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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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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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이방자여사

이방자(李方子)여사는 조선 말기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영친왕비(英親王妃), 영왕비(英王妃)를 말한다. 나는 이 추억의 이 글에서는 본인이 생전에 나에게 바라는 호칭인 이방자 여사로 적는다. 이방자여사는 나와 만날 때마다 고국 “사쿠라 꽃이 아름다운 일본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녀의 영혼이라도 고국에 왕래할 수 있는 일본 천황의 칙령(勅令)이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는 이방자여사와의 추억과 약속의 글을 적는다.

이방자(李方子)라는 이름은 일본식 원래 이름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에서 성(姓)인 나시모토를 뗀 방자(方子)에서 신랑의 성(姓)인 이(李)를 붙여 이방자(李方子)로 칭하는 것이다.

나는 1978년 10월 1일자로 대한불고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훗날 불교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다음 해 정초, 어느 날, 나는 이방자여사에 대한 이야기로 연재물을 집필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방자여사가 기거하는 창덕궁 안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를 찾았다. 금남(禁男)의 낙선재 안방에 나를 받아들인 것은 나의 소개를 이방자여사가 들은 직후이다. “저는 조계종 기관지 편집국장이며, 전주 이씨 효녕대군의 후손이며 항렬은 재(宰)로서 속명은…”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네었다. 차갑게 정색을 하던 이방자여사는 미소를 짓고 이렇게 말했다. “오-일가 스님이시군요. 어서 오세요”

구식 한옥의 낙선재는 방바닥도 방안공기도 추웠다. 방안에서 상면하여 인사를 나누고 났을 때 방구석에 하얀 한복에 누런 조끼를 입은 늙은 여인이 눈에 잔뜩 겁에 질려 나를 보았다. 이마가 여자로서 너무 크고 벗겨졌다고 내가 속으로 느낄 때, 이방자여사는 소개했다. “덕혜옹주십니다” “언니, 우리 전주 이씨 일가스님이예요. 인사하셔야지요” 덕혜옹주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같아 보였다. 말없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신이상 기가 보였다.

이방자여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사쿠라 꽃이 아름다운 일본의 고향이 그리웁고, 꿈속에 간다” 고 말했다. 나는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시지요”라고 말했다. 이방자 여사는 정색을 하고 결연히 말했다. “나는 특별히 천황님의 칙령을 받아 이곳에 시집왔습니다. 칙령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칙령이 “돌아오라”는 말씀이 없는 한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나는 그 때 이방자여사의 얼굴에서 천황에 충성하며, 하라끼리(割腹)을 하는 사무라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이방자여사는 사무라이 옷을 입고 장도(長刀), 소도(小刀)를 허리에 찬 여성 사무라이같았다. 당시 이방자여사는 창덕궁 내에 구석진 낙선재(樂善齋)에 살고 있었다. 낙선재는 헌종(憲宗) 때 직급이 낮은 후궁을 위해 지어준 건물이다. 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영친왕이요, 황태자인 이은(李垠) 가족을 누추한 낙선재에 가난하게 살게 했는데, 이는 모욕을 준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방자여사는 일본 매이지(明治) 천황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친왕(親王)의 장녀로 태어났고, 유년시절에는 훗날 천황이 되는 당시 히로히토(裕仁) 왕세자의 비(妃)로 간택 되었으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등 군국주의자들이 정략으로 이방자여사를 대한제국 영친왕비로 강제 결혼을 하게 한 것이다. 일본인인 이방자여사가 아들을 낳으면 조선의 국왕으로 만든다는 음흉한 계획이었다.

“내선일체를 위해 헌신하라!”는 천황의 비밀칙령에 황공히 부복(俯伏)하고 절대복종을 의미하는 힘차게 “하이!”를 외치는 처녀 이방자(마사코)를 상상해보라.

천황의 비밀 칙령에 의해 마사코는 히로히토 황태자가 아닌 1916년 일본에 볼모로 잡혀와 일본 육군사관학생이 된 영친왕과 약혼을 하고, 1920년 영친왕비가 되었다. 1921년 아들 진(晉)을 낳았다. 하지만 1922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진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 1931년 다시 아들 구(玖)를 얻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가 했으나, 구(玖)는 “독살 설”이라는 의문의 죽음으로 항간에 화제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방자여사는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연합군에 의해 일본 왕족신분을 박탈당했다.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했다. 남편은 한국정부의 노골적인 홀대속에서 병사하고, 홀로 낙선재에서 살다가 암(癌)으로 운명했다.

▲이방자여사가 살던 낙선재에서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영친왕과 함께 귀국할 수 있였던 것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소신있는 배려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정부에서 국민들로부터 이왕가(李王家)의 향수를 막기 위해 귀국을 고의적으로 막았다.

이방자여사와 가족이 어렵게 한국에 왔을 때는 대궐 등 이왕가(李王家)의 재산은 모두 국가로부터 몰수 당한 후였다. 이방자 여사 부부는 어렵살이 낙선재에 기거할 수 밖에 없었다. 낙선재는 창덕궁에서 외지고 초라한 채색이 전무한 누추한 고택(古宅)이요, 너무 외진 곳이어서 밤에 안개나 피우면, 몽환(夢幻)적인 ‘전설의 고향’의 영화를 찍는 데 적당한 건물같았다.

이방자여사는 남편과 아들이 허무하게 죽은 후, 제행무상을 절감하면서 가난하게 숨죽여 살고 있었다. 외출할 때는 창덕궁 정문이 아닌 낙선재 쪽 가까운 작은 문으로 초라히 출입했다. 천황의 칙령으로 희생된 이방자여사가 홀로 한국 땅에서 일부 한국인의 반일감정의 대상이 되어 통한의 고통을 받을 때, 일본의 정치인, 언론인 등은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이방자여사를 만나 대화하면서 칙령(勅令)을 받은 두 여성을 목도하며 생각에 잠겼다. 첫째, 일제시대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위해 이방자여사는 일본 천황의 칙령으로 조선국 영친왕과 결혼하였고, 둘째, 조선 고종의 유일한 딸인 덕혜옹주는 역시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일본의 귀족과 내선일체로 결혼하였다. 덕혜옹주는 일본인과의 결혼에 적응하지 못하고, 칙령을 어기고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방자여사는 스스로 천황의 칙령을 어기지 않고, 영친왕과 살아서나 죽어서나 함께했다. 무슨 사연인지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전주 시립병원에 무연고자(無緣故者)인 행여병자(行旅病者)로 외롭게 홀로 사망하고 말았다. 두 여성은 본인의 의지나 친가의 의지없이 정략적인 칙령으로 너무도 가여운 인생을 산 것이다. 특히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은 이방자여사를 추억하는 글을 쓰고, 연극과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칙령을 받은 이방자여사는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거듭 태어났다. 이방자 여사는 1962년 한국국적 취득 후부터 지적장애인(知的障碍人)들을 대상으로 선행을 시작했다. 이방자 여사는 1963∼1982년 신체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1965년 자행회(慈行會)를, 1966∼1988년 서울칠보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신이 일본국에서 배운 칠보기술로 장애인을 돕는 자금을 만들었고, 칠보 기술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전수해주었다.

또 이방자 여사는 1967∼1986년 사회복지법인 명휘원(明暉園) 이사장 및 총재, 1971년 영친왕기념사업회 이사장, 1975년 수원시 자혜학교(慈惠學校) 이사장, 1982년 광명시 명혜학교(明惠學校)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정박아 교육·지체부자유자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기술교육 등 육영사업에 정성을 쏟았다. 그녀는 천황의 칙령에 순종하여 “내 조국도, 내 묻힐 곳도 한국”이라고 말했고, 한국 장애인들의 어머니로 봉사해 온 것이다.

비운의 영친왕비요, 의민태자비인 이방자 여사는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어느 겨울 날, 나에게 친필 휘호인 ‘제행무상’이라는 한문 글자를 써서 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한국과 일본국이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해주세요”하고 “내가 얼마나 고국 일본과 고향을 그리워 하는지를 훗날 글로 적어 세상에 알려주세요”하고 간절히 부탁했다.

나는 굳게 약속하였다. 나는 이방자여사가 암(癌)으로 병색이 깊어진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일본국에 돌아가 치병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방자 여사는 쓸쓸히 웃으며, “나는 천황의 칙령을 엄수하고 죽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2018년 10월 8일 새벽에서야 영친왕비와의 약속을 지키는 글을 적는 것이다.

끝으로, 일본은 기이하게도 진주 남강의 연회에서 일본장수를 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은 기생 논개(論介)를 여신으로 공경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일본 처녀로서 칙령을 봉대하고, 충의와 사랑은 물론, 한국에 봉사하고 한국 땅에 묻힌 이방자 여사가 진짜 일본여성의 상징이 아닐까?

이방자여사는 칙령에 의해서 비운의 영친왕비요, 한국 장애 소년, 소녀의 어머니로 실천하고 제행무상속에 경기도 남양주시 홍류동의 영친왕 묘소에 합장되었다. 언제인가, 이방자 여사의 묘소에 한-일 여행객들이 좋은 친구가 되어 향을 태우고, 헌화하는 때가 올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

그리고, 아베 수상은 생존한 천황에 주청하여 이방자 여사의 영혼이라도 사쿠리 꽃이 만발하는 고국에 왕래할 수 있도록 칙령을 내리도록 해주고, 여성 사무라이처럼 천황께 충성한 마사코의 위패를 “일본 여성의 표상”으로 황궁신사(皇宮神祠.)에 봉안하여 일본국민의 공경을 받게 해주었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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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다 2018-10-18 13:13:05
이 왕가를 의도적으로 모욕..이 말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이왕가가 한민족을 모욕한거 아니냐..무능한 인간들의 군상.이왕가가 이 민족에게 무엇을 주었나.끝없는 사대굴욕과 망국민의 아픔..그이외에 찾기 어렵다..추방 안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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