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의 거친 물결, 돌아오지 않는 강의 조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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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거친 물결, 돌아오지 않는 강의 조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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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살자고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꾼 김영삼

▲ ⓒ뉴스타운

나를 향해 웃어주던 김대중

1990년대의 거의 10년 동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1991년 내가 처녀작으로 낸 “70만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는 소설을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를 연속 7주간이나 했다. 비밀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군의 낭비 사례와 전근대적 시스템을 지적해 낸 책이다. 이 책에 대해 언론들이 쏟아낸 칭송의 단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TV 및 라디오 방송, 서울의 일간지와 잡지에는 물론 지방의 신문들이 나의 글로 도배돼 있을 정도였다.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1990년에 돌아온 나를 향해 사람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사나이”라 했다.

1992년 나는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 라는 경영학 책을 냈다. 이 책이 방송에 여러 시간 소개되면서 나는 수많은 대기업체들로부터 시스템경영에 대한 강의를 요청받았다. 1992년 나는 지금의 이 책을 ‘멋’(A Grace Inside) 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책을 본 수많은 기자들이 나를 따라주었다. “이 책을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 읽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KBS부장은 내가 책에서 언급했던 아름다운 사람들을 나 몰래 찾아 “인생 이 얘기 저 예기”라는 60분 프로를 통해 무대에서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깜짝쇼는 지금까지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프로로 발전해 왔다. 당시 나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사랑받는 프리마돈나가 된 기분이었다. 신문과 잡지들에는 나를 ‘두뇌를 가지고 연간 1억 이상을 버는 10명 중 한 사람’이라 평가했고, 경영인들은 나를 5대 강사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당시 나의 수입은 장관 봉급의 3배 정도 되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면 그것이 곧 수입으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평민당 당수였던 김대중, 유명세 물결을 타고 있던 나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운영하던 아시아태평양재단 강사로 초청했고, 이어서 1995년 5월 당시 서울에서 가장 컸던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개최된 한중세미나에 나를 기조연설자(Keynote Speaker)로 선정했다.

남북한은 유엔 레프리에 의해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바꾸고 과감한 군축을 통해 영구분단해 캐나다와 미국 사이처럼 비자 받고 다녀도 간첩의심 받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김대중은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이 너무 좋다며 중국에 가서 다시 발표해 달라했다.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그는 그의 부인과 자리를 바꾸어 나를 그의 옆자리에 앉혔다. 중국에서의 발표 역시 “눈을 크게 뜨게 하는 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10월 25일부터 31일까지 1주일 동안 나는 늘 그와 한 테이블에 앉아 그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자기 살자고 5.18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꾼 김영삼

10월 19일 평민당 국회의원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폭로했다. 이에 머리 좋은 김대중이 김영삼을 공격하기 위해 10월 28일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국민적 의혹은 당연히 김영삼에게로 집중됐다, “미움 받던 김대중이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면 노태우 밑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몇 천억을 받았겠는가?”

다급해진 김영삼은 갑자기 전두환과 노태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저 두 군사독재자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광주학살을 주도한 놈들이다. 감옥에 넣어라” 당시의 여론은 김영삼에서 전두환으로 쏠렸다.

당시의 국민은 전두환 군부통치에 염증을 느꼈고, 그 염증은 주사파(김일성 추종파)들이 장악한 언론들과 국회를 통해 확산되고 증폭되었다. 전두환이 갑자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마녀사냥을 당한 것이다. 5.18을 민주화 성지로 공고히 하려면 반드시 전두환을 악마의 존재로 희생시켜야 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5.18은 김대중이 배후 조종한 내란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의 위대한 화신 김대중 선생이 주도한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포장되기 시작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기 직전까지 김대중이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해 보였다. 나는 그의 요청에 따라 그를 금전적으로 많이 후원한 사람들을 위해 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30분 연설을 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모 국회의원을 통해 나에게 장관 자리를 제의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인이 더 좋아 그 제의들을 세 차례에 걸쳐 사양했다.

웃는 김대중 얼굴에 침을 뱉었던 사연

김대중은 핵볕정책이라는 것을 내걸고 금강산사업을 벌였다. 1999년 11월부터 북한에 관광객을 보내 북한정권에 달러를 바치고, 개성 관광과 개성공단을 건설하고 북한 선박들에게 남한 영해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기업들을 닦달해 평양에 많은 물자를 보냈다.

나는 이에 공분하여 강연과 언론기고 그리고 비싼 광고지면을 사서 김대중을 김정일 추종자라 공격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금기이지만 나는 북한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말, 국방부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첫 소송을 당할 때까지 나는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인 군사평론가로 활동했다. 국가의 그릇된 시스템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내서 많은 호응을 얻었다. 1997년 12월, 인천에 배치됐던 탄두중량 500kg의 나이키 유도탄이 수평으로 발사되어 아파트 상공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원인을 은닉하기 위해 김대중이 임명한 국방장관 천용택은 매일 언론들에 거짓말들을 했다. 답답한 나머지 KBS 방송이 나에게 사고원인을 해석해 달라했다.

나는 이렇게 평론했다. “권총에도 장금장치가 있다. 나이키에는 4단계의 잠금장치가 있다. 유도탄이 발사되려면 불쏘시개 화약이 장입돼야 하고 점화케이블을 연결하야 한다. 이 과정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개입해야 하는 과정이다. 유도탄이 발사됐다면 이런 복잡한 잠금장치를 인위적으로 풀어야 한다.

합선이 돼서 유도탄이 나갔다는 군의 해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유도탄의 잠금장치가 바로 중간에 합선을 시키는 개념을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합선이 돼 있어야 의도치 않게 불쏘시개 화약에 스파크가 발생하는 사고를 막을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통하는 이 과학평론으로 인해 나는 5년 동안이나 재판에 휘둘렸고, 결국 2002년에 벌금 300만원을 물면서 내 인생 첫 번째 전과(conviction)를 기록하게 되었다.

나의 군사평론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람이 바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이었다. 더구나 김대중은 나를 증오할 정도로 미워했다. 내가 좋다며 비행기에서도 그의 부인과 자리를 바꿔 그의 옆자리에 앉게 했고, 장관자리까지 제의했는데 내가 그를 향해 간첩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과학을 짓밟는 한국의 국방부, 판사들의 야만적 폭거를 나이 60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구경했다. 벌금 액수도 충격이겠지만 대한민국에 이러한 야만이 횡행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우익의 입에 멍에를 씌우기 위해 휘둘러온 명예훼손법

이 야만은 바로 김대중 시대로부터 살벌하게 번성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시대에는 과학적 평론이 존중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이후부터는 과학적 평론이 사라졌다. 그 유명했던 지만원이 사법처리를 당하는 판에 감히 누가 소신 있는 소리를 내겠는가?

김대중 때로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은 “명예훼손죄”로 몰렸다. 내가 나이키 유도탄 오발사고에 대해 처벌을 받은 것도 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유독 대한민국 좌파시대에 전가의 보도로 사용된 “명예훼손법”은 좌익의 발언에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고 우익의 발언에는 재갈을 물려온 악령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들에 대한 허위사실은 제한 없이 허용되고,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정당해도 공산주의자들과 판사들 간의 콤비 플레이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됐다. 대한민국은 반공을 국시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국가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에 이르기까지는 정부가 곧 우익이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시대에는 정부 자체가 좌익이다. 그래서 국민의 안녕은 국민 스스로 지켜야 했다. 국민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북한이 아니라 적화통일을 위해 사회구조를 바꾸고 우익을 탄압하는 좌익정부다. 이러했기에 나는 김대중 정권 2년차인 1999년부터 살아있는 권력 김대중을 향해 감히 “저 사람은 빨갱이다, 저 사람이 나라를 북한에 내주려 한다, 국민은 깨어나라” 신문광고까지 냈던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공산주의자들과 동거했다. 이 두 사람은 우익이 뽑아준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좌익들은 이 두 사람을 움직여 그들에게 유리한 정책과 환경을 만들어 냈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좌익을 번성케 한 숙주였던 것이다. 나는 거리에 나가 하는 시위는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낼 수 없는 정보를 생산해 내는 일만 해도 24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2000년부터 개설해온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은 나의 작은 언론수단이다. 내가 생산해 내는 정보들은 여기에 게시된다. 글을 많이 쓰기에 그 글을 트집 잡아 소송을 하는 좌익들이 많다. 좌익시대에는 정부기관들이 나에게 많은 소송을 걸었다. 유독 이 사회에서 내가 재판을 생활의 일부로 안고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7년부터 지금까지 내가 당한 재판사건들을 130여개나 되고, 지금 받고 있는 재판사건도 12개나 된다.

2005.11.14. 노무현이 대통령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 검찰은 김대중 당시의 국정원장을 지냈던 임동원을 구속했다. 기소 전에 그를 먼저 구속한 이유는 “1999년 11월부터 2년 동안 저항력 없는 자연인 지만원을 집중 도청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2005년 국정원 제2차장 김은성이 검찰에 진술한 바에 의하면 김대중이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지만원이었다고 했다.

김대중이 국정원장으로 임명한 임동원은 나를 2년 내내 도청하였고, 나의 수입원을 완전히 단절시켰다. 기고와 방송이 모두 끊겼고, 모든 외부 강의가 단절됐다. 그리고 사회에는 ‘지만원은 극우의 정신병자이니 상대하면 손해를 본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도청당한 일에 대해 2006년 나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겨우 2천만 원(2만 달러)의 위자료만 지급하라 명령했다. 이 나라 공산주의자들이 이런 소송을 냈다면 아마도 5억원(50만달러)은 보상하라 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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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애국자 지만원 박사님 2018-03-20 07:23:20
지박사님은 이 나라의 진짜 애국자; 김대중이는 골수빨갱이로 이 나라의 적화에 단초역할을 한 자유대한민국의 주적이고, 김영삼이는 사이비 위장 우파로 이 나라를 빨갱이천지로 만든 원흉이자 거짓민주화의 숙주; 홍준표는 비열한 사기 좌빨 첩자로 현재의 최고 원수이자 주적! 부디 지박사님, 오래오래 강건하셔서 승리하시길 간절히 빌고 또한 적극 지지하고 응원하며 온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유 대한민국 만세 2018-03-22 03:36:04
지만원 박사님 힘내세요 항상 응원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드시 지만원 박사님을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낸 애국자로 기억할 것입니다
자유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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