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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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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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한국인의 재발견 - ⑥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금오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다

필자는 마련된 계획서를 갖고 이낙선 당시 상공부 장관과 상의했고, 李 장관은 즉시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이 때 朴 대통령은 적극적인 찬의를 표하면서 "기왕에 시범공고를 설립하려면 동양 최고의 학교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이후로부터 이 학교는 「동양 최고의 공고」라는 레테르가 붙게 된다.

李 장관은 상공부로 돌아오자마자 「우수한 기계 기술공」에 대한 정의부터 해보자고 했다. 이 때 합석했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상태라고 입을 모았다. 李 장관이 먼저 "일본의 기술자 근성(根性)과 같이 우리도 오기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껴져서, 결국에는 「자기 자식을 돌보듯 정성을 들여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쪽으로 정의가 내려졌다.

두 번째가 기술에 관한 사항이었는데, 「정밀가공을 할 수 있는 능력 소지자」로 낙찰되었다. 끝으로 한국 남자 고유의 나쁜 기질, 즉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도중에 적당히 해버리는 습성이나 끝마무리 작업을 등한시하는 일은 없애야 했다. 그래서 「설계도면을 율법(律法)으로 알고 속임수 없이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즉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기계 기술공은 「정성 들여, 정밀하게 도면대로, 끝까지 정직하게 작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이때부터 「정성, 정밀, 정직」은 이 학교의 교훈이 되었는데, 학교가 설립도 되기 전에 교훈부터 먼저 정해졌던 것이다. 세 단어에 모두 「정」자가 들어있어 「3정주의」라고 했으며, 학교의 이름도 (가칭)삼정공업기술고등학교라고 했다.

이 안건은 그 해(1970년) 7월 21일부터 23일에 걸쳐 개최된 제4차 한일경제각료회의에 제출됐는데, 양국 각료는 원칙적인 합의를 했고 학교 설립을 위해 조속한 시일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註: 이 회담 때 김학렬 부총리는 4대 핵공장 건설에 대해 협조 요청을 했다).

1970년 11월 4일 일본 조사단(단장: 문부성 모로사와(諸澤正道) 심의관) 8명이 내한해서 10일간 조사 후 귀국했다. 이 때 필자는 조사단에게 기계를 위주로 한 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기계과도 전문분야별로 세분해서 충분한 실습교육을 실시하여 졸업과 동시에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기술공을 양성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학교 규모는 제1차년도에는 기계공작과 120명, 판금용접과 60명, 주물목형과 30명, 금속공업과 30명, 전자과 120명 등 합계 360명으로 하고 이후 400명까지 확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학교 부지는 7개 지역을 조사한 후 경상북도 구미전자공업단지로 결정하였다. 1971년 3월 학교 부지 6만 평 확보, 동년 4월 20일 정지공사 착공, 그리고 1971년 8월 16일에는 문교부로부터 금오학원 설립인가가 나왔다.

학교명도 가칭 삼정공업기술학교에서 금오공업고등학교로 정식 결정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설립자였는데, 朴 대통령은 이 학교에 비상한 관심을 쏟아 몇 번씩이나 현장을 방문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73년 2월 20일에는 「金烏공업고등학교」라는 현판용 휘호, 76년 1월에는 「정성, 정밀, 정직」이라는 교훈을 휘호로 썼다.

이렇게 모든 일은 풀 스피드로 진행돼 나갔다.

학교시설과 인성교육

학교 규모는 학교 부지가 195,227㎡(59,159평)이고, 건물 연건평이 28,809㎡(8,730평)이었다. 여기에는 본관(사무실, 교실, 실험실)이 9,702㎡, 실습동이 5,876㎡, 기숙사 건물이 7,821㎡, 체육관 겸 강당이 1,765㎡, 식당 및 목욕탕 1,426㎡ 등이 포함돼 있었다. 실험 실습 교실도 40개 교실이나 된다.

이러한 시설을 하기 위해 일본 해외협력기금에서 3년간(1971년 12월부터 74년 9월까지)에 걸쳐 11억 8,700만 엔이 지출됐는데, 주로 교육실습기재 구입대금이었다.

그러나 실습용 기계가 조금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고 필자는 한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 회사인 미쓰이(三井)와 미쓰비시(三菱)에 부탁해서 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실습기재를 기부받았다. 또한 한국인 교사들의 훈련도 일본에 파견해서 실시했으며, 8명의 일본인 실기교사도 제1회 졸업생이 나올 때까지 3년간 파견 받았다(註: <도표 7-6> 참조).

이 돈은 모두 일본의 기술원조자금에서 지출되었다. 이런 것을 모두 합치면 일본측이 부담한 액수는 총 14억 6천여만 엔(¥)으로 당시로서는 실로 막대한 투자였다. 금오공고는 시설 면이나 교사진 확보 면에서 동양 최고의 공업고등학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학생들에 대한 교육 목표는 「정성, 정밀, 정직」「3정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일종의 정신개혁운동이다. 3정주의를 학생들의 몸에 배게 하려면 정규 학교 교육만 가지고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 학생을 기숙사에 입사시키고 3정주의를 주입시키기로 했다.
(註: 이런 이유로 이 학교에서는 다른 학교에 없는 운영 사항들이 많이 눈에 띈다. 기상시간은 아침 6시 30분이고 밤 11시에 취침한다. 기숙사에서의 생활교육 내용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1) 인사지도(하급생 인사하기, 상급생 답례하기, 동급생간 인사 주고받기, 방문 손님에게 인사하기), (2) 등하교지도(보행지도, 자세지도, 복장지도), (3) 식사지도(식사시간 지키기, 식사예절, 음식물 아끼기), (4) 청소 및 정리정돈(휴지 안 버리고 모으기, 옷장 및 침구류 정리정돈, 책걸상 정리정돈, 자발적 청소, 청소도구 정리정돈, 환경미화 정리), (5) 몸 청결지도, (6) 복장지도(피복세탁, 복장 단정히 착용, 신발 바르게 신기, 손수건 휴지 갖기, 용의 복장검사), (7) 실내정숙 지도(실내정숙, 실내 좌측통행, 자습지도), (8) 시설물 애호지도(파손물 스스로 고치기, 내 물건처럼 아껴쓰기, 화재예방), (9) 물자절약지도(전기 아껴쓰기, 수돗물 아껴쓰기, 지급품 아껴쓰기), (10) 자기 지도능력 배양 등으로부터 「올바른 직업 윤리관을 갖자」, 「긍정적인 자세로 책임과 임무를 다하자」, 「교칙을 바르게 알고 지키자」, 심지어 「전교생이 태권도 유단자가 되자」라는 항목도 있었다. 개교이래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는 교육 지침인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옛날 이야기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금오공고의 신입생 선발에서는 시험성적을 기준으로 삼지 않기로 했다. 우수한 기술인이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오기 있는 학생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국 각 중학교장의 추천으로 성적 10% 이내의 우수학생을 각 시도 교육위원회를 경유하여 1차 선발하고, 적성검사, 정밀 신체검사 및 면접으로 최종 선발했다.

그리고 공납금 전액이 면제되고 교과서와 피복을 지급하고 전원 무료로 기숙사에 입사시키는 등 각종 장학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 결과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한 예로 1976년 신입생의 경우 400명 모집에 126명이 중학교 졸업때 수석을 했고, 256명이 상위 5% 이내였고, 10% 이내는 불과 23명이었다. 이런 경향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실기 위주의 교육과 개교

교과과정에 있어서 보통교과와 전문교과를 가능한 한 일원화하여 상호연관성있게 하고, 보통교과 대 전문교과의 시간비율을 40 : 60으로 하며, 전문교과의 이론 대 실험실습시간 비율은 30 : 70으로 한다. 전문교과의 시간, 특히 실험실습시간을 극대화한 것이다.

1년 중 수업주수는 43주로 하고, 주당 수업시간은 44시간으로 한다. 실험실습시간은 1, 2, 3학년 모두 주당 20시간으로 한다. 실험실습은 1학년은 공통기초실습을 하며, 2, 3학년은 분야별 전공실습을 한다.

결국 3개년 교육기간 중 보통교과는 1,820시간, 전문교과는 3,870시간을 이수하게 되는데, 이 중에는 공통기초실습 860시간과 전공실습 1,720시간, 합해서 2,580시간의 실습시간이 포함된다. 그리고 금오공고에서는 교사아파트도 인근에 위치해서 야간에도 보충학과 교육과 실습을 시켰다.

전문교과의 이론과 실험 실습은 상호 유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동일교사에 의해서 지도, 교육토록 한다. 그리고 충실하고 효과적인 기술교육을 위하여 실험실습설비는 각 과마다의 전문화된 설비를 독립 확보키로 하는데, 현재 및 장차 취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총망라하여 최신형을 구비한다.

기술교육의 골간인 실험실습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하여 실험 실습과목의 학생정원은 최소정원제(20명 이하)로 하며 지도교사의 수(數)를 증가한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드디어 1973년 3월 금오공업고등학교의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다음은 이 때 낭독됐던 설립취지의 요지이다.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하는 공업기술을 흡수 소화하여, 한국 공업을 세계의 정상으로 이끌고 준엄, 냉혹한 수출전선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생산 현장에서 봉사할 정예중견역군의 육성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적 과제를 직시하신 대통령께서는 공업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표본적인 교육기관 금오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제사회에서 고속도로 발전하는 공업 기술, 특히 모든 공업의 첨단이 되는 기계 및 전자부문의 기술인을 육성하기 위하여 이론과 실제를 직결시킨 실험실습을 중점적으로 교육할 정밀하고 완벽한 교육시설을 갖추었다.

본교는 설립자의 뜻에 따라, 조국의 공업역군이 될 유능한 인재, 특히 가난한 농어촌에 숨은 우수한 일꾼을 발굴하기 위해서 학과 중심의 입학시험을 철폐하고 중학교장의 엄밀한 선정에 의한 추천으로 학생을 선발하며, 전학생을 전면 장학생으로 하여 전원 현대식 시설이 완비된 기숙사에 수용하고 외국에서 기술훈련을 받은 우수한 교사진과 완벽한 교육 설비로서 최대한의 교육효과를 거두고자 한다.

지금 조국 근대화 작업이 방방곡곡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역사적인 시점에서, 본교는 공업입국의 중추적 역군을 육성하여, 국력배양의 전위가 되고자 힘찬 전진을 거듭할 것이다.」


한국인도 우수한 기계가공사가 될 수 있다

금오공고에는 전국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비도 면제했고 기숙사도 공짜요, 교복이나 학용품도 무료로 지급했다. 그리고 「정성, 정밀, 정직」, 즉 3정 교육에만 총력을 경주했다. 교사들은 열성을 다했고,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를 했고 고된 실기훈련에도 견디어 나갔다. 그 결과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2년 후부터 정밀기계 가공사 자격을 따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성과였다.

 


「우리나라 국민은 ▲ 중학교 졸업 후 공업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 전공분야를 정한 후, ▲ 3년간 전문학과를 가르치고 실기를 훈련시키면 ▲ 정밀가공을 할 수 있는 우수한 기계기능사로 양성시킬 수 있다」는 참으로 값진 증명인 것이다. 이것으로 중화학공업을 발진(發進)시키는데 결정적인 애로사항이 해결된 것이다.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금오공고와 같은 학교를 증설해 나갔다.

그러던 중 1976년 9월 부산에서 전국 기능경기 대회가 개최하게 됐다. 그런데 이때 일본에서 요청이 왔는데 일본국가 대표선수(27명)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식출전은 아니고 동일한 과제에 의한 동일한 조건 하에서 평가만 받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 대해서 대회준비위원이나 각 공업고등학교에서는 대환영이었다. 각 선수들은 자신만만했으며 한번 붙어보자는 의욕이 대단했다. 그래서 불붙는 경쟁이 일어났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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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주목할 것은 「정밀기기제작 종목」인데, 일본선수가 74.6점, 우리선수는 88.7점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시아게' 정신이 없어 금형은 만들 수 없다던 「프레스금형 종목」에서 일본선수가 83.0점, 우리선수가 89.0점이었다.

이로서 "한국인은 정밀작업을 못하는 민족이다. 그래서 기계공업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오판은 완전히 불식됐다. 그 후 일본인은 이런 발언을 하는 이가 없어졌다. 1976년이라면 금오공고가 개교(1973. 3)한지 불과 3년 반이 경과했을 때이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朴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는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과 의욕을 환기시킴으로써 스스로 국가건설의 대열에 혼연히 참가하여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금 우리는 조국의 근대화라는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자원과 인력과 기술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이를 습득한 기술인들이다.

우리는 우선 공업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해서 우리 국가가 요구하는 실기능력을 착실하게 갖춘 성실하고 자격 있는 기술자를 풍족하게 양성해야 하겠다. <어느 나라가 기술인력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그 인력의 질이 어느 나라 것이 가장 높으냐> 이것이 국제시장에 있어서 경쟁의 승패를 결정하게 된다"라면서 「년간 기술인력 5만명 양성」을 재촉했다(註 : 여기에 대해서는 방위산업을 설명하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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ㅉㅉ 2006-09-01 09:56:03
이게 요즈 무슨 관심거리라고 계속 올리는지.....
지면이 아깝다.

애독자 2006-09-01 11:18:21
우리의 뿌리를 모르는 것은 테이블 위에 일회용 꽃과 같다.
식견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할 우리의 업적들이다.

신문이 관신사만 다룰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들도 다루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밑에 댓글 분 이제 이해가 좀됩니까?


과거는 흘러갔다 2006-09-01 17:10:34
과거는 흘렀다. 과거와ㅡ같은 방식으로 방정희식 개발독재로는 21세기 개발 안된다. 아니 될 수가 없다.

흘러간 물레방아 돌리지 말라 !

새출발 2006-09-01 18:39:16
여기도 빨갱이들이 들어오고 있군요.
지금 까지의 경제성장 누구의 덕인지 알고 있소...

우리는 미래로가기 위해서 과거를 알아야 하오.
특히 경제는 더더욱 그렇소 ....

어떻게 뿌리 없는 꽃이 있단말이오.
그리고 부모 없는 아이도 있소...

제발 빨간물에서 놀지말고 세상을 보고 사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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