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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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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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산업혁명과 산업전사 - ②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보릿고개

가난한 농가는 봄이 되면 식량이 떨어진다. 당장 먹을 저녁 거리뿐 아니라, 내일도 모래도 먹을 양식이 없다. 나 혼자만 못 먹는 것이 아니다. 양육해야 할 어린 자식이 밥 달라고 보채고, 산모의 젖이 안 나와서 젖먹이 애가 울부짖는다.

모두 비슷한 처지라 양식을 꾸어올 데도 없고 꾸어줄 사람도 없다. 할 수 없이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태워서 가루로 만든 다음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와 나무껍질)를 넣어서 죽을 쑤어 먹는다. 소위「찢어지게」가난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註 : 이렇게 먹으면 변(便)이 굳어져서, 배설할 때 항문이 찢어진다. 고래로 우리 조상들은 가장 비참한 가난을 표현할 때 이 말을 사용했다).

보리 추수가 돼야만 끼니라도 때울 수 있는데, 그때까지 못 견디면 굶어 죽는다. 보리추수가 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내년, 그 다음해에도 이런 상태는 계속되는 것이다. 즉 「보릿고개」의 심각성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가족 전체의 문제라는 데서 오는 좌절감과, 영구히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릿고개」를 당하는 농가는 식구(註 : 食口, 밥을 먹는 입의 수, 즉 가족 수를 표현한 말이다)를 줄이려고, 10세도 못 된 어린 자식을 양자로 보낸다. 이들은 주로 여식(女息)인데, 아기를 보거나 식모 살이(현재의 가정부)를 했으니 종살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다음으로 옆 나라 일본과 ― 우리나라와 똑같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 대만의 사정을 알아보자.

패전 직후의 일본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나라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 경제는 소생을 하고 발전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태였던 대만조차도 1950년대 말기에 가서는 미국의 원조를 중단, 자립경제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이런 상태가 되니 우리 국민은 완전히 용기를 잃고, 스스로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이 때「엽전이 별수 있간디」,「'와라지'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다고」라는 말이 유행했다(註 : 「와라지」라는 것은 「짚신」이라는 뜻의 일본말.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단발령을 내렸다. 양복을 입게 하고 구두를 신게 했다. 그러나 천민들은 이에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와라지」라며 천시했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은 짚신을 신고 있는 한국인들을 보고도「와라지」라고 했다).

여기서「엽전」이나「와라지」는 우리 국민을 뜻한다. 「달러 세상이 됐는데 엽전으로 무슨 힘이 있겠느냐」는 뜻이고, 「다른 나라 사람은 모두 구두를 신고 다니는데, 우리는 짚신이나 신어야 할 신세」라는 뜻이다. 이때 국민들의 사기는 패잔병의 심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5 · 16 군사정부는「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라고 표현했는데, 당시의 국민들에게는 무척 동감이 가는 표현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자립경제」를 하겠다고 나섰다. 「자립경제」라는 것은, 미국 원조없이 나라살림을 꾸려가겠다는 극히 소박한 욕망이었다.

경제 자립과 인력

1960~1970년대. 공업분야가 거의 황무지였던 당시, 나는 공업분야의 개발전략을 수립하는 중추부에서 일하게 됐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자원은「한국인이라는 인력(人力)」뿐. 이「인력」을 활용함으로써 국민이 먹고 살고, 나라의 경영을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인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 국가는 부강해지고, 국민은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인력」에 관해서 아는 사람도 없고, 조사된 자료도 없었다. 모두가 감으로 느끼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분야에 대한 계획을 수립할 때마다「한국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고서는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먹고살기 힘들면 부녀자가 발벗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베틀에 매달리고 삯바느질을 했다. 베틀이나 삯바느질에는 으레 깜박이는 호롱불이 따른다. 밤을 새워야 했기 때문이다. 가난에 따르게 마련인 슬픈 장면이다.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부자나라 즉 선진국에서는 섬유공업이란 사양산업이다. 후진국의 몫인 것이다. 싼 노임으로 노동력이 풍부한 나라에 적합한 공업이다.

1960년대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뿐이었다. 남자들에게는 일감이 없다. 결국 여자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값싼 노임의 시대이다. 이래서 섬유공업이 발달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국가적으로 길쌈을 하고 삯바느질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품을 부자나라에 팔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선 여성인력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인력의 양(量)

「인력」에는 양 (量)과 질(質)이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양(量)조차도 문제가 있었다.

1964년 말, 내가「공업의 수출 체제로의 전환」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을 때이다. 농촌에서 남아도는 유휴노동력을 활용, 섬유제품 등 경공업 제품을 생산, 수출을 한다는 전략이었다. 이 분야는 젊은 여성근로자(女工)들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연도별, 학력별, 사회진출 여성들의 총수만큼은 알아야 했다. 그런데 이러한 통계는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통계를 작성할만한 근거자료도 없었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 국가 통계상 가장 중요한 기초자료가「인구통계」인데, 이것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5 · 16 혁명 정부는 국민에게 6년제 의무교육(義務敎育)만큼은 꼭 수행하겠다는 공약을 했다. 그래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대대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교실을 확충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교실 부족 상태가 점점 더 악화 되더니, 3부제는 보통이고 심지어 4부제까지 등장했다. 계획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긴급 조사팀을 구성, 현지로 내려가서 내용을 파악해보니, 계획 작성시 기초로 삼았던「인구통계」가 엉터리 였다는 것이 판명됐다.

결국 당시(1960년)에는 믿을 만한「인구통계」조차도 없었다는 뜻이다. 부득이 나는 여러 가지 가정(假定)을 설정, 스스로 통계를 작성한 후 업무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 윤곽이나마 파악하지 못하면 수립된 전략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 되기 때문이었다.

부실한 인구 센서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후 최초로 인구, 주택, 농업에 대한 대대적인 센서스가 실시된 것은 1960년 12월 1일이었다.

장면(張勉) 내각시대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통계라는 것을 이 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센서스가 처음 시도된 사업이었던 만큼 경험도 없었고 조사방법도 철저하지 못했다. 하지만 60년대에는 이 통계가 유일한 것이었다. <도표 6-1> 1)항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를 보면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국제적인 연령구분으로 되어 있지 않다. 국제적 기준은 연령을 만(滿)으로 따져야 하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상식이 없었으므로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우리식의 나이 세는 방식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즉, 출생한 해에 한 살이 되고 해가 바뀌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식이다. 그러므로 이 센서스 통계에는 0세(零歲)가 없고 처음부터 1세로 나오는 것이다. 조사 받는 쪽도 생년월일을 음력으로 밖에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그나마 정확하지도 않았다.

60년 센서스에 의한 통계가 발표됐으나 만(滿) 나이로 따지는 다른 나라 통계자료와는 연관을 맺을 수가 없었다. 통계국에서는 우선 만(滿) 나이로 수정하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자료가 정확치 않아 작업은 거의 불가능했다.

대충 그 수치가 나온 것이 <도표 6-1>의 2)항인데, 각 연령별 인구가 들쑥날쑥해서 첫 눈에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는 이를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1,000명 단위 이하는 발표도 하지 않았다. 결국 60년 센서스는 인구에 관한 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더구나 이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려서 71년에 가서야 발표가 됐다.

제1차 5개년 계획에서는 초등학교의 교실 수만큼은 완비한다는 계획 하에 매년 이를 확충해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리 확충해도 교실은 부족했고, 그 심각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 갔다.

당시 문교부가 갖고 있는 인구통계 자료라고는 60년에 실시한 센서스밖에 없었으므로 이것을 토대로 해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실제 상황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 예로 어떤 농촌에다 센서스에 나와 있는 아동 인구에 맞게 교실을 지어 주었는데, 실제로는 교실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경우가 발생했던 것이다. 현지조사를 해보니 60년도 센서스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64년에 20세 이하의 연령별 아동수를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 숫자가 <도표 6-1>의 3)항이다. 그런데 이 숫자는 60년 센서스와는 너무나 차이가 컸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조사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 65년에 재확인 조사까지 실시했다. 이번에는 64년의 경험을 살려 조사원에 대해 사전에 교육도 시키고 지방관서를 총동원해서 조사에 철저를 기했다.

그 결과가 <도표 6-1>의 4)항이다. 3)항과 4)항에는 좀 차이가 났으나 그래도 통계자료로 쓸 수 있다는 판단이 섰으므로 문교부에서는 4)항의 숫자를 교육계획의 기본자료로 삼기로 했다.

이 표에서 특이한 사항은 53년 휴전을 고비로 출생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전후 「베이비 붐」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베이비 붐은 63년쯤에 가서야 좀 진정이 된다. 정부의 산아제한운동 덕분이었다.

66년에 전국민 센서스를 실시했다. <도표 6-1>의 5)항이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어느 해에 출생한 인구라는 것은 사망으로 줄기도 하고,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줄기도 하기 때문에 해가 지날수록 줄어드는 것이 자연적이다.

그런데 4)항과 5)항을 비교해 보면 61, 63, 64년 3개년의 인구수는 해가 지나갔는데도 「66년도 센서스」에서 조사된 인구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일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구가 많은 쪽을 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면 60년 이전의 숫자는 65년 자료(로 표시한 부분)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65년 조사자료 쪽이 66년 센서스보다 덜 들쑥날쑥하다. 그래서 필자는 60년까지는 「65년 조사자료」, 61년부터 64년까지는 「66년 센서스」를 쓰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정리한 것이 <도표 6-2>이다. 필자로서는 출생인구 쪽에 가까운 자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註: 중요한 통계수치는 꼭 확인할 필요가 있다. 경제건설 홈페이지『경제이슈 / 대북식량지원』에서 북한당국은 식량생산 및 소비량조차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아 이를 추산하는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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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식민지시대의 교육수준

일본은 툭하면 식민지시대에 교육만은 제대로 시켰다고 강변한다.

<도표 6-3>은 출생년도별 수학년수 통계표이다. 이 표를 보면 1911~20년에 출생한 사람(<도표 6-3>**)은 68.08%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거나 초등학교 졸업을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31.93%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다음에 1921~30년에 출생한 사람(<도표 6-3>*)의 통계를 보면, 초등학교(註: 일제 때는 보통학교나 심상소학교, 해방 후에는 국민학교) 졸업자가 54.07%로 높아진다. 필자는 1928년생이니 이 연령층에 해당된다.

필자가 어릴 때 살던 곳은 인구 7, 8천 명의 꽤 큰 면(面)이었는데, 초등학교는 한 개였다. 필자가 1~2학년 때에는 조선시대의 관아를 학교로 사용했는데, 크지도 않는 운동장에 500년이나 된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새로운 교사를 신축해서 이사한 것이 4학년 때였는데, 같은 학년에 남학생 반(80명) 하나와, 40명의 여학생 반이 있었다. 여학생은 두 학년이 합반해서 한 교실을 사용했다.

학생에게는 고유번호가 부여됐는데, 생년월일이 제일 앞서는 학생이 1번이었다. 필자는 정년에 입학했는데도 80명 중 78번이었다. 필자보다 생년월일이 늦은 학생은 단 2명뿐으로 나머지는 나이가 많았다는 뜻이다.

한 두살은 고사하고 서너 살씩 나이가 많은 학생도 있었으며, 형제가 한 반에 다니기도 했고, 6학년 때는 이미 결혼한 학생이 3명이나 있었다.

또 한가지 A라는 사람의 예를 든다. 경기도 청평초등학교 출신인데 1924년생이다. A는 11세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한 교실에서 두학년 학생이 공부했다. 한학년은 40명인데 남자는 36명, 여자는 4명뿐이었다. 당시 청평학교는 4학년밖에 없어 교육을 더 받기 위해서는(5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해야했는데, 졸업생 40명 중 4명만이 전학을 했다.

당시 일본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우리나라 사람까지 징집을 했는데 제1기생이 1924년생이었다. 그래서 A는 일본군에 입대를 하게 됐는데 소집을 당하고 보니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포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 때만 하더라도 한글을 몰라 전우에게 편지의 대필을 부탁하는 예가 있었고, 신병훈련소에는 휴전 후에도 상당기간 "가나라다"를 가르치는 한글 교육과정이 남아있었다. 이들은 군대에 입대하고 난 후에야 한글을 익히고 비로소 부모님이나 마누라에게 편지를 쓸 수 있게 됐다.

결국 학령 정년기에 학교에 간다는 것이 일정시에는 쉽지 않을 때였다는 것이고, 모든 아동이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결과 (<도표 6-3>*) 초등학교 졸업자가 54.07%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중 중학교 졸업자가 16.70%이다(註: 이 통계에서 중학교 졸업자라는 것은 9년 이상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다. 당시 중학교는 5년제였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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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설명한 것을 정리하면, 일본 식민지 하에서는 1930년에 출생한 사람까지는 약 50% 정도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일제 말기에 가서야 70% 정도가 초등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이것도 일제 말기 우리 국민을 일본군에 징집하려고 초등학교를 대폭 확충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일제의 교육목표는 우리 국민의 약 50% 정도를 초등학교까지 교육시키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도 식민지 통치수단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고마울 것이 없다. 필자의 초등학교 교훈은 「좋은 일본인이 되자」 는 것이었고 한국말은 쓸 수 없었으며, 5학년부터는 한국어라는 과목 자체가 없어졌다.

일본 식민지 하에서 좋은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각 도(道)에 한 개씩 있는 공립학교에 간다는 뜻이었는데 입학생 수는 학년당 100여명이었으니 전국의 입학생 수는 천여명에 불과하다. 지금으로 치면 초일류대학에 가는 것만큼이나 힘들었고, 중학교 졸업자란 고등교육을 받은 유식 층에 속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실정이고 보니 문맹자(文盲者)의 수도 대단했다.

1960년 센서스에 의하면 13세 이상 총 인구는 15,945,809명이다. 그 중 문맹자(註: 학교교육을 받았던 안 받았던 간에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가 4,450,230명이었으니, 문맹자 비율은 28%나 됐다. 문맹자 중 남자가 1,239,106명이고 여자는 3,211,124명이었다. 남자의 문맹률은 15.5%이고 여자는 40.3%이다. 부녀자의 40%가 간단한 자기 의사조차 글로 쓸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얘기다.

일제 때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 사람보다 배우지를 못했고, 그래서 일본 사람보다 한 단계 낮은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못 배운 사람의 직업이란 농사를 짓거나 막노동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공장에 가도 잡부 역할밖에 할 수 없었고, 초등학교 졸업생 중 똑똑한 사람만이 겨우 맨 하층의 견습공으로 일을 배울 수가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사회진출자의 교육수준

제1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당시, 1964년도 졸업학년(1965년 3월 졸업)을 기준으로 사회에 배출된 인력자원의 교육수준을 알아보기로 한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보릿고개」를 참다못해 도시에 나와도 일감이 없다. 지게를 메거나 잡부 일을 해도, 먹을 거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날씨라도 나빠서 일감이 없으면 매일 매일이「보릿고개」가 될 수도 있다. 이런「보릿고개」는 1977년에 가서야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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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취학자: 35,933명(6.5%) (註: <도표 6-4> 참조)

65년에 졸업하는 학생의 출생년도는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면 13년 전인 1952년이다. 이 해의 인구는 65만 3천명이다(註: <도표 6-2> 참조). 이중 65년 봄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수는 61만 7천 명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은 3만 6천명으로 초등학교 미졸(未卒)인데도 사회에 진출한 인력자원이다.

(2) 초등학교 졸업 후 취업: 346,987명(63%)

이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수는 30만 1천명이다. 따라서 초등학교 졸업만으로 사회에 진출하는 인력자원은 31만 6천명(61.7만 명 - 30.1만 명)이 된다. 중학교 진학생 30만 1천명 중 3년 후 27만 1천명만 졸업을 했으니 3만 명이 중학교 재학 중 중퇴했다.

이 숫자도 사회에 진출한 인력자원인데, 중학교를 졸업 못했으니 초등학교 졸업자로 구분한다. 즉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인력은 34만 7천명(31만 6천명 + 3만 명)이 된다.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작성한 것이 <도표 6-5> 1965년 사회진출 인력의 학력 구분이다. 총정리하면, (1)항에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비율이 6.5%나 된다.

(2)항에서 초등학교 졸업만으로 사회에 진출한 비율은 63.0%를 차지한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6.5%까지 합치면 70%라는 엄청난 비율이 초등학교 졸업 후, 즉 만 13세에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는 뜻이 된다(註: 그래서 당시의 노동통계 자료를 보면 노동인구의 구분을 만 13세로 정했던 것이다. 만 13세는 취업을 해야 하는 연령이라는 해석이었다).

(3)항에서 보면 중학교 졸업자 비율이 9.5%로서 이들은 만 15세에 사회에 나왔다. 결국 중학교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갖고 사회에 나오는 비율은 79.0%(6.5% + 63.0% + 9.5%)나 된다. 8할이 중학교 학력 이하로 취업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남녀간의 학력차이

그런데 이 숫자도 남자와 여자간에는 심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남존여비의 사상이 있어 여자를 공부시키는 것에 소홀했다. 그 결과 1965년 초 사회에 진출한 인력의 남녀 간 학력 차이는 <도표 6-5>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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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미졸업자는 남자가 0%인데 비해 여자는 무려 13.9%에 달했다. 한편 초등학교 졸업 후 사회 진출한 경우는 남자가 62.1%, 여자는 64.0%이다.

따라서 남자는 초등학교 졸업 이하가 62.1%이고, 여자는 77.9%나 된다. 여자는 약 80%가 중학교도 졸업 못한 학력을 갖고 사회에 진출했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러한 여자 인력이 ―우리나라에서 산업혁명이 막 시작될 때 근본적인 원동력이 된― 유일한 자원이었던 것이다.

중학교 졸업 정도의 학력을 가진 사회진출 인력은 남자가 10.6%, 여자가 8.2%였고, 고등학교 출신은 남자가 16.3%, 여자가 9.1%였다. 대학 진학은 남자가 10.9%인 데 비해, 여자는 단지 4.9%였다.

우리나라에는 인력자원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인력자원의 질이라는 것이 6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수준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다.

여성 인력 자원

<도표 6-5>에 의하면, 1965년 봄 사회에 진출한 여성의 총수는 26만 명(100%)이다. 이 중 초등학교도 못 나온 수가 3만 6천명(13.9%), 초등학교 출신이 16만 6천명(64%). 따라서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소지자가 78%를 점한다는 결과이다.

중학교 출신은 2만 1천명(8.2%)에 지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출신은 당시로서는 잘 사는 집안의 여식이었다. 본인이나 부모나 육체노동은 원하지 않으니, 생산현장의 인력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이를 토대로 당시의 여성 인력 실태를 정리해 보았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일본이나 대만과 경쟁을 하려면, 우리나라도 중학교 출신이 주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연간 2만 1천명이 사회에 배출된다. 이 중 30% 정도를 수출 현장에서 활용한다고 가정하면, 6천명이라는 숫자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정도의 인력으로는 국가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부득이 초등학교 졸업생까지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30%만 활용한다고 가정하면 (16만 6천명 × 30%) 5만 명 정도이다.

더욱이 당시 우리나라 농촌 여성은 20세가 되기도 전에 결혼을 했으니 인력으로서는 5년 정도의 수명밖에 없다. 결국 우리나라의 여성인력 총수는 6만 명이 5년 일한다고 보고 30만 명이다. 근로자 1인당 년간 1,000 달러를 수출한다면 3억 달러이고, 1인당 년간 5,000 달러를 수출한다면 15억 달러의 규모가 된다. 그리고 학력은 일본이나 대만보다 한 계단 낮은 초등학교 출신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여성 인력 자원의 전모였다.

: 여성인력자원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는 방안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여성들의 결혼연령을 20세 후반기로 늘려 잡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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