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廢寺)에서 우연히 만난 슬픈 운명의 젊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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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廢寺)에서 우연히 만난 슬픈 운명의 젊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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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운명을 바꾸는 노력속에 인생 어디서든 주인공 노릇을 하고, 멋지고 즐겁게 살라

이 이야기는,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8년 5개월 간을 집권하려할 무렵인 1972년 때, 그해 늦은 봄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 무렵 나는 폐사지(廢寺址)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의 스승인 보리조사(菩提祖師)같은 은둔해 있는 조사를 만나 심오한 가르침을 구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국의 산하를 혼자 걸망을 매고 이 산 저 산 헤맨 적이 있다. 결론은 무지개를 잡으려는 것같은 나의 희망사항 일 뿐이었다.

폐사지(廢寺址)는 예전에 큰 사찰이 있었거나 작은 암자(庵子)가 존재했던 곳이다. 폐사는 인연이 다하여 사찰이 붕괴되거나 인간의 발자취가 끊어진 사찰을 의미한다. 어느 늦은 봄 날, 나는 어느 마을에서 폐사지가 300m 가까이 있다는 마을 사람 소문을 듣고 찾아 보았다.

마을 노인은 폐사지에는 부처님의 영험은 사라지고 산짐승의 놀이터요, 비오는 날은 귀신의 슬피우는 흐느낌이 들려온다고 겁을 주었다. 정말 비오는 폐사에는 여자 귀신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과연 쑥대밭이 우거진 폐사지에는 불상은 치워지고 불당(佛堂)은 절반 쯤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무너지는 법당 안에 들어가 좌정하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소리높이 외웠다.

나는 준비한 김밥과 수통의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 밤새 염불독경과 좌선을 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 폐사지에는 산짐승과 소쪅새 등 소리가 음산하게 밤새 다음날 태양이 뜰 때까지 들려오며 나에게 공포를 준것을 기억한다. 나는 밤새 마음속으로 불교를 수호하는 화엄신장(華嚴神將)과 금강신장(金剛神將)들이 수호해준다고 믿고 어둠속의 폐사지 공포를 극복하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나는 골똘이 생각했다. 왜 이 사찰은 폐사가 되었을까? 마을 사람들은 6,25 전쟁 때, 군경과 빨치산들의 총격전으로 피아간에 사람들이 많이 죽은 후로 승려들은 떠나고 공포의 폐사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나는 60년대 중반 순천 선암사 골짜기에 무너지고 있는 동암(東庵)을 아직도 기억한다. 폐사는 6,25 전쟁기간 지리산을 위시로 국군과 삘치산의 교전지역의 사암(寺庵)이 폐사 지역이었다. 또, 사암의 인연이 저절로 다하여 자연히 괴이하게 붕괴되고 승려들은 죽거나 떠나갔다.

모든 사람에게는 개인의 운수가 있고, 사찰에는 사운(寺運)이 있고, 나라에는 국운(國運)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쇠망(衰亡)의 운이 오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불교에 사물은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의 네가지 순서로 사라진다고 말한다. 천년 역사의 사찰과 암자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사암의 기운이 왕성한 것이다.

폐사지에 해가 다시 뜬 후 나는 밤새 가호해준 신장들께 감사 기도를 하고 폐사지를 돌아보고 있는 데, 어디서 여자가 슬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문대로 여귀(女鬼)의 귀곡성(鬼哭聲)인가? 공포가 몰려왔다. 태양은 오전 9시경이었다. 우는 소리를 찾아보니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땅에 앉아 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녀의 가명은 강미순(姜美順)이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폐사지에서 우는 사연을 들었다. 그녀는 이웃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하촌(寺下村)의 어느 집, 벙어리 신랑에게 논 다섯마지기를 받고 강제로 시집온 처녀였다. 벙어리 신랑은 돈에 팔려온 아내를 걸핏하면 화를 내고 무자비하게 때린다는 것이다.

그 날도 전날에 구타를 당하고 폐사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막연히 “화해하고 잘 살라”는 말을 해줄 뿐이었다. 그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예쁘고 착한 처녀였지만, 너무 가난하여 논 닷마지기에 팔려 온 것이다. 그 당시 시골의 민중에게는 흔한 이야기다.

그녀는 내게 “살 길을 열어달라”고 애소했다. 매질하는 벙어리 신랑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비구니들이 살고 있는 사찰로 인도해 달라는 애소였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비구니 사찰에 데려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일제히 불같이 화를 내고, 여자를 빼돌렸다 항의를 하고, 특히 벙어리 신랑은 자신의 아내를 빼돌리는 분노를 나에게 폭발할 것이었다. 나는 강미순에게 비구니 사찰의 주소를 종이에 적어주며 혼자서 출가를 결행하라고 권해주었다.

내가 직접 그녀를 데리고 남몰래 마을을 떠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혼자 출가를 결행할 것을 수차 권하고 그녀와 작별을 하고 폐사지를 떠날 때, 그녀는 울면서 “저를 구원해주세요.”를 연발할 뿐이었다.

나는 폐사지를 떠나면 우선적으롤 전남 영광 불갑사 암자인 불영대(佛迎臺)에 보리조사같은 고승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시 바삐 찾아가 가르침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 후 3년만에 폐사지를 다시 찾으며, 마을쪽에 슬피울던 그녀의 소식을 알아 보았다. 비구니 사찰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나와 작별한 후 얼마 후 폐사지 고목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후일담(後日譚)이 있었다. 나는 경악했다. 마을로부터 맹비난을 받더라도 슬피울며 구원을 애소하던 그녀를 직접 비구니 사찰에 데려다 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출가할 결심을 하지 못하고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다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나는 폐사지의 법당에서 막연히 그녀의 왕생극락을 위해 불경을 읽으며 애도할 뿐이었다.

그녀의 운명은 어찌 그리도 기박한 것일까? 논 다섯 마지기에 성격이 폭력적인 고약한 벙어리에 팔려간 사연을 2018년 한국 여성들은 이해하고 납득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은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는 고통받는 민중은 흔할 것이다. 그들은 지혜롭게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고 현실의 고통스런 운명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나는 강미순의 사건이 있은 후, 만행길에 나에게 절박한 사정을 하소연 하며 출가를 원하는 남녀의 출가지망생이 있으면 사찰에 데려다 주었다. 고통받는 어느 처녀를 해인사 삼선암(三仙庵)에 데려다 준 것적도 있다. 국군간호사관 학교 3힉년 생도도 내원사로 보내주기도 했다. 그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은 수행자가 되어 있었다.

무심한 세월이 흐르고 나의 나이는 70을 넘기고 지병이 심해졌다. 나는 이제 폐사지를 찾고 보리조사를 찾는 만행은 하지 않는다. 혼자 장차 떠날 저승 세계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어졌다. 이 무렵, 내가 후학에게 자주하는 말은 “스스로 운명을 바꾸는 노력속에 인생 어디서든 주인공 노릇을 하고, 멋지고 즐겁게 살라”이다.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강미순처럼 스스로 운명을 바꾸는 결심을 하지 못하고, 슬퍼하며 목을 매어 자결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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