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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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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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산업혁명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 - ④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를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구한말 외국 문명에 대해서는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리 국민, 화폐조차도 없는 원시경제시대의 우리나라의 슬픈 이야기이다. 국력의 차이를 눈앞에 보는 듯하다. 경제력이 없는 나라에서 개화론(開化論)을 폈댔자 무슨 소용이고, 쇄국정책(鎖國정策)을 쓴다고 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경제가 점차 나아지자 1966년경부터 우리 것을 되찾자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한 모임석상에서 "한국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찾아보자."는 명제가 나왔다. 이 때 뽑힌 것이 「멋」「한」이었다. 모두 한국인의 기질을 잘 표현한다고 했다. "한 많은 인생, 한을 풀고 멋있는 세상을 만들어 멋있게 살아 보자. 이 얼마나 좋은 구호인가"라고 했다. 다들 동감했다. 나도 신선한 감동을 받고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매우 실망스러웠다.

국어사전에 나와있는 「멋」이라는 단어의 설명을 보니, 1) 세련되고 풍채 있는 몸매, 2) 아주 말쑥하고 풍채 있는 맛, 3) 온갖 사물의 진미, 4) 그린 물체의 형태가 본 물건과 거의 같이 나타난 데 대한 기분 등으로 적혀 있었다. 「멋에 치어 중(僧) 서방질한다」라는 용례까지 나와 있었다. 또 「멋대로」라는 말은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라고 설명되어 있었다.「멋없이 키만 크다」란 용례도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멋있는 사람이란 「도포 자락이나 휘날리며 풍류를 즐기는 한량」이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멋에 치이면 서방질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족에 대한 의무도 없고 국가관도 없다. 더욱이 근검절약 하는 정신은 찾아 볼 수 없다.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도 찾을 길이 없다. 동화책에 나오는,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배짱이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공업정책에서의 인력자원으로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보고 실망한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 국민의 머리 속에 「멋있는 사람」,「멋있게 살자」라는 잠재의식이 있으면 큰일이다'라고까지 느꼈다.

「한」이란 단어를 찾아보았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1) 원통히 여긴다. 불평을 품다. 원한을 품다. 유감으로 생각한다. 2) 뉘우치다. 애석히 여겨 후회하다. 이것이 「한」이라고 한다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원통해 하며, 불평하고 원한을 품는 사람이요, 실수를 뉘우치면서 과거지사에 매달리는 사람이다. 소위 불평분자이다. 사회적으로 득 될 게 없는 사람이다. 어떤 실수나 나쁜 환경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저 횡재나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런 한을 푼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위 「오기」가 없는 것이다.「오기」라는 단어도 찾아보았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예) 오기로 버티다」라고 나온다. 선진 공업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한에 사무친 기진맥진한 사람이나, 횡재나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난관을 스스로 해결코자 하는 「오기」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인의 기질은 천부적인 것이기 때문에 수정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기계공업 등 정밀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사상누각 격이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용사회와는 거리가 먼 조선조

우리나라는 수도, 서울에 사는 인구가 겨우 7~8만명. 그러니 지방도시의 크기는 짐작이 간다. 인구의 대다수는 농촌에 살았다. 농촌생활은 자급자족이다. 식량은 물론, 옷감을 짜는 것이나 옷을 만드는 것 등을 모두 가족끼리 해결했다. 다만 집을 지을 때는 동네 사는 목수(木手)의 힘을 빌렸고, 달구지 바퀴나 일부 철제도구는 동네 대장간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나머지 약간의 물건만 시장터에서 구했다.

시장터의 거래는 장돌뱅이와 이루어진다. 장돌뱅이는 떠돌이 행상(行商)꾼 이다. 한번가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장기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기거래가 없는 곳에 "신용(信用)"이란 기대할 수 없다. 서울에는 좌상(坐商)도 있었으나 여기서는 "여리꾼"이라는 거간이 판치고 있어 거래 때마다 구전을 떼먹었다. 이렇게되면 상업에서 가장 기반이 되는 "신용질서"는 싹틀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금융에서도 똑같다. 여유자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대부 양반이었다. 이들 양반들은 거간꾼을 내세워 "돈놀이"를 하고 그 이윤을 거간꾼과 나누어 챙겼다. 즉 "돈 놓고 돈 먹는 식"이었으니 진정한 금융업이 생겨날 수가 없었다. 전당포는 한말에 일본인(日本人) 고리업자가 우리나라에 대거 침입한 결과이다. 거간꾼이나 고리채, 전당포와의 거래는 살벌하기 마련이다. 신용거래와는 거리가 멀다.

옆 나라 일본이나 중국에서 "신용과 신의"를 목숨과도 같이 생각하는 신용사회를 구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거래에는 꼭 거간꾼이 활개를 쳤다. 조금이라도 거래에 관여한 사람은 구전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액수는 봉사한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거래 총액수에 비례해서 챙긴다. 이러한 습성은 당시의 모든 계층에 존재했는데 벼슬아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풍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구한말의 우리나라 경제수준

19세기가 되어가면서 유럽 각국은 새로운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무력으로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다. 일본에도 오고, 중국에도 오고, 우리나라에도 왔다. 구미 각국의 군함 몇 척의 위력 앞에 이들 나라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간단히 항복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각자 군비 확충에 나섰다.

일본은 금화(金貨), 중국에는 은화(銀貨)가 있었다. 금이나 은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화폐이다. 그들은 구미 각국처럼 지폐를 발행하고 금화나 은화를 나라가 회수했다. 그리고 이 돈으로 산업의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고 대포와 군함을 사들였다.

그리고는 중국(청나라)과 일본이 싸운 것이다. 구한말 청일전쟁이다. 군함은 양국 모두 유럽제이고 싸움터는 우리나라 인천 앞바다였다. 우리나라를 누가 식민지로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다. 일본이 이겼다. 그 다음에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또 한번 승리를 했다. 그 후 우리나라는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무 힘도 없었다. 엽전 가지고는 군함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 (例 - 4) 쇠배(鐵船) 못쓰겠다

「한국총감(韓國總監)」이라는 책에 「쇠배(鐵船) 못쓰겠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20세기 초 우리나라의 수준을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구한 말 「셔먼호」 사건이 있은 후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군함을 갖기 원했다. 그래서 전국에 「방」을 붙여 군함 만드는 사람을 구했다. 여기에 응한 용감하고 진취적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가라앉은 셔먼호에서 엔진을 뜯어다가 군함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셔먼호에 실렸던 대포로 무장하겠다는 것도 포함시켰다. 조정에서는 그가 달라는 돈을 다 주었다. 그런데 이 돈은 어느 대감이 얼마를 슬쩍하고 그 밑에서 또 잘라먹고 해서, 실제로 지급된 돈은 몇 분의 일밖에 안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배는 완성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용접기술도 없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셔먼호의 수증기 엔진도 옮겨다 실었다. 그리고 준공식 날이 왔다. 여러 고관대작들이 한강 백사장에 모여들었다. 구경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쇠배(鐵船)」이다. 그것도 바람의 힘으로 운항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모두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쇠배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엔진은 움직이기는 하는데, 배가 앞으로 나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노젓는 배보다도 느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하루종일 구경을 하다 지쳐서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쇠배(鐵船) 못쓰겠다」였다.

 

 
   
  ^^^▲ 1878년에 제작된 영국 해군 중국 주둔 페가수스 함대 소속 슬루프 포함1995년 4월 15일 영국함대의 거문도 점거작전에 참가했다. 이 군함의 함장 Grenfell이 사진기를 갖고 있어 그가 직접 촬영했다. 해양탐사선으로 자주 이용되어 조선의 남해안, 서해안을 탐사했다.
ⓒ 서양인이 본 꼬레아 (박영숙 편저)^^^
 
 

외국 문명에 대해서는 보지도 못했고 따라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리 국민, 화폐조차도 없는 원시경제시대의 우리나라의 슬픈 이야기이다. 국력의 차이를 눈앞에 보는 듯하다. 경제력이 없는 나라에서 개화론(開化論)을 폈댔자 무슨 소용이고, 쇄국정책(鎖國정策)을 쓴다고 해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광무개혁(光武改革)

한국의 왕은 즉위하자마자 중국의 황제에게 고하고 직인(職印)과 임명장을 받았다. 늘 중국에 조공을 했으며 해마다 중국의 달력(冊曆)을 받아썼고, 연호도 중국의 것을 사용해야 했다. 외세의 침략을 받거나 국내에서 변란이 생겨 우리나라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할 때는 중국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속방으로서 우리나라의 왕(王)은 중국황제의 부하였다.

1863년 고종(高宗)이 즉위했는데 연령은 만 11세였다. 그래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접정을 했는데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세계조류에 역행하는 조치였다.

 

 
   
  ^^^▲ 조선병사들
ⓒ 서양인이 본 꼬레아(박영숙 편저)^^^
 
 

근세에 와서 구미 각 국은 일찍부터 산업혁명을 통해 부국강병의 나라를 건설했다. 그리고는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다. 옆 나라 일본조차 늦게나마 이러한 조류를 타려고 명치유신이라는 개혁을 하고는 필사적으로 서양문물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믿고 따르던 거대한 중국이 당시의 개념으로는 약소국인 일본에게 완패를 당하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 발생했다. 패전국 중국은 개방을 하지 않은 반면 구미로부터 선진문물을 과감히 도입한 일본이 승리 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지도층의 고루한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늦게나마 우리나라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된 연유이다(註 :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甲申政變)이 그 시초였는데 이 때는 실패를 했다).

1897년 10월 12일 우리나라는 -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 - 독립국가임을 선언했다. 국호는「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즉위를 하고 연호(年號)도 - 중국 것을 쓰지 않기로 하고 - 광무(光武)라고 정했다.

 

 
   
  ^^^▲ 외무대신이 유럽 외교관을 초천한 만찬장면
ⓒ 서양인이 본 꼬레아^^^
 
 

1898년 8월 17일에는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라는 헌법을 제정했다.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이 공인한 자주독립국이다.
제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이다.
제3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한다.
제4조 신민이 황제의 군권을 침손할 경우는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본다.
제5조 황제는 육 · 해군을 통솔하고 편제를 정하며, 계엄과 해엄의 권한을 갖는다.
제6조 황제는 법률을 제정하고 그의 반포와 집행을 명하며, 국내 법률을 개정하고 대사, 특사, 감형, 복권의 권한을 갖는다.
제7조 황제는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관의 봉급 제정 혹은 개정권과 행정 칙령을 내릴 권한을 갖는다.
제8조 황제는 문무관의 임명을 행하며 작위, 훈장 및 기타 영전을 수여 혹은 박탈할 권한을 갖는다.
제9조 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견, 주재하게 하며 선전, 강화 및 제반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갖는다.

황제가 입법 · 사법 · 행정 · 군권 등 전권을 갖는다는 내용이다.

그리고는 정부주도 하에 개혁적인 시책을 펴 나갔다. 이 개혁을 「광무개혁」이라고 하는데 러일전쟁 직전(1904년 2월)까지 계속됐다. 이 개혁은 행정 · 사회 · 재정 · 군사 · 제조업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것인데 이에 대해 몇 가지 예를 든다.

사회시설 - 철도·전차 등 교통시설, 우편·전화 등 통신시설, 발전소·전기시설, 종합병원 설립 등이 있고,

제도 - 금화와 은화의 발행, 토지측량 및 토지문서 발급, 도량형 제도, 호적제도, 순회재판소 설치 등이 있다.

제조업 - 황실에서는 방직공장·유리공장·제지공장을 설립했고, 황실이 직영하는 업종 외에 대해서는 민간에게도 허용했다.

기술자 양성 -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동시에 교육기관도 설립했다. 상공학교(商工學校, 1899년 설립)와 광무학교(鑛務學校, 1901년 설립)가 그 예이다.

이상 설명한 것과 같이 「광무개혁」의 내용을 보면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광무개혁은 러일전쟁 발발로 중단되었고,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자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광무개혁이 진행됐을 때는 1900년을 전후한 약 7~8년이었다. 그 후 약 60년이 지나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을 하겠다고 또다시 나섰다. 역사는 되풀이한다는 윤회의 중압감을 느끼게 한다. 산업혁명 계획의 입안과 집행을 관여한 필자로서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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