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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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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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한국인의 재발견 - ③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를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수출확대회의

1965년의 수출목표는 ―1964년 수출실적 1억 2,090만 달러의 40% 증가한― 1억 7천만 달러로 정했다.

1964년에는 하도 고생들을 많이 해서 40% 증가는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수출증가율을 40%보다 낮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매해 40%씩 증가시킨다면 큰 낭패라고 모두가 느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수출한계는 3억달러로서 이 목표는 마치 음속(音速)돌파 때와 같은 장벽이다」라는 학설을 내놓고 주로 무역업계를 중심으로 해서 퍼뜨렸다. 년수출증가율이 40%로 고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업구조의 수출체제로의 전환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시작해서 공산품의 수출이 의외로 많이 증가했다.

그 결과 이 해의 수출실적은 목표치 1억 7천만 달러를 크게 초과한 1억 8,045만 달러를 수출함으로서 년수출 증가율이 약 50%나 됐다. 이런 상황이 되자 「년수출 증가율은 40%」라는 개념이 점차로 굳어지게 되고, 이로 인해 1966년의 수출목표는 ―1965년의 수출실적 1억 8,045만 달러에서 38.5%가 증가한― 2억 5천만 달러로 정해지게 됐다.

박충훈 상공장관은 박대통령을 총사령관으로 모시고 전진해 나갔다. 매해 40%씩 수출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로써 외국의 어떤 나라에도 이런 예는 없었다. 박대통령의 지휘 방법인 "기회가 있을 때 밀어 붙여라"하는 명령에는 있는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풀어야 할 애로사항은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차차로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통령을 모시고 관계부처와 관계업계를 망라한 회의를 열자는 것으로 1965년부터 매월 수출확대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일종의 수출전략회의이고, 작전회의이다. 박대통령은 사령관이다. 그러니 만사를 제쳐놓고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참석이라는 단어만 쓰기에는 그 역할이 너무나 컸다.

그 회의를 주관했다고 하는 것으로도 모자란다. 지휘 감독이고 독전(督戰)이다. 매월의 수출실적, 품목별 수출실적, 나라별 수출실적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계획, 신규상품에 대한 계획이 모두 포함되었으며 수출부진품목에 대해 체크했고, 애로사항은 즉석에서 해결했다. 총리, 부총리, 각 장관, 각 회사대표는 자기소관업무 중 수출문제에 관해서는 그 내용에 대해 정통하고 있어야 답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상공부에서는 브리핑하기 전에 그 내용을 알고, 사전에 대책을 마련했다.

각부처는 수출확대 회의에서 왈가왈부하다가 피동적으로 들어주는 것 보다는, 오히려 사전에 해결해 주는 쪽이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런 문제가 애로였습니다만 ○월 ○일 ○부(部)와 잘 협조가 되어 이렇게 해결되었습니다" 하는 식의 보고가 빛이 났던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항상 수출업자쪽에 유리한 결정이 났다. 박대통령이 수출업자 편을 들기 때문이다. 특히 예산 당국인 경제기획원과 금융, 세제, 통관을 담당하는 재무부쪽에 문제가 많았다. 박대통령은 강력하고 유능한 수출 총사령관이었다.

나는 중국(대만) 관료들과는 1년에 한번 회의가 있었다. 한중경제위원회의 공업담당 실무책임자였기 때문이다. 그때 대만 정부의 관료들은 우리나라의 수출확대회의를 몹시 부러워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몇년이 걸려도 해결 안되는 애로 사항이 한국에서는 매달 있는 수출확대회의에서 해결이 난다는 점 때문이었다. 즉 한달이면 결말이 난다는 이야기였다.

또 하나의 장점은 이 회의로 인해 정부와 기업체와 사계 권위자가 한자리에 모여 서로 토론을 거쳐 최상의 합의를 도출했다는 점이다. 모든 사항이 공개적이라서 비밀이 없었다. 정치계도 이해하고, 학계도 이해하고, 언론계도 이해하고, 국민도 이해하고, 그리고 동질화되는 것이었다. 개인이나 소속단체의 이익을 위하거나,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내세우거나 하지 않았다. 오로지 수출과 우리나라의 경제발전만을 생각하는 회의였다. 그래서 결정된 사항은 '힘'이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런 방식의 결정은 과거에도, 지금까지도 없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민주적인 방법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수출확대회의는 처음에는 청와대에서 개최됐는데 참석인원이 늘자 중앙청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참석인원은 100명을 넘었다.

이 회의는 우리나라 수출진흥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리고 이 회의는 매달 개최되는 회의인 만큼 회를 거듭할수록 수준이 높아져 거의 전문가격인 회의로 변했다. 더욱이 朴 대통령은 제1회 때부터 백수십회 참석했다. 횟수로는 18년간이다. 그러니 어느 장관, 어느 누구보다도 수출(실무 및 수출행정)에 대한 조예가 깊어질 수밖에 없다. 朴 대통령과 같은 예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로서 다른 나라에서나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10억 달러 수출계획

1966년은 제1차 5개년계획을 마감하는 해이다.

그리고 이해 2억 5,575만 달러를 수출했다. 제1차 5개년계획의 수출목표는 1억 1,750만 달러였으니 2.18% 초과달성이다. 다음해부터 제2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는데 경제기획원에서 수립한 이 계획에 의하면 1967년의 수출목표는 3억 달러였다. 그런데 1966년에 2억 5,575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1967년의 수출목표를 3억 달러라고 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상공부는 고민에 빠졌는데 박충훈장관은 朴 대통령의 의중을 아는지라 3억 5,000만 달러로 정했다. 전년대비 36.9% 증가이다.

그런데 1967년 벽두 朴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70년대에 완전고용, 수출 10억 달러 달성」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상공부에서는 朴 대통령의 뜻을 「2차 5개년계획의 최종년도인 1971년에 10억 달러를 수출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10억 달러 수출계획」을 작성, 6월에 개최된 수출확대회의에서 발표했다.

이 계획은 67년도의 3억 5천만 달러를 기점으로 해서 68년도 수출목표를 3억 6천만 달러에서 → 4억 7천만 달러로, 69년도를 4억 2천만 달러에서 → 6억 2천만 달러로, 70년도를 4억 8천만 달러에서 → 8억 달러로 각각 상향조정하고, 71년에는 5억 5천만 달러에서 → 10억 달러의 수출을 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고작 3억 달러대를 갓 넘은 수출실적으로 10억 달러를 바라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의욕이었다. 경제계나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은 10억 달러라는 수치를 엄청난 거리감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3억 달러를 넘어서면 수출신장률이 크게 둔화되리라는 판단 아래 10억 달러 수출계획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10억 달러 계획을 마련한 상공부도 그것이 손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획기적인 수출지원체제를 갖춰 나가기로 했다. 당시에 가장 우려되었던 것이 수출확대를 뒷받침할 공산품 공급능력의 확충이었다.

즉 "증산 · 수출"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는 공장 "건설"이 시급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67년 중에 외화대부자금(外貨貸付資金)을 늘리는 동시에 50억원의 내자를 재정자금에서 시설자금으로 지원키로 하는 등 다각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그리고는 수출에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1967년에 무난히 3억 5,589만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우리나라로서는 한계치라고 하던 3억 달러를 무난히 돌파하고, 목표액 3억 5천만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전년대비 40.2%의 수출증가율이다.

이로써 박충훈 장관은

▶ 1964년에 朴 대통령에게 서약한 1억 달러를 초과 달성하는 1억 2,090만 달러를 수출했고,

▶ 1965년에는 목표량대비 106.2%, 전년대비 49.4%,

▶ 1966년에는 목표량대비 102.3%, 전년대비 41.6%,

▶ 1967년에는 목표량 대비 102.5%, 전년대비 40.2%의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967년 10월 30일 朴 대통령은 박충훈씨를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승진 발령했다. 그리고 상공부장관 후임에는 김정렴(金正濂)씨가 부임했다.

김 장관은 수출증대에 있는 힘을 모두 쏟았다. 김 장관은 1964년 6월부터 66년 1월까지 상공부 차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따라서 상공부 직원과는 호흡이 잘 맞았다. 더욱이 차관시절에는 매일 아침 국장회의를 개최하여 상공부 각국의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직원 개개인의 능력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관으로 부임하고 나서도 인사이동을 하지 않고 전임 박충훈 장관 시대의 인사배치 그대로 일을 추진해갔다.

부하직원들의 건의도 잘 받아주었고 힘껏 일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타 부처와의 관계도 좋았다. 경제기획원 장관이 전 상공부 장관인 박충훈 부총리였던 점도 호재였다. 김 장관은 재무부 장관을 지낸 터라 재무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인자한 성품으로 업계와의 관계도 무난했으므로 상공부 직원은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열심히 뛸 수 있었다.

김 장관은 수출확대회의를 잘 활용함으로써 큰 효험을 보았다. 그리고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후 일본으로부터 외자도입에 의한 기계시설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섬유공장을 위시한 수출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김 장관은 ―1967년도의 수출목표 3억 5천만 달러에 대해― 3억 5,849만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859만 달러를 초과 달성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해인 1968년도의 수출목표였다. 불과 6개월 전에 「10억 달러 수출계획」이라는 것을 작성해서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이 계획에 의하면 내년도(1968년)의 수출목표는 4억 7천만 달러이다. 금년도 실적 3억 5,859만 달러에 비하면 31.1%의 신장률밖에 안 된다. 그러니 이 금액을 내년도 목표라고 보고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朴 대통령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밀어 붙여"라고 한다. "밀어붙여"는 군대식 용어로써 적과의 전투에서 승기(勝機)를 잡았을 때 추격전을 명하면서 쓰는 명령체의 말이다. 朴 대통령의 뜻은 지금까지의 수출증가율이 40%였으니 내년도에도 40%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 장관은 3억 5,859억 달러의 39.4% 증가한 5억 달러를 1968년도의 수출목표로 정하게 됐다.

이렇게 돼서 「10억 달러 수출계획」은 한번도 시행하지 못하고 파기되고 말았다(註: 그래서 10억 달러 수출계획을 시안(試案)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해(1968년) 5억 40만 달러를 수출함으로써 목표량을 달성했다. 전년대비 39.6%의 증가율이다. 40%에서 0.4% 부족이다. 40% 증가율이라는 것이 차차로 힘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출 증가율 40%의 행진

다음해인 1969년도의 목표에 대해서는 ―상공부나 업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비쳤는데도― 朴 대통령은 40% 증가한 7억 달러의 목표를 제시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며 명령조로 지시했다.

1969년 10월 21일, 김정렴 상공장관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영전하고 이낙선(李洛善)씨가 상공장관으로 부임했다. 이 장관은 혁명주체세력 중의 한 사람으로 마구 밀어붙이는 성격이다(註: 대통령 명령으로 국세청장에 취임한 후 부임 전인 1965년에 546억원이었던 것을, 부임하자 700억원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제로는 876억원을 징수했다).

이낙선 장관이 취임한 날짜가 10월 21일이기 때문에 1969년은 40일 여유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출진척 상황을 알아보니 아슬아슬하다. 그래서 연말까지 수출할 품목과 수량을 따져보니 그 중에 대만에 수출키로 한 소형어선(漁船) 20척이 있는데 그 대금이 614만 달러나 됐다. 이것만 연말까지 수출한다면 목표달성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조선과장(구자영)에게 일일보고를 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 공사를 수주한 조선공사쪽에서는 파업여파로 연말까지 완성한다는 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조선공사는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이 장관은 "당장 남궁 사장을 장관실로 불러오라"고 호통을 쳤다. 남궁 사장 입장에서는 이장관을 만나서 기합받을 생각도 없었고 또한 남궁 사장은 박 대통령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으니 이 장관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출두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장관은 남궁 사장과 친분이 두터운 장기영(張基榮)씨에게 부탁을 했다. 전화 연락이 되어 구 과장은 남궁 사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부탁했다. "사장님, 李장관을 만나서 연말까지 하겠다고 해 주시오." 이렇게 돼서 회견이 이루어졌다. 이 장관은 남궁 사장에게 연말까지 배를 완성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조선공사는 자금사정이 어려웠다. 이 장관은 이 말을 듣고 즉시 필요한 자금 지원조치를 해주었다.

이와 같이 어수선하던 조선소가, 파업이 수습되어 작업장이 안정되고 부족한 자금이 지원되고, 자재가 투입이 되자 공사진도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었다. 그러나 준공 인도 날짜를 앞두고 잡다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하였다. 배에 실어주어야 하는 "미끼"(餌:낚시미끼)용 꽁치를 구하지 못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공교롭게도 그 해는 꽁치가 잡히지 않았다.

계약서에는 "미끼"를 매척에 3천여 상자를 실어주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어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마침 일본도 꽁치가 잡히지 않아 값이 3배나 뛰었는데 그나마도 구하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대만 CTC측에 사정사정해서 일부만 싣고, 나머지는 추후 어장으로 막바로 갖다주기로 절충을 보게 되었다. 선구와 용품 등을 배에 실어주고 확인서를 받아야 하는데, 대만 선원들이 글을 몰라서 현물 하나하나를 가르쳐주고 세어서 대장과 대조해주어야 했다. 이런 쓸데없는 일이 며칠씩 걸리는지라 연말을 얼마 안남긴 입장에서 구과장은 속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1969년도 다가는 12월 31일 대만 어선 20척의 작업이 끝났다. 대만측에서 "인수증"에 서명도 했다. 그러나 이 인수증이 한국은행에 도착해야 수출 절차가 완료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해라. 그날따라 서울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행기는 대구까지만 운항되었다. 인수증을 가진 직원은 부산에서 대구까지는 비행기로 온 후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로 서울까지 왔다. 모든 절차가 끝난 것이 오후 3시였다. 종무식이 12시에 있었으니 종무식 후 3시간이 지났을 때이다.

그러나 이렇게 돼서 614만 달러라는 수출이 늘어나 1969년 수출은 7억 281만달러로 7억 달러 목표가 달성되었던 것이다. 만일 대만 어선 수출(614만 달러)이 빠졌더라면 7억 달러 수출목표는 달성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낙선(李洛善)장관은 우리나라에서 수출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최초의 상공장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뻔 했던 것이다.

이낙선 장관은 구과장에게 "대만어선을 해결 못하면 너는 모가지야. 그리고 상공부를 그만둔 뒤까지도 계속 쫓아 다니며 못살게 할 것이다"라고 농담 아닌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2월 말일 오후 3시에 수출이 완료된 것이다. 구(具)과장은 수출 완료 보고를 이낙선 장관에게 했다. 이 장관은 즉시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그리고는 "具과장 수고했어"하면서 돈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몇 장을 건네 주었다. 소위 하사금이다. 조선과 직원은 그 날 멋진 회식을 했다. 그런데 조선공사에서는 10억원의 결손이 났다. 당시 10억원이라면 큰 액수였다.

수출 10억 달러의 고지 점령

이낙선 장관은 취임 후 40일간 악전고투를 했으나 전년대비 40.5%의 증가율을 올림으로써 대통령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70년의 수출목표가 문제였다. 이 장관은 상공부 장관으로 부임하고 난 후, 朴 대통령이 수출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몸소 체험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40%의 신장을 해야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1969년의 수출목표 7억 달러에 40%를 보태면 9억 8천만 달러이다. 그렇다고 이 장관 성격에 9억 8천만 달러로 정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0억 달러로 정해버렸다(42.2% 증). 그리고는 1969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70년의 수출목표를 69년의 목표 7억 달러보다 42.9% 증가한 10억 달러로 보고해 버린 것이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당시 10억 달러의 수출목표 책정에는 비판론이 많았다. 한마디로 너무 의욕적이라는 평이었다.

한국무역협회는 69년말 "1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방안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70년의 수출은 8억 5,150만 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예측했다. 서울대 무역연구소도 "수출 10억 달러 달성은 가능한가"라는 연구보고서에서 8억 5천만 달러로 예측했으며, "유세이드"에서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 각 수출업체가 내놓은 수출계획의 합계액도 8억 5천만 달러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도 9억 5천만 달러로 추계(推計)했으며 정부 각 부처가 내놓은 수출계획 합계액도 8억 6천만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10억 달러를 수출하리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7억 달러의 올해 수출 목표도 연초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가 많았지만, 이제는 달성이 가능해졌다"고 지적하면서 "70년도의 10억 달러도 정부와 업계가 합심하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朴 대통령은 "수출 10억 달러는 우리의 수출역사상 하나의 전기(轉機)를 이루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분발을 촉구했다. 수출 총사령관의 명령이었다. 사실상 정부의 의욕적인 수출계획은 朴 대통령의 강력한 집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수출 10억 달러의 목표는 주무당국인 상공부로서도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장관은 우선 온국민의 수출무드 조성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모든 국민들이 수출에 관심을 갖고 합심 노력하자는 것이며, 또한 수출목표 달성을 위해 온국민의 중지(衆智)를 모으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낙선 장관의 특기중 특기가 다시 발동했다. 눈에 띄는 각종 행사를 시작한 것이다(국세청장 때는 차량번호도 700번이었고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도 증세목표 700억원이라고 크게 써붙이고 다녔다).

 

수출 증진을 위한 각종 행사

한국무역협회가 실시한 수출의 날 기념논문 현상모집을 비롯, 갖가지 행사가 무역협회 주최로 잇달아 추진됐다.

1970년 들어 1월 9일에는 수출진흥에 관한 표어 현상모집이 실시됐다. 모두 10만 2,348편이 응모하는 성황을 이룬 중에 이중 4개의 가작이 선정돼 각각 3만원씩의 상금을 받았다. 응모된 표어는 당시의 수출목표인 10억 달러를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가작으로 뽑힌 것 중에 "너도나도 참여하자. 10억 달러 수출대열", "할 일 많은 70년대 10억불 수출부터" 등이 있었다.

또한 1월 16일에는 수출행진곡 가사 모집이 있었으며 이를 레코드에 수록하여 보급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수출진흥 웅변대회", "수출의 날 기념: 수출진흥 글짓기 대회", "수출에 관한 영화제작", "수출진흥 노래모집" 등 갖가지 행사가 연중 계속됐다.

1970년말에 들어서는 70년도 수출액수 알아맞추기 현상모집까지도 실시됐다. 수출액수 알아맞추기 현상모집에는 모두 10만 1,825건의 응모가 있었다. 이중 1등한 응모작의 수출예상은 10억 380만 7천 달러로 상공부가 공식 집계한 수출실적(정답)에 불과 1,473달러의 오차밖에 없었다.

어쨌든 1970년도는 이러한 행사가 겹친 탓인지 수출무드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수출진흥무드의 덕택과 수출업계의 피나는 노력은 수출실적에 반영됐다. 수출은 매월 집계도 검토되지만, 1월부터 6월말까지의 상반기와 7월부터 연말까지의 하반기로 나누어 심사 분석을 하는 것이 상공부의 통례이다. 대충 상반기에 40%, 하반기에 60% 정도가 수출된다.

과거 수년간 상반기 수출이 잘 될 때 41%가 고작이었던 것이 70년에는 상반기 실적이 4억 3,062만 4천 달러로, 수출계획 10억 달러의 43%까지 올라간 것이다. 당시의 매스컴은 이를 "수출기적"으로까지 표현했다. 이렇게 되니 연간 목표 10억 달러의 달성 전망이 한층 밝게 되었다. 상공부도 돌발사고가 없는 한, 10억 달러의 목표달성은 무난하리라고 장담하고 나섰다. 은근히 걱정해오던 수출목표 10억 달러에 다소나마 자신감을 가진 것이다.

이낙선 장관은 그 해 7월 28일, "10억 달러의 올해 수출목표달성은 확실시된다"고 자신을 보이면서 "연말에 가서 목표를 간신히 넘기는 낯간지러운 일은 하지 않겠으며 장관 자리를 걸고 너끈히 10억 달러의 분수령을 넘겨 보이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관도 불안한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11월로 접어들면서부터 자신감이 생긴 李 장관은 11월 23일 열린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일말의 불안도 없이 「1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은 무난하다. 연초이래 10개월 동안의 수출실적과 앞으로 남은 업계의 선적계획 등을 종합한 결과, 70년의 수출실적은 목표 10억 달러를 넘어 10억 480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어 11월 30일에 열린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朴 대통령은 무척 기뻐하며 치사를 통해 "수출증대의 판가름이 될 10억 달러선의 고비를 금년에 실현하게 됨으로써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날 70년대 중반에는 적어도 30억 달러의 수출을 이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총사령관은 "밀어붙일 때 밀어붙여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70년 수출의 날은 온통 축제무드였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졌으며 카드섹션까지 벌이기도 했다.

1970년말의 연간 수출실적은 정확하게 10억 380만 8,473달러(상공부 기준)로 집계됐다. 67년의 수출 3억 달러의 벽을 깬 뒤 만 3년만에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수출 10억 달러 달성! 꿈만 같이 멀게 느껴지던 산업혁명 제2단계의 목표를 1970년에 달성한 것이다. "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가 메아리쳤다.

모두들 초등학교 학생같이 기뻐했으며 그 중에서도 이낙선 장관이 제일 기뻐했다. 이 장관은 즉시 朴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를 하였다. "각하 지금 10억불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朴 대통령의 치하가 있었나 보다. 이 장관의 검은테 안경 속의 눈이 젖어 보였다. 내가 차관보 시절일 때였다. 나도 열심히 뛰었으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다만 나는 1970년도에 10억 달러가 수출되었다는 것보다는 우리나라가 10억 달러를 수출했다는 그 자체에 감격하였다. 우리나라 산업혁명의 제2단계가 완수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 뿌듯한 희열을 느낀 것이다.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마음이었다.

상공부 일화 - 수출은 눈물의 씨앗(?)

수출에 실패를 하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드디어는 국가위기가 닥쳐온다.

우리나라도 수출에 실패해서 1997년에 소위 IMF사태를 맞고 현재(2001)까지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나라이건 수출을 장려하고, 어느 시대의 대통령이건 수출을 늘리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나라에서는 성공을 하고, 어느 대통령은 실패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1960∼70년대의 우리나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1960∼70년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진흥은 마치 군사작전과 같았다. 총사령관은 朴 대통령이고, 작전참모 본부는 상공부였다. 실제로 전투에 임한 것은 수출연관업체의 임직원인데 그 중에서도 최전선에서 싸운 것은 1960년대에는 여자 단순기능공이고, 70년대는 남자 기능공이었다. 그리고 온 국민이 합세했다.

우리국민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 즉, 「한 많은 보릿고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출제일주의」라는 것을 깨닫고, 온 국민이 똘똘 뭉쳐 수출에 매진했다. 매해 40%의 수출신장이라는 것은 바로 기적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기적을 이룩하는 길이 어찌 험하지 않겠는가? 어찌 고생스럽지 않겠는가? 이 고생의 표출은 '땀과 눈물'이었다. 당시 수출에 깊이 관여한 사람 중에 땀과 눈물을 안 흘려 본 이가 누가 있겠는가? 마치 군에 갓 입대한 신병 중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는 상공부에서 그 예를 찾아본다. 朴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나 「수출 10억 달러 수출계획(시안)」 조차도 무시하고 「수출 40% 신장」만을 고집했다. 「밀어붙여라」가 그의 명령의 전부였다.

상공부에서는 이 목표를 향해 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출품목별, 회사별, 나라별, 날짜별, 금액별 등등 상세한 통계를 작성하고, 이것을 토대로 월별 수출계획을 수시로 체크해야 한다. 매달 매달의 실적은 무역확대회의를 통해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언론에 공개된다. 자기가 담당한 수출이 부진할 때는 막바로 그 담당자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수출애로사항이 생기면 자진해서 타부처와의 협력을 얻어내야 하고, 수출이 부진한 업자에 대해서는 직접 방문해서 독려해야 한다. 즉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그 달의 수출액이 목표액에 미달할 때는 선수금이라도 받아 수출액수를 채워야 한다. 그러니 각 담당자는 빚 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수출확대회의를 개최하는 것 자체도 보통 일이 아니다. 국가원수를 위시해서 국가의 중요인사를 망라하는 회의를 준비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데 이것을 매월 개최해야 하니 담당부서(수출진흥과)로서는 고역중의 고역일 수밖에 없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를 하면 큰 문책을 당했다. 수출진흥과장의 증언을 들으면,

"왜, 한달이 그렇게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전달 수출확대회의를 끝내고 하루 이틀 지난 것 같은데 또 다음달 수출확대회의가 온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수출확대회의에 대한 준비가 덜 됐는데 내일이 수출확대회의라는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게 된다"

"체중이 7㎏나 줄었다. 몸이 축나서 이대로는 못 배겨나겠다" 등등이다.

그래서 아무도 이 자리에 가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 자리야말로 수출진흥을 위해서는 중추적이고 중요한 자리이다. 그래서 가장 유능한 인사를 배치해야 한다. 할 수 없이 임기를 1년 기한으로 하고 1년이 끝나면 영전시켜 준다고 약속하는데도 아무도 수출진흥과장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상공부에서 유행한 노래가 있다. 「수출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노래이다. 당시 유행하던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신다면'의 노래 중 사랑이라는 가사를 '수출'로 바꿔 부른 것이다. 수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이러한 고생도 목표로 정했던 수출고지를 달성하고 나면 환희로 돌변했다. 이렇게 한해 한해가 힘겹게 지나고, 드디어 1970년에 10억 달러라는 수출고지를 돌파한다. 이로써 우리 국민은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됐다. 다음 고지는 수출 100억 달러이다. 이때 우리국민은 「쌀밥에 쌀 막걸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온 국민은 계속 뛸 수밖에 없다. 고생은 하면서도 신명나게 일할 때의 이야기이다.

하면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나는 「우리민족의 정신상태」를 말하고자 한다.

이를 말하기에 앞서「정신이란 환경과 교육에 따라 변하고 정신력(精神力)은 단련할수록 강해진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고래로 우리나라는 유교국가로써 우리 조상은 중국보다 더 유교 모범국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에 따라 위정자의 지상 목표는「성군(聖君)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대다수인 농민의 입장에서 바라는 것은「① 외적(外敵)의 침입이나, 당파싸움으로 전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② 천재(天災), 이변(異變)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③ 관료들의 수탈이나 횡포가 줄어들었으면 ④ 풍년이 와서 먹고사는 데 좀 편해졌으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원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의당 행정적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들은 이를 유교사상으로 해결코자 했다. 심지어는 가뭄이 들면 국왕은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시간은 흘러서 1960년대 초. 경제면에서는「보릿고개」로 표현되는「기아선상」.
이로 인해 정신면에서는 패잔병과 같은 패배감과 절망감. 이러한 정신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급속한 수출신장 덕분이었다.

1964년, 朴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수출위주의 체제로 개편을 단행하고, 그 해에 1억 달러 수출을 지시했다. 「수출제일주의」의 등장이다. 그 결과 그 해 1억 2천만 달러를 수출, 40%의 수출신장률을 이룩했다. 朴 대통령은 그 후 매해 수출 신장률을 40%로 잡고 박차를 가했다. 1967년에는 학자나 업계에서 우리나라의 여건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던 3억 달러를 수출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朴 대통령은 40% 수출신장을 계속 고집했다.

1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에 대해서 ― 국민이나 언론계에서는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 朴 대통령은「하면 된다」라며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 해 우리 국민은 10억 달러를 수출해냈다.

이때 비로소 국민들은 자신과 용기, 희망을 갖게 된다. 朴 대통령은 "우리 민족은 똘똘 뭉치면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수(隋)의 100만 대군을 물리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 국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지금은 10억 달러 수출이라는 기적을 이루고 있지 않느냐. …… 선진국과 같이 잘 살려면, 먼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선진국이 되려면 우리 국민은「선진국 국민이 어떠한 방법으로 선진국을 건설했는가」를 본받아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 개개인의 능력이 선진국(당시는 일본)보다 못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하면 된다. 우리 국민도 할 수 있다」. 그 방법은, 경제면에서는「수출제일주의」, 정신면에서는「자조, 근면, 협동」과「근검, 절약, 저축」의 새마을 정신이다"라며「국가적 목적의식과 국민적 행동의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다.

이때 비로소 위정자(정부 또는 우리나라)와 우리 국민의 의식구조가 혼연일치 하게 됐다. 그 후「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식구조는 70년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그 후로도 우리나라는 40%라는 수출신장을 계속 했다(註 : 1973∼79년의 평균 신장율 ― 39.6%). 그리고 1977년에는 대망의 100억 달러 수출을 하게 된다.

세계 언론계에서는 한국이「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다고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경이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 ― 한국, 대만, 싱가폴, 홍콩 등 ― 4마리의 용(龍) 중 한국을 선두주자라고 했다. 한 저명한 미국의 잡지(「Newsweek」June 1977)는 커버스토리로「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라는 특집 기사를 썼다.

이 글에서「한국인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고 있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신념화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였다(註 : 그 후「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목적의식과 행동의식은 크게 변질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국민적인 행동의식이「나도 할 수 있다」는 이기주의적인 행동의식으로 바뀌어지더니, 현재「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구절은 아예 삭제돼 버렸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개인주의가 성해지고 그 결과 오합지졸의 나라가 되어버린다.

당시의 국가적 목적의식의 근간이었던 수출신장률은, 1960∼70년대의 40%에서 전두환 정권에서는 15.8%, 노태우 정권 10.5%, 김영삼 정권 12.6%로 급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1960∼70년대는 정신면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특이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에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이 ―「하면 된다. 우리(국민)도 할 수 있다」는 정신을 본래의 뜻대로 견지하고 ― 수출증가율을 1980년대에 평균 20%, 1990년대에 평균 15% 정도만이라도 유지시켰다고 가정한다면, 1999년에는 3,800억 달러라는 막대한 액수를 수출하게 된다.

그러려면 새로운 물품을 계속 개발해서 수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수입액 또한 대폭 감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건실한 정신상태를 갖는 당당한 선진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면서 선진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새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한국은 4마리의 용에서 토룡(土龍, 지렁이)으로 변했다고 평한 외국 인사도 있었다).

그 후 30∼40년이 흘렀다. 1960∼70년대의 사건들은 역사 속에 파묻힌 일들로서 많은 부분이 망각속으로 사라졌다. 당시를 경험 못한 새로운 세대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감격은 현재까지 살아남아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실정을 모르거나 그 때도 지금과 같았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현재의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당시 '수출'에 대한 회고 - 외교란 강대국간의 거래일 뿐이다.
Question :
「1960∼70년대는 세계가 자유무역을 확대코자 노력하던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수출할 수 있었다. 이런 시기이니 누가 집권을 하더라도 수출진흥을 했을 것이고, 그리고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다」라고 평하면서 1960∼70년대에 우리나라와 우리국민이 이룩한 수출업적을 폄하하는 말이 있는데 과연 참말일까?

Answer :
이런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당시 미국정부가 강행한 「섬유규제」의 예를 들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주종 수출상품은 섬유제품이고 주로 미국에 수출했다. 그런데 1960년 후반기에 들어서자 미국은 자기나라의 섬유업계를 보호한다고 강력한 수출규제를 했다(어떤 나라도 자기나라 업계를 보호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규제방법은 섬유제품별로 미국내의 수요증가 정도의 증가만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그 수치는 품목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년간 5% 정도였는데 어떤 나라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이나 대만은 일찍부터 수출을 했기 때문에 실적이 컸는데 우리나라는 막 수출을 시작한 상태였으니 실적이라야 보잘것이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의 수출증가는 거의 기대할 수 없게 됐다.

-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나라는 1966년에 100개를 수출했는데 A라는 나라는 1,000개, B라는 나라는 1만개를 수출했다면 수출증가율 5%를 적용하면 다음 해인 1967년에는 우리나라는 105개, A는 1,050개, B는 1만500개를 수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5개만 증가했을 뿐인데 A는 50개, B는 500개를 더 수출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수요증가는 5+50+500=555인데 그 중 우리나라는 5개만 차지하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매해 계속 되풀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앞날이 캄캄했다. 그래서 우리정부는 이런 불공평한 점에 문제를 제기하고 아울러 한·미간의 특별한 관계(월남파병)를 들어 "수출쿼터"를 늘려달라고 부탁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이때의 암담하고 억울한 심정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결국「외교란 강대국끼리의 거래일 뿐, 약자는 끼어들 틈이 없다」고 절감을 했다.
여기에 대한 해결방법은, 수출수량은 이미 결정이 나버렸으니 품질을 고급화함으로써 가격을 더 받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하고 필사적인 노력을 해 나갔다


 

<결론>
수출은 전쟁과도 같다. 전쟁이란 전세가 불리하다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작전의 본질이며, 지휘관의 책임이다. 그렇기에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수출목표 달성이란 등산가가 산 정상을 향해 오르고 정복하는 것과 같다.
산이 있기에 오르고, 정복하는 것이다. 당시 우리의 '수출'도 그러했다.

만일 구체적인 수출목표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목표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치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수출에 전력을 다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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