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죽, 최소화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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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 최소화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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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리큐의 나팔꽃과 매죽헌의 고사리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겉모습을 지닌 것은 그 모두가 속이 무르며 흩어지노니,
만약 여러 모습에서 그 아님이 보인다면 이는 곧 여래이니라.

- 금강경 사구게 중에서-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서 있었던 이야기이다. 당시 흥미로운 인물 둘이 서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기세싸움을 벌렸다. 한 사람은 천하의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조선을 정벌할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한 사람은 나중에 일본에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센리큐(千利休)인데, 그는 원로였으나 일천(日淺)한 쇼군에게 차를 끓여주는 자리에 있었다.

문제는, 조선침략을 둘러싸고 리큐가 명백하게 반대하면서 히데요시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오사카(大阪) 지방의 여론을 지키려는 리큐(利休)와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를 전진기지로 삼은 히데요시 사이에 정치적인 갈등이 빚어졌다. 그런데 이 두 사람끼리 맞상대가 성립되나? 히데요시는 내면이 허한 반면, 리큐는 선(禪)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대결이 되었다.

자네 집의 나팔꽃이 아름답다지, 한번 보고 싶네, 히데요시는 리큐에게 부탁했다. 이것이 최후의 통첩임은 리큐는 직감한다. 다음날 아침, 히데요시가 리큐의 집에 가서 본 나팔꽃은 리큐의 다실에 있는 작은 꽃병에 꽂힌 한 송이뿐이었다. 마음을 정리한 리큐가 그 한 송이만 따내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 없애버렸던 것이다. 다회(茶會) 이후 그는 배를 가르고 죽었다 한다.

선문답 같은 장면이지만, 리큐는 히데요시가 결코 잊지 못할 충고를 남긴 것이다. 자네는 머릿속에 많은 나팔꽃으로 뒤덮인 꽃밭을 그렸겠지, 넌 수량이 많아야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수준에 불과하다네. 한 티끌 속에도 모든 것이 들어있는 화엄(華嚴)의 세계를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히데요시 군.

매죽헌은 성삼문(1418-1456)의 아호이다. 그는 이제(夷齊)의 고사(古事)까지 한탄한 인물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불의한 군주의 녹(祿)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끝내 굶주려죽었다는 성인(聖人)들이다. 그러나 고사리가 절로 나는 풀이라지만, 그 누구의 땅에서 난 것인가? 고로, 그냥 죽었으면 더 좋았다는 것이다.

매죽헌은 대역죄인의 몸으로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직계 3대의 남자는 모두 죽었다. 충남 홍성군 홍북면에 노은리(魯恩里) 마을이 있다. 매죽헌은 본관이 경남 창녕이지만 이곳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 대소가들이 폐허되었고, 그 공터에 그의 유허비(遺虛碑)와 부인이 모셨던 신주를 묻었다는 노은단(魯恩壇)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매죽헌이 보여준 미학(美學)은 단조롭게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생명력을 집중시켜 한 순간에 축제의 폭죽처럼 터트렸다. 하늘마저 감동했을까. 그 생명은 한 세기 후에 리큐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하늘로 향해 가냘픈 넝쿨손을 흔들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피는 하루살이의 나팔꽃으로. 그 최소화의 틈새는 낙타에게 바늘귀의 구멍만큼 열려있는지 모른다.

건축사는 문화사의 중추였다. 20세기 후반부터 양분된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다원화를 바탕으로 하는 탈근대주의(post-modernism)가 지구촌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것과 별도의 느낌을 주는 독특한 건축흐름이 하나 나타났다. 이름 지어, 최소화주의(minimalism)이랄까. 포스트모더니즘이 도시의 번잡한 교통망 같다면, 미니멀리즘은 상대적으로 시골의 단조로운 신작로 같다.

미니멀리즘은 선과 색을 가능한 절제하고 생략한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기제(mechanism)는 무엇보다 단순성이다. 이것은 단순함이 공간에서 초극의 긴장감을 주기 때문이다. 초극은 사물에 정신적 의미를 표출한다. 미니멀리즘에는 그밖에 공간너머의 반복성, 공간사이의 순수성, 공간 안의 폐쇄성 따위를 강조한다. 종묘(宗廟)는 이런 최소화를 갖춘 걸작이다.

노은단 그 건너 쪽 기슭에 부인 연안김씨의 묘가 있고, 여기서 좀 떨어져 그의 부모의 묘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4개의 무덤은 모두 단순했으나, 각기의 묘는 대지너머 초공간의 모서리처럼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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