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연구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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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연구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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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특수군 600명은 남침의 명분을 위한 상황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광주에 온 것

▲ ⓒ뉴스타운

5.18은 김일성과 김대중이 야합한 북한의 게릴라 침략이었다. 북한의 인민군 원수로 2015년에 사망한 리을설이 60세의 3성장군으로 내려와 용병급 능력으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600명을 지휘했다. 이들 600명은 학생으로 위장하여 공수부대 주둔지를 찾아가 싸움을 걸어 공수부대로 하여금 광주시민을 상대로 진압봉을 휘두르게 만들었다.

이 600명은 군부대의 극비사항인 부대이동정보를 획득하여 톨게이트에 매복해 있다가 5월 21일 08시 정각에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를 습격해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해 군용차량 공급 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몰고 가 경비병들을 위압하여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에 키를 꼽게 한 후, 이들을 몰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곧장 질주했다.

광활한 전라남도 땅에 골고루 산포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2개 연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5,403정의 총기를 탈취했다는 것은 사전 예행연습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기고를 향해 달릴 때는 곧장 덜리더니 무기를 털어 광주로 올 때는 여러 차례 길을 물었다. 8톤 트럭 분량의 TNT를 털어 전남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 놓았다.

그런데 이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기술자는 전라남북도를 관할하는 계엄부대 전체에 단 1명밖에 없었다. 사상범 170여 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자들을 해방시킬 목적으로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했다. 광주의 개념 없는 양아치 계급들을 몰고 다니면서 광주와 전남지역 전반에 걸쳐 동시다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600이라는 숫자는 검찰의 수사결과보고서에도 있고, 상황일지에는 비일비재하고, 1985년 발행된 안기부 보고서에도 있고, 북한 책 여러 곳에 있고, 심지어는 5.18기념재단 공식 홈페이지 역사기록에도 쓰였고, 돌로 만들어진 광주의 사적물에도 깊이 새겨져 있다.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600명은 계엄군과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계엄군이 없는 곳들에서 광주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해놓고, 이를 공수부대의 만행인 것으로 뒤집어씌움으로써 전라도 지역과 국가 사이에 남남 전쟁을 유발시켜 전남지역을 치열한 내전상태로 몰아넣고, 이 내전의 불길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후, 국제사회를 향하여는 대한민국은 자국민을 학살하는 인류공동의 적이라는 내용으로 모략 선전하여, 남침의 명분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상황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온 것이다.

특수군 600명이 이룩한 상황적 토대를 최대한 이용하고 이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대규모 정치 공작조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당시 현역 대남공작부장 김중린(58세)이 이끄는 또 다른 600여 명의 정치공작조가 내려왔다. 남녀 노인들, 10세 전후의 꼬마들, 영화배우, 조각가, 소설가, 음악가 등 각계의 성분 좋은 사람들이 내려왔고, 김일성의 4촌 여동생인 김정숙,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와 장성택 그리고 그 세 살 난 장금송 등 8명의 로열패밀리까지 왔다.

이들 남녀노소 민간인들은 시체 장사에 동원됐다. 시체가 든 관들을 도청 앞에 내다놓고 마치 그들이 광주시민들인 것처럼 무대를 만들어 사진들을 찍고, 이 사진들을 독일 기자 힌츠페터를 통해 세계에 내보냈다. 이로 인해 전두환은 국제사회에서도 살인마 또는 독재자로 몰렸다. 이들은 또 남남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전라도 각지에 다니면서 유언비어를 확산시켜 국가는 타도해야 할 대상인 것으로 모략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북한은 10명, 20명, 30명씩의 소단위 침투조를 잠수함과 태백산맥 루트 등을 통해 광주 전남 지역에 보내, 게릴라 시가전 작전을 준비케 하는 한편 대형 선박이 드나들 수 있는 교두보를 설치한 후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데려왔다. 공산당은 늘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배합하여 전쟁을 한다.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은 언제나 공산 게릴라전의 필수품이었다.

방법 및 과정

위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데까지에는 문헌연구와 영상분석 두 가지가 있었다. 문헌연구는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2년 동안 이루어 졌고, 영상분석은 2015년 5월 5일부터 지금까지 40개월 이상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문헌연구는 내가 주도했고, 영상연구는 노숙자담요라는 필명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 이끄는 영상분석팀이 주도했다.

내가 활용한 문헌들은 1980년에 작성된 검찰기록, 1, 2, 3심 법원 판결, 1980년 및 1995년의 검찰기록, 공판조서 등 A4지 18만 페이지 정도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더해 통일부 자료, 북한의 대남공작 자료, 광주 5.18기념재단 등이 발간한 5.18유공자들의 증언집 등이 있다. 2014년 10월 나는 최종적으로 2014년 10월, “5.18분석 최종보고서”를 썼다. 여기까지에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1) 북한특수군 600명이 광주폭동을 주도했다 2) 광주에 광주인들이 구성한 시위대는 없었다. 3) 광주의 무개념 양아치 계급들은 북한특수군 600명에 부역한 부나비들이었다. 4) 대한민국 국민 중에 광주시위를 지휘한 사람은 없다.

2015년 5월 3일,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서 유명했던 사진에 나타난 광주폭동의 대표적인 주역 얼굴이, 연합뉴스가 보도한 2010년 평양 노동자회관에서 거행된 5.18 제 30주년 기념행사장 사진에서 로열석에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과 똑같이 생겼다는 글을 올렸다. 나는 시스템클럽 홈페이지에 ‘영상분석 전문가를 찾는댜’고 도움을 청했다. 이에 필명 노숙자담요가 즉시 나타나 5월 5일, 제1광수에 대한 얼굴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올렸다.

그는 얼굴의 각 부위를 화살표와 함께 비교하는 설명을 했고, 특히 얼굴 부위의 특징에 대한 분석을 자세히 해주었다. 이 분석내용을 접한 수많은 네티즌들이 감탄을 했고, 흥분한 네티즌들이 광주 현장 사진들을 찾아내서 “이 얼굴이 북한 인물 사전의 누구와 닮았다”며 노숙자담요에게 분석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이런 토스와 분석에 의해 광주에서 찍힌 현장 얼굴들이 북한의 아무개와 같은 얼굴이라는 분석결과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는 순서대로 제1광수 제2광수로 명명되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2018년 9월 13일 현재까지 무려 567명의 광수가 나왔다. 광수라는 이름은 광주에 다녀간 북한사람을 의미한다. 5.18당시 북한이 모든 TV프로를 생략하고 24시간 광주사태를 실황중계 했는데, 군 내무반에서 이를 시청하던 병사들이 “야, 저기 광수가 달린다, 광수, 저것 좀 봐”하며 박수를 치면서도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탈북자들이 2009년에 발행한 수기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 소개되면서부터 광수는 ‘5.18-네티즌’들의 유행어가 돼 있었다.

광주 현장 사진 한 장에 있는 29개의 얼굴이 최근 김정은과 함께 찍은 인민군 장군단에 다 들어 있기도 했다. 인민군 원수가 1명, 차수가 12명, 대장이 47명, 역대 내각총리 5명, 최룡해, 김영철, 황병서 등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한의 고위급 치고 광주에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광주는 북한사람들의 가장 큰 출세코스였다. 황장엽과 김덕홍도 광수, 강명도 조명철을 위시한 탈북자 60명도 광수로 판독됐다.

현 주홍콩 북한총영사는 장성철이다, 그는 전남도청 앞에서 교련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혀를 내미는 순간에 카메라에 잡혔다. 그건 그가 2017년 3월, 홍콩 봉황TV와 28분간 인터뷰 하는 데 무려 32번씩이나 혀를 내밀었고, 노숙자담요가 그 32개의 순간 모두를 포착하여 인터넷에 올렸다. 두 얼굴의 뺨에 나 있는 깊은 흉터도 똑같이 일치한다. 광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제1광수로부터 제567광수까지 모두를 부인한다 해도 제498광수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한 광수만 인정해도 광주에 북한특수군은 온 것이 된다. 이 498광수는 네티즌 세계에 “혓바닥광수”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내가 문헌들만을 가지고 연구했을 때는 단지 북한특수군이 600명 왔다는 사실까지만 확인했다. 그런데 노숙자담요의 영상분석 결과 우리는 김일성이 특수군 600명만 보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별도의 600명 정도의 정치공작조를 내려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무슨 작전을 벌이고 갔다는 것을 현장사진들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20사단 지프차를 몰고 가는 사진, 장갑차를 유도하는 사진, TNT를 조립하는 사진, 도청을 배타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사진, 시체장사를 하는 사진 등으로부터 그들이 무슨 작전을 했는지 충분히 해석할 수 있었다. 수백에 이르는 현장사진들은 주로 노숙자담요에 의해 발굴되었고, 그 사진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선사했다. 하나는 사진으로부터 당시의 작전 상황을 읽을 수 있게 했고, 다른 하나는 현장 사진 속 얼굴이 북한의 누구라는 사실을 분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5.18연구를 완전에 가깝도록 할 수 있게 한 하늘의 뜻인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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