 100년 후에 참고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적는다.

따라서 이 글은 이야기 형식이다. 내가 경험한 일, 내가 생각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당시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는 자료집이다. 그러니 사실과 다르다는 異論이 나오면 서슴지 않고 고쳐 나가겠다로 되어 있다. 지금 이 글을 다시 읽어보아도 필자의 현재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고 느껴져 적이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간 많은 인사가 세상을 떠났고,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다. 살아있는 사람도 1960∼70년 당시의 기억은 더욱 희미해져 가고, 더더욱 과거의 일에는 흥미를 잃은 것 같다. 필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기를 바랄 뿐인데 앞으로 써야 할 3권의 책이 햇볕을 보게 될지는 숙제일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지금까지 쓴 글이라도 체계를 세우고, 정리를 해서 「우리나라의 근대경제사」를 이해하기 쉽게 써야되겠다고 마음먹고 본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을 어깨에 메고 책임 질 후배를 위해서이다.

▶ 본 홈페이지는 꼭 중간부분에 와 있다. 1970년경인데 우리나라는 이 때를 전후해서 수년간 극심한 국가위기를 맞게된다. 한 두개의 사건도 아니었다. "악마는 무리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말과 같이 국가위기는 떼를 지어 우리나라를 강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결과 변혁의 변혁이 이어진다.

「산업전략군단사」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글로 이어진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동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60∼70년대의 자료정리이다. 우선 1960∼70년대에 우리나라 경제발전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분들의 증언이다. 정책담당자도 있고 기업가도 있고 과학기술자, 생산근로자들도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도 있어 좀 늦었다는 감도 들지만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의 증언은 꼭 남겨놓아야 한다. 그리고 이 분들이 간직한 각종 자료도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이 명백하다.

그리고는 9개의 동기(動機)를 나열했다(註: 이하 문장에서 파란색 글씨 부분). 본 홈페이지의 줄거리에서 「현 시점」은 핵심부분(즉 산업혁명의 제3단계)을 설명하는 단계에 와 있다. 본 9장에서는 자동차공의 예를 들면서 기계공업 태동에 관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곧바로 이어서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건설로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래서 필자는 각 항마다 약간의 추가설명을 하기로 했다(註: ●로 표시한 부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이다.

둘째, 독자들과 후손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깨닫게 하자는 뜻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와 같이 최악의 경제상태에서 현재와 같은 공업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없다. 우리 민족이 우수하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그것도 불과 20년 사이에 기초를 닦았고, 그 후 10여년만에 이룩한 성과이다. 이러한 민족의 우수성을 연대별로 실례를 들어가며 증명코자 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고, 곤경에 처한 일도 있었다. 그것을 슬기롭게 넘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도표 9-1>은 2차대전 후 새로 등장한 자동차 생산국들의 자동차 생산량이다. 이 표에서 1965년도를 보자. 호주 40만 8,000대, 스페인 22만 9,000대, 아르헨티나 19만 5,000대, 브라질 18만 5,000대로써 모두 수십만 대를 생산하고 있는 당당한 자동차 생산국가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만 대도 안 되는 2,500대를 생산하고 있다. 그것도 SKD 방식의 조립생산이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즉 우리나라는 자동차 생산국가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것이 1993년에 가서는 이들 나라를 모두 뒤로 물리쳤고, 1995년에는 <표 9-2>에서 보는바와 같이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주요국가가 됐다.

263만 1,289대를 생산, 국내에서 155만 대를 쓰고, 108만 대를 수출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여실히 표시하는 것이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셋째, 경제발전을 해오는 과정을 설명코자 했다. 우리나라는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 아주 특이한 한국형 개발방식을 취해서 성공하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형 모델은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이론적 설명을 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한국형 모델에 대한 설명이며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사이다.

●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방식은 CEOI, 즉 「전산업의 수출화정책」이다. 수출하자면 우선 국산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국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자동차공업 육성에서는 국산화문제를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국산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일감을 모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일원화(一元化)정책을 썼다.

「일원화정책」이란 독점권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독점을 시켜줄테니 국산화를 하고 양산체제를 구축해서 품질과 가격을 국제수준으로 하라는 뜻이다. 초기에는 자동차 제조공장까지도 일원화하려고 했는데 업자가 국산화를 기피하기 때문에 「부품의 일원화정책」을 쓰게 된다. 부품의 일원화정책을 쓴 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뿐이다. 그래서 저명한 한국정치경제학자인 MIT의 암스덴(A .H .Amsden) 박사가 격찬을 한 정책이었다.

넷째, 남북 대립관계가 우리나라 경제개발 과정에 미친 영향을 설명하고자 했다. 1960∼70년대는 남북간의 긴장이 최악의 상태였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긴장은 경제건설에 큰 자극제로 작용했다. 우리나라로서는 북한의 경제력(공업)을 앞서기 위해서 전략을 세우고 작전을 짰다. 그 한 예가 중화학공업 육성과 방위산업 육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신문에 연재할 당시 필자의 글에 "산업전략 軍團史"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1970년대 초까지 북한의 기계공업은 남한을 월등히 앞서 있었고, 더욱이 방위산업은 북한군이 필요한 거의 모든 병기, 탄약, 장비를 생산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남한에 도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한으로서는 「국군장비의 현대화」가 최긴급 과제로 떠올랐고, 방위산업육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방위산업의 기초는 기계공업이다.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남북관계의 긴장에서 유래됐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경제나 공업은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것 같지만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 순간에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껑충 뛰면서 발전한다는 사실을 설명코자 한 것이다. 그 예로 우리나라의 정밀가공 기술이 1/10 mm 시대에서 1/100 mm로 향상되는 순간 갑자기 기계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각종 산업기계가 국산화되기 시작하고, 수출하게 되고, 기계공업뿐 아니라 딴 산업까지도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학적이고 거시적인 입장에서는 소홀히 다루기 쉽다.

● 자동차부품에는 1/100mm급의 정밀 부품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부품을 국산화해서 대량 사용한다는 것은 그 나라가 정밀공업도 할 수 있는 나라가 됐다는 뜻이다. 즉 자동차 수출국가는 정밀공업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1/100mm급의 새로운 상품, 즉 선진공업국형 제품의 국산화가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병기도 여기에 속한다. 당시의 가공능력은 1/10mm 정도였다. 이 정도의 가공능력으로는 병기생산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방위산업을 출발시키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과제가 이런 수준을 1/100mm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여섯째, 공업의 한 분야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여러 공업이 서로 상호작용을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공업, 각 산업분야 심지어는 정치, 외교,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조선공업이 시멘트공업과 관계가 있고, 3차 산업인 해운업, 심지어 유류값 인상문제와도 관계가 있다. 기계공업이 방위산업과 관계가 있고, 해군 함정 납북사건과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 공업만 떼어서 볼 수 없고 당시의 나라 상황 전체를 보아야 설명이 가능하다.

● 1970년을 전후한 수년간 우리나라에는 여러 가지 위기가 닥쳐왔다고는 이미 설명했다. 이들 사실들과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아야 경제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위기관리 여하에 따라서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실 예를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일곱째, 경제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인력의 질이 급격히 달라진다. 단순노동 기능공에서 기술공 시대로 이어지고 기술자, 과학자의 시대로 변천해 간다. 기술인력 개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기술인력 양성은 정부의 책임이라는 점을 일깨우고자 했다.

●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기계공업은 기술과 가공능력을 함께 보유하는 기능사의 무대이다.

여덟째, 경제를 실제로 담당하는 기업도 성장과정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한국형 재벌은 좀 특이한 존재이다. 그 탄생과정을 모르고서는 성격 자체를 판단할 수 없다.

● 자동차공업, 방위산업 등 기계공업은 완전히 미개발상태로부터 새로 탄생하며 발전하는 분야이다. 따라서 이 분야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기업은 바로 새로운 대기업으로 탄생되는 것이다.

아홉째, 경제발전에 있어 사람의 역할이 중요했다. 국가원수는 어떠한 판단을 했고, 어떠한 목표를 설정하고 결단을 내렸으며, 공업정책가는 어떻게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했으며, 기업가와 근로자가 얼마나 합심하고 열심히 일했는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끝으로, 사람에게도 성장과정이 있듯이 경제에도 발전과정이 있다. 발전과정을 모르면 현재를 판단할 수 없고, 앞으로의 방향도 설정할 수 없다. 더욱이 과거를 알면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과정을 누군가가 정리해야 되겠다고 느꼈던 것이다. 필자는 60∼70년대에 상공부에서 10년, 청와대에서 8년 등, 18년 동안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공업정책을 다루는 중심부에 관여했기 때문에 자료정리 작업에 대해 소명감 같은 책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필자는 자동차 공업을 설명하면서 이 항목에 대해서 중점을 두고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상공부의 자동차정책 담당자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자동차의 국산화를 추진하면서 가진 고초를 다 겪었다. 업자로부터는 유혹, 협박, 공갈, 업무방해, 모략, 무고 등 안 받은 것이 없다. 이러한 일이 너무 심하다보니 과장이하 타자수(女)까지 전원을 다른 과 직원과 맞바꾸기도 했다.

업자뿐만 아니라 정부의 권력기관에서도 압력을 가했다. 이 기관은 전임자가 A라는 안을 제시하며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그 대로 했더니 다음에 부임한 후임자는 "왜 A라는 안을 채택했느냐"며 처벌을 했다. 모두 후진국에서나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공부 담당자는 이들 압력을 이겨내면서 자동차 국산화에 전력했다. 자랑스러운 공무원상(像)이다. 이들의 이러한 헌신적인 봉사가 없었던들 현재와 같은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없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유로 사람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분량도 많아졌다. 또한 정책에서는 좀 벗어나는 것도 있다.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자동차(自動車)라는 이름의 원조(元祖)는 영국이다. 즉 오토모빌(Automobile)이라는 단어는 Auto(自)+Mobile(可動裝置)에서 왔다. 자동차가 실용화된 것도 영국이다. 1830년경 W.핸목이 만든 10대의 증기자동차(버스)가 런던에서 정기 운행한 것이 자동차 사업의 시초로 이 정기버스는 22인승에 평균 속도는 16∼23km/h였다.

<도표 9-2>를 보면, 우리나라가 5위로, 8위인 영국을 제쳤다. 필자로서는 감회가 깊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선생님격인 영국 자동차기술을 누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막 공장을 짓기 시작했을 때 영국의 자동차기술을 팩키지로 도입하기 위해 당시 영국에서 유명한 자동차기술자 턴불(Turnbull)씨를 장기간 초빙해 왔었다. 필자는 턴불씨가 영국 내에서 그렇게까지 저명한 인사인 줄은 몰랐다.

그 즈음 마침 런던에 출장중이던 필자는 묵고 있던 호텔에서 우연히 턴불씨와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 바로 전에 영국 신문에서 "턴불씨가 한국에 가서 자동차제조에 협조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봤던 참이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내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말을 건넸다. "턴불씨가 한국 자동차공업을 도와준다면 한국의 자동차공업은 급속히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치 않는다. 아마도 영국 노동자가 지금 상태로 파업만 일삼다가는 Made in Korea 차를 수입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은 툭하면 파업을 했는데 그 방법이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동차 공장 전체가 일시에 파업하는 것이 아니라 엔진 만드는 노동자만 파업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다른 종업원은 공장에 나와도 일감이 없으니 봉급만 받고 휴무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영국에 갔을 때는 자동차는 다 되었는데, 문짝(자동차 도어)을 차체에다 달아매는 노동자만 파업을 한 상태였으므로 자동차는 완성이 안되고 공장은 휴무상태가 되었다. 할 수 없이 사무실 요원이 작업복을 입고 문짝을 다는 사진이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니 옆에 있던 사람이 한탄을 하면서 Made in Korea 차 수입 운운 한 것이다. 소위 '영국병'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이다.

영국은 1990년에 157만대의 자동차를 제작했으나, 1991년도에는 오히려 줄어들어 145만대를 생산했다. 1991년 우리나라의 생산대수는 149만대이니 이때부터 우리나라가 생산대수에 있어 앞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영국에는 영국자동차 회사가 없다. 모두 미국회사이다.

소위 영국병이 한창일 때 우리나라는 여천공단에서 석유화학공장을 건설 중이었다. 전 세계의 유명 '메이커'에 입찰서를 보냈는데 한 영국회사가 가장 싸게 응찰했다. 이 회사는 이 분야에서는 그 이름이 크게 알려진 회사였는데 '영국병' 때문에 자주 납기를 지키지 못하자 일감이 끊겨버려 할 수 없이 터무니없는 값으로 내린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와 납기문제로 교섭하게 됐는데 "파업은 전쟁, 천재지변 등과 똑같이 불가항력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납기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되면 값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고 일감은 없어질 수밖에 없고, 실업은 늘고, 공장경영은 악화되고, 국가경제는 나빠지고, 사회는 불안해 지는 것이다.

'영국병'은 영국의 국력과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다. '영국병'을 치유한 것은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수상(재임기간: 1979∼1990)이었다. 강력한 지도력(Strong Leadership)을 갖춘 훌륭한 지도자(Good Leader)라고 칭송 받는 이유이다.

필자는 자동차산업의 초강국인 미국과 이를 따라 잡으려는 일본과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 無에서 시작해 지금과 같은 큰 산업으로 커졌다는 것은 기적적인 현실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이 이야기를 써 나간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결코 '영국병'과 같은 몹쓸 병에 걸려 자동차산업을 송두리째 외국회사에 팔아먹는 실수를 범하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나라는 현재 또다시 국가위기를 맞고 있다. 30년 전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이 일치 단결해서 국가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고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던 경험을 되살려, 오늘의 국난에 대처하는 지혜를 찾았으면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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