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뫼비우스의 띠^^^ | ||
-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5.62 중에서 -
“하늘이 두 쪽 나도”라는 말은 특히 정치가들의 상투적인 용법이다. 그런데 이 말은 시중에서도 곧잘 쓰는 편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한다면 한다”라는 굳은 의지를 천명한 것이리라. 이와 같이 타협을 배제하고 직선적인 우리 한국문화의 특징은 절개의 화신 성삼문의 유산이 큰 것 같다.
논산 통박산 자락에 성삼문의 묘가 하나 있다. 묘의 입구에 성인각(成仁閣) 현판이 달린 사당이 따로 세워져있고, 그곳에 들어갈 때 무이문(無二門)을 통과한다. 그런데 여기 무이를 강조하면 유일(唯一)이다. 즉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인(成仁)의 길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유일하면 제일감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떠오른다. 석가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조숙했던 것일까. 그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이렇게 게(偈)를 외쳤다고 전한다. 즉 만물 중에 내가 가장 존엄한 존재이며,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뜻을 선포했다고 볼 수 있다.
유아론(唯我論)은 지금에 와서 자기만 잘났다는 식의 사람을 빈정거리는 말로 변질되어 있다. 그러나 유아(唯我)를 곰곰이 따지고 보면 석존의 뜻을 품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나(自我)는 세계에서 여러 가지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자아의 주체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하는 세계는 실(實) 공간이다. 그러나 그 주체는 허(虛) 공간에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로댕의 조각상처럼 눈에 보이지만 그 생각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2차원 평면은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평면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180도 비틀어서 그 사이를 고리처럼 연결하면 앞과 뒤가 하나로 통하면서 3차원 공간을 형성한다.
방앗간에 가보면 동력을 전달하는 벨트가 한번 꼬인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뫼비우스의 띠에서 착안한 특허상품이다. 사실 DNA분자의 유전자 염기구조가 이중나선형인 것 역시 뫼비우스의 띠를 중앙으로 한번 가른 형태라고 한다. 클라인의 병은 원통을 한번 꼬아 서로 관통한 것이다.
어떤 n 차원 공간이 한번 비틀어 고리를 이루면 차상위 n+1 차원 공간으로 도약한다. 이때 n+1 차원의 공간에서는 그보다 하위 차원의 뒷면(뫼비우스의 띠)이나 또는 바깥면(클라인의 병)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한번은 이 꼬임을 경험한다. 그 뚜렷한 흔적이 바로 무덤이다.
산사(山寺)는 대개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부처님을 뵐 수 있다. 그 삼문(三門)은 차례대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不二門)이다. 마지막 통과의례가 불이문이며 곧 해탈문(解脫門)을 가리킨다. 불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로써 승속(僧俗)이 둘이 아니요, 생사(生死)가 일통한다는 뜻이리라.
노량진 사육신묘의 의절사(儀節祠)는 절이 아니고 사당이다. 그러나 그 입구에는 절처럼 불이문이 서있는데, 이는 분명 중생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신앙이 깔려있다. 불이문은 n 차원 공간이 n+1 차원 공간의 요소(element)이거나 부분집합(subset)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때로는 무덤에 이르기 전에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천적으로 차원 비틀기에 예민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악성(樂聖)으로 추앙받는 베토벤은 이 양쪽을 동시에 누려 그 시너지 효과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 같다. 청각을 잃을 정도로 병약했고, 56세로 죽기까지 미혼상태였다. 유서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구원의 여성을 남길 만큼 비참했다.
베토벤 만년의 작품, 9번 교향곡(합창)은 그 차원이동의 환희를 작곡한 것이었다. 4악장 중의 합창부분만 따로 5악장으로 편성하기도 하는데, 바로 앞의 3악장(아다지오)에서 공간의 비틀림을 보여주고 있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교차는 실공간과 허공간의 이어짐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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