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기자정신 일깨운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전쟁이 기자정신 일깨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자읽기】①정문태 분쟁지역 전문기자

 
   
  ^^^▲ 분쟁 지역 전문 프리랜서 기자 정문태
ⓒ 한겨레21^^^
 
 

로저 스포티스우드 감독의 <언더 화이어 (Under Fire)>(1983년)는 종군기자들을 다룬 영화입니다. 전쟁터를 누비는 기자를 그린 영화이다 보니 당연히 시작부터 긴박감이 흐르죠.

군인들이 벌판을 분주히 뛰어다닙니다. 그 위로 어느 편인지도 분간도 할 수 없는 헬기들이 날아듭니다. 언제 어디에 폭탄을 토해낼 지 모를 비행기 아래도 군인들을 가득 실은 차량은 도망치듯 내달립니다. 비행기가 날아들자 트럭을 세운 군인들은 재빨리 숲으로 몸을 숨기지요.

그러나 트럭 위에 뻣뻣이 서 있는 종군기자 한 명이 영 걱정스럽습니다. 그는 전혀 두려움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은 사진 종군기자 러셀.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트럭 위에 서서 날아오는 비행기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습니다. 참다못한 군인들이 신경질적으로 이 친구에게 소리를 내지르네요.

"빨리 피해"

"당신 미쳤어?"

이 영화는 1979년 니카라과 내전을 무대로 합니다. 니카라과는 독재자 소모사 일가가 50년이나 통치를 했던 나라였지요. 전국에서 반독재 시위가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반정부군과 게릴라들의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독재를 지키려는 정부군은 민중에 대한 대량학살을 감행합니다.

이 내란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종군 기자 3인 방이 있었으니, 바로 이 사진기자 러셀과 타임지 알렉스 기자, 그리고 방송국 여성 리포터 클레어였지요. 그들은 동료로서 니카라과의 내전 속에서 벌어지는 실상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총탄사이를 뚫고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 내내 관객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지요.

영화는 중반부로 치닫습니다. 이때쯤 관객들에게 인상적인 장면을 남기지요. 기자들은‘혁명군의 영웅’이라 불리는 라파엘을 인터뷰하기로 합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들은 찾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라파엘의 싸늘한 주검이었습니다.

안타까움은 잠시뿐. 혁명군은 러셀에게 어려운 제안을 합니다. 정부군에 피살된 민중의 영웅 라파엘을 살아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어달라는 것이었지요. 혁명군은 독재자와 맞서기 위해 민중에게 라파엘의 건제를 보여주어야 했을 테지요.

기자로서 러셀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러셀은 긴 고심 끝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합니다. 라파엘의 사망 설이 떠돌던 상황에서 신문 1면을 장식한 라파엘의 '생생한 ' 모습은 당연히 특종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선 러셀의 특종욕 보다는 민중 편에 서야한다는 고뇌를 강조하는 듯 느껴집니다.

이윽고 내전은 혼돈 속에 빠집니다. 어느 날 우연히 정부군에게 동료기자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러셀은 어렵게 이 필름을 세상에 알립니다. 그 사진을 통해 결국 부도덕한 독재정권은 붕괴의 길을 걸으며 영화는 막을 내리지요.

세계의 종군기자들

종군기자들을 다룬 이 영화는 전쟁터의 스릴과 기자들의 사랑은 물론 전쟁터에서 저널리스트의 취재정신이 어떻게 갈등하고 발휘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과 똑같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전쟁터를 지키는 기자들의 뒤를 쫓다보면 누구나 종군기자의 세계에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한편으로 종군기자의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테지요.

그래서 이런 의문이 자꾸 듭니다. 종군기자들의 보도열정은 어떻게 목숨의 위협보다 위에 있을 수가 있을까요? 폭탄과 총알이 휩쓸고 있는 전장에서 목숨을 건 취재경쟁을 펼칠 수 있는지, 그런 의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분명 해독이 쉽지 않은 '암호'임에 틀림없을 듯 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종군기자는 마치 한 마리 불나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몸을 사르며 불길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말이죠. 남들이 무모하다고 아무리 말려도 돌진하는 그들은 어쩌면 무모한 불나방이기에 그 길을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군기자들은 무모한 불나방과는 달리 철저한 기자정신으로 무장되어 있기에 불구덩이 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종군기자의 세계

세계의 종군기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문정식의 <펜을 든 병사들>(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펴냄)에는 세계 최초의 종군기자가 <더 타임스>의 월리엄 하워드 러셀(우연인지 영화의 사진종군기자 이름이다)이라고 소개돼 있습니다.

그는 1853년 러시아와 프랑스 등이 벌인 크림 전쟁이 터지자 15개월 동안 전쟁기자로 참가했습니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당시 전쟁터를 누비던 러셀과 동료 기자들은 프랑스 간호사들의 활약을 보고 "왜 우리에게는 자비의 수녀들이 없는가?"라는 탄식 어린 기사를 실었답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바로 이 기사를 읽고 전쟁터에 간호사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종군기자 하면 남자기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는 마거릿 풀러입니다. 그는 1844년 <뉴욕 트리뷴>지의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다가 1849년 루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에 침공할 당시 로마 시내에 머물면서 전투 상황을 취재했습니다.

종군기사들의 이름 속에는 우리에게 꽤 낯익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도 젊은 시절 유명한 종군기자였지요. 짧은 문장으로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리스와 터키 전쟁에 종군기자로 뛰었습니다. 그의 글쓰기 기법은 급박한 글을 타전해야 하는 종군기자시절부터 터득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종군기자들은 때론 지난 걸프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에서처럼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시에라리온 내전을 취재하던 로이터통신의 커트 슈호크도 취재 중 목숨을 잃어야 했던 종군기자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가 취재 중 목숨을 잃었을 당시의 나이가 무려 쉰 셋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언론계 풍토로 치자면 데스크에 앉아 칼럼이나 쓸 나이에 죽음을 내건 전쟁터로 뛰어든 것입니다. 전쟁터를 누비며 때론 목숨을 잃기도 하는 종군기자는 모험심 강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벤처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한국의 분쟁지역 전문 기자

요즘 우리에겐 종군기자라는 말이 낯설지만 지난 6·25전쟁 당시 우리 종군기자들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종군기자' 명칭이 정식으로 인정된 것은 6·25 바로 전 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국방부는 종군기자를 하자면 '군사지식이 있어야 된다'는 취지아래 육사(泰陵)에서 제식훈련, 군사관계 강의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 종군기자 수료증을 발급('49.10.4)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우리 종군기자들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한반도 주변에 전쟁이 종식되면서 점차 그 명맥이 사라져 갔지요.

그러나 그 후 20여 년이 지난 뒤 우리에게도 뜻밖에 프리랜서 종군기자 한 명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80년대 후반부터 세계 분쟁지역만을 골라 취재하고 있는 국제분쟁 전문기자 정문태 씨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종군기자의 명맥이 사라지다시피 한 우리 언론계에서 정문태기자의 출현은 비록 언더에서 활동하는 비주류로 광범위한 조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젊은 기자들에겐 ‘오아시스’같은 신선함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지난 99년 <말>지에서 펴낸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들을 발굴 소개하는 책에서 386세대 언론분야의 1번 주자로 그를 꼽았지요.

10여 년 이상 동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전쟁지역을 전문으로 취재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종군기자 정문태. 그는 분쟁이 있을 때만 가는 다른 국내외 기자들과는 다릅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분쟁지역에 삶을 뿌리고 내린 직업 종군기자라고 할 수 있지요.

정문태 기자는 현재 타이 방콕에서 사무실을 차리고 일본인 프리랜서들과 일하고 있습니다. 국내에 소속 언론사가 없는 그는 패스카드로 통하는 언론사의 명암 대신 자신의 몸과 기자정신 하나만이 취재를 위한 유일한 재산인 셈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쟁지역의 기사들은 수많은 국내 메이저 언론사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그저 몇몇의 매체를 통해 국내 독자들에게 전달돼 왔습니다.

죽음의 현장에서

정문태는 <한겨레21>에 오랫동안 분쟁지역의 기사들을 기고했습니다. 그의 기사들을 읽다보면 아마 정문태가 분쟁지역에서 어떤 취재정신으로, 어떻게 취재를 하고 있는지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그는 한 기사에서 취재과정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버마의 민주화는 학생들의 더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다.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92년 3월8일. '잠자는 개' 전선을 향한 정부군의 무차별 포격 아래에서 엎드려 쓴 나의 취재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학생들이 부모 형제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가 그 동안의 회포를 나누고. 총 대신 펜을 들고 못다 이룬 학문의 열정을 토해내고. 한편으로는 건설의 망치를 두드릴 때 우리는 버마의 새로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다." <매사리앙(버마-타이국경에서) 「한겨레21」1998/8/27」)

코소보 지역을 전한 99년도 기사에서는 분쟁지역에서 종군기자들이 직면하는 취재의 어려움을 조마조마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현재 코소보 지역은 나토의 허가증을 지닌 국제기구나 취재기자들을 제외하고는 자정부터 새벽 5시 사이에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곳곳에 설치된 나토군의 검문소는 밤이 깊어지면서 삼엄한 경계에 들어간다. 나토군의 방아쇠에는 어김없이 검지 손가락이 걸려 있고 자동화기는 여차하면 불을 뿜을 태세였다."

이런 정문태의 기사를 보다보면 한편의 전쟁영화처럼 마냥 흥미진진하게만 읽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살고 죽음이 몇 초 사이에 결정되는 실제의 전쟁터이기 때문이지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포탄 속에 영화의 주인공 러셀처럼 정문태 기자가 그 자리에 실제로 서 있는 것입니다.

지난 95년, 단 석 달간의 내전으로 1백여 만 명에 이르는 인명이 목숨을 잃고 2백여 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비극의 땅 르완다에도 정문태는 취재활동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낯선 이국 땅의 전장에서 95년 4월부터 7월까지 단 3개월 동안의 인종간 내전으로 1백여 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물론 이 기간 동안 3만∼4만 명의 여성들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조직적으로 강간을 당한 사실을 국내 시청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카메라맨 동료와 함께 그는 르완다사태에 관한 국내 최초의 종합보고서를 국내 한 방송을 통해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지난 95년 7월에는 연금상태에서 막 풀려난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를 아시아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에 성공했고 지난 96년 말에는 한 방송 PD와 함께 국내 방송사상 최초로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요충지 취재활동을 펼쳤습니다. 외부인 금지 지역에다가 좀처럼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지요.

이렇게 그는 지난 88년 이후 15년이 넘도록 스리랑카,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 전쟁지역을 누볐습니다.

방황과 선택

80년 한신대 철학과에 입학한 한 젊은이가 있었지요. 80년대 정치격동기에 방황하던 그는 대학이 자신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하며 그는 캠퍼스생활보다 떠돌이를 택했습니다. 대학생 정문태는 이렇게 대학시절 아웃사이더였다고 합니다.

그는 전국의 굿판도 쫓아다니고 한 때는 지방에서 민예총 활동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것이다'하고 다가오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젊은이들이 다들 그랬듯이 혼돈의 정치에 외국으로 유학이나 가는 게 상책이라며 하나 둘 떠나는 동료들을 보며 정문태도 나라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가 선택한 나라는 한가한 유학생활을 즐길 수 나라가 아니었지요. 그는 제3세계를 공부해보자는 마음에 아시아로 떠나자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그가 기자로, 특히 분쟁지역 전문기자로 활동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그는 한국을 떠나 이국 땅을 밟았습니다. 1988년 11월. 그는 도착한 외국 땅은 타이. 당시 그곳은 미얀마학생 민주전선이 타이 국경에 쫓겨가 있었던 때였지요. 그는 그곳에서 민주전선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다양한 민족해방 혁명가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분쟁지역을 취재하는 종군기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런 우연한 시작은 그 후 아시아 전쟁지역과 분쟁지역을 누비며 종군기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80년대 말, 종군기자가 된 정문태는 거칠 것 없이 혈기가 넘쳤던 청년이었습니다. 두려움도 없었지요. 다른 기자들이 결코 가려하지 않은 곳에 기꺼이 가 사진을 찍고 그들의 목소리를 글로 생생히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좋았습니다.

정문태는 지난 99년 4월 1일자 <한겨레21>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미없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누가 목숨 내놓고 하는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생사의 경계선에서 서 있다가 한 발짝씩 '생'의 지역으로 나올 때"마다 그는 "존재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왜 죽음의 경계선으로 찾아가나"라며 질문을 자꾸 던진다면 그는 "내 피가 그렇게 돼 먹은 모양"이라고 말할 거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전쟁터를 누비면 누빌수록 두려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당시(신출내기 때)엔 아무 것도 겁나는 게 없었죠. 포탄이 쏟아져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이제는 포 소리 들으면 몇 미터이고 어디쯤에서 날아오는 건지, 저런 무기는 어떤 위험이 있는가, 주욱 꿰지요. 그런데 신출내기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서워요. 알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더 무서워져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의 '헝그리 정신'이 오히려 수많은 전쟁터와 분쟁지역을 누비면 누빌수록 점점 약해져간다는 것입니다. 종군기자 생활도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도리어 병이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만큼 두려움을 아는 베테랑 종군기자가 돼 가고 있다는 사실이기도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전쟁터를 통해 강한 기자로 태어나는 듯 합니다.

94년 예멘 내전 때의 일이었습니다. 정문태는 전장에서 <르 몽드>지의 프랑수아즈라는 한 50대 여기자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도로를 내달리다 못 견디고 전부 다 내려 차 밑에 납작 엎드렸는데 태연히 서서 ‘기자가 어떻게 엎드려 취재하느냐’고 호령했습니다. 정문태는 그녀를 쳐다본 순간 진정한 종군기자가 뭔지를 가슴깊이 느끼게 됐다고 전합니다.

"취재를 위해 목숨을 건다"

많은 사람들은 종군기자에 대해 아직도 풀 수 없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변에서 쉽사리 접할 수도 없을 뿐더러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신비감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아마도 전투지역이나 분쟁지역에서 어떻게 취재원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며 그들의 도움을 얻어 원하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히 취재원 확보가 어려운 분쟁지역에선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정문태의 기자정신은 무엇일까요?

종군기자는 오직 전쟁터에서 만들어낸 기사로만 말합니다. 그가 써낸 기사 속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숱한 대답들이 들어있습니다.

"밀림으로 간 학생들. 버마 군사정권의 대량학살로 막을 내린 88년 '랑군의 봄' 이후, 국경 밀림에서 반정부 무장투쟁을 벌여온 미얀마학생 민주전선(ABSDF)이 올해로 창립 10돌을 맞았다. 동시에 내가 이들을 취재해온 지도 10년이 된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이들을 취재하면서 친구가 됐고, 한편으로는 이들의 10년을 가장 가까이 에서 지켜본 관찰자가 됐다."

<한겨레21(98년 8월 27일자)>

전쟁의 취재비법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그는 10여 년이 넘는 종군기자 생활동안 수많은 반란군들의 친구가 돼 있었던 것입니다. 그 친구들 역시 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기사를 쓰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취재원들과 함께 평화를 갈구하며 만들어낸 오랜 공감대는 결국 정문태가 분쟁의 현장에서 기자로 뛸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공감대를 만들기까지는 적지 않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정문태는 오랜시간동안 변함없이 "소수약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반군 쪽에서"란 취재원칙을 가져왔다고 소개합니다. 공격하는 쪽보다는 공격당하는 쪽에 서서 취재한다는 나름의 기준이 철저히 지키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취재하는 이들은 공격받는 이들이었고 곧 정문태는 공격당하는 이들과 함께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었지요.

오랜 종군기자의 생활동안 그는 스스로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고 합니다. 현재 그가 활동하고 있는 곳이 제3세계이지만 그가 종국에 기자로서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라는 점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자신이 쓴 기사(2000년10월 <한겨레21> 제328호)에서 "아시아는 현재 전쟁중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평화를 이야기할 만한 구석이 없다"라고 소개하며 그 분쟁의 배후엔 늘 미국의 그림자가 있었다고 진단합니다.

정문태는 "미국이라는 천의 얼굴을 올바르게 잡아내는 것이 그가 평생을 건 취재목적"이라고 말합니다.

프리랜서의 고독과 힘

우리 사회는 여전히 "무슨 신문"의 파워는 강합니다. 기자보다는 신문사의 이름으로 정보를 주고 안 주고를 결정하지요. 이런 사회에 이름 없는 매체의 기자나 프리랜서들이 발 디딜 곳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겐 '언론'은 많지만 진정한 '기자'는 드물게 하는 풍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정신은 없고 언론사만 있기에. 기자는 드러내지 않고 신문사 이름만 내밀면 되기에 그러하겠지요.

사실 언론사 이름만으로 정보를 독점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허세가 아닌 기자정신으로만 뭉친 기자들이 활약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언론을 가질 수 있을 사회일 것입니다.

분쟁지역 전문기자 정문태는 오직 이름과 기자정신으로 기사를 전하는 그런 프리랜서입니다. 전쟁터를 취재해야 할 종군기자라면 적어도 일반 기자들이 특종을 위해 헤쳐나갈 몇 곱절의 더 큰 난관들을 넘을 수밖에 없을 것이지요.

이 수많은 벽을 넘고 즐겁게 넘기는 사람, 종군기자 정문태의 존재가 기자를 꿈꾸는 이들에겐 새삼스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신문사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과 기자정신으로 기사를 제2의 정문태가 앞으로 끊임없이 우리 언론계에서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비록 세계의 전장을 누비진 않더라도 어렵고 힘들게 쓴 기사들이 대접받고 독자들의 관심과 격려가 쏟아지는 그런 날이 언제인가 올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아시아 분쟁지역의 어느 총탄이 스치는 곳에서 분쟁지역 전문기자 정문태는 취재수첩을 들고 진실찾기를 위해 뛰고 있을 모습이 보이는 듯 합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