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끝 - 4
스크롤 이동 상태바
시작의 끝 -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틀 뒤.

태진은 최 형사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경찰서 앞 카페에 그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가 태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후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떡했으면 좋겠습니까?”

최 형사는 전화로 미리 말한 진희의 사체 처리에 대해서 태진의 의견을 물었다. 진희의 사체는 경찰 병원 영안실에 있었다. 최 형사는 아무도 보호자로 나서지 않는 상황이어서, 그래도 한때 그녀와 가깝게 지낸 태진을 찾아온 것이었다.

태진은 찹착한 심정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관례는 어땠습니까?”

“연고자 없는 사체는 대개 화장을 했습니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이 제일 좋겠군요.”

“혼자서 처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이태진 씨에게만은

꼭 의견을 묻고 싶었습니다.”

최 형사는 말하며 뚫어지게 태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진은 최 형사와 부딪친 눈길을 부자연스럽게 탁자 위로 떨구며 담배를 뽑아 물었다.

“그럼 언제 하는 것이…?”

“글쎄요. 이태진 씨만 좋다고 하면 오늘이라도 당장 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요즘도 행복하십니까?”

“네? 무슨 말인지?”

태진은 그의 말 뜻을 쉽게 알아듣지 못해 되물었다.

최 형사가 얼굴 가득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민소영 씨와 잘 지내느냐고요.”

“아, 네에.”

태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남에게 정사 현장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최 형사는 그런 태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참 순수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 나이가 되어서도 상대방의 가벼운 농담 비슷한 짓궂은 질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사내. 그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갔다. 민소영 같은 여자가 겉보기에는 별볼 일 없어 보이는 이 사내에게 반한 것도, 바로 이런 매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겠습니까? 말 나온 김에 오늘 처리를 할까요?”

“그,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태진 씨도 하루바삐 이 끔찍한 사건에서 벗어나 행복해야지요. 하지만 나진희가 가는 마지막 길을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적어도 이태진 씨는 지켜보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이 들어 연락을 한 겁니다. 달리 언짢게 생각하진 말아요. 모든 사람에게 나진희와 이태진 씨의 관계는 끝까지 비밀로 지켜줄테니까.”

“…….”

벽제 화장터 사무실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최 형사가 서류에 사인을 했다. 관에 넣어진 진희의 사체는 15번 소각로 앞에 놓였다. 태진은 준비해 온 향을 피웠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진희가 들어있는 관을 보자 콧날이 시큰해졌다.

잠시 후, 관이 소각로 속으로 들어가고, 가동을 알리는 램프의 불이 들어왔다. 이제 두어 시간 후면 한 많은 세월을 살아온 그녀의 육신은 몇 줌의 재로 변할 터였다.

최 형사도 향에 불을 붙여 꽂았다. 그리고 관이 들어간 소각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사람만이 진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진은 소각로를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수십 번도 더 진희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길 빌었다.

“나갑시다.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요.”

최 형사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소각로를 바라보고 있는 태진의 팔을 잡아 끌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화장터 본관 앞에 서서, 한꺼번에 들어오는 두 대의 장의차를 보았다. 영정을 앞세운 사람들 뒤에서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가족과 친지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최 형사가 담배를 권하고, 라이터 불을 당겨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신의 담배에도 불을 붙였다. 최 형사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빗방울이 떨어지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길게 내뿜었다.

“산다는 게 뭔지…….”

최 형사는 얼굴을 하늘로 향한 채 비를 맞으며 심난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나도 은퇴를 해야겠어요. 매일처럼 이런 강력 사건속에 묻혀 피비린내를 맡으며 산다는 것이…… 구멍가게를 하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고 싶어요.”

뜻밖에 최 형사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이번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부모 만나 좋은 환경에서 성장했더라면 이런 일들을 저질렀을까요? 그리고 이런 비참한 최후도 없었겠지요. 그녀에게 당한 연놈들에 대해서는 눈꼽만큼의 연민도 없습니다.”

“…?”

태진은, 그의 말의 진의가 무언지 몰라,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볼 필요 없어요. 나도 따뜻하고 붉은 피를 가진 사람이니까. 내가 그녀였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그녀가 잡히지 않고 계속해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처치해 주길 바라는 면도 있었어요.”

“최 형사님!”

태진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태진을 보는 최 형사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한 이태진 씨와의 만남은 오늘로써 마지막이었으면 합니다. 혹시 또 기회가 된다면 작가와 독자와의 좋은 만남이라면 몰라도…….”

진희의 시신이 앙상한 하얀 뼈만 남긴 채 소각로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유리창 너머로 진희의 뼈를 확인했다. 그녀를 납골당에 안치할 이유가 없기에, 뼈를 분쇄해 오동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제 진희의 모든 것은 몇 줌의 재로 변해, 태진의 눈 앞에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최 형사가 태진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한 인간의 영혼의 무게가 이토록 가벼운 것일까? 태진은 눈물이 솟구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진희의 뼛가루를 담은 상자를 가슴에 안고 차에 올랐다.

“어디로 갈까요?”

최 형사가 운전대를 잡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 강촌으로 가시죠.”

태진은 문득 왜 그곳이 생각났는지 자신도 몰랐다.

차창을 때리는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천둥과 번개가 낮은 먹구름을 형성하고 어둑해진 하늘에서 으르렁댔다. 두 사람은 차가 강촌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했다.

태진은 진희를 안고 가면서, 그동안 그녀와 지낸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진희가 죽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차 문을 열고 미소 띤 얼굴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뒷좌석엔 화장터 앞 꽃 가게에서 산 하얀 국화 다발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굵은 철사 토막처럼 쏟아지는 빗속에 갇힌 강촌은 한적했다.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때리는 자욱한 빗소리만이 적막한 주위를 적시고 있었다. 최 형사는 줄담배를 피우며 빗방울이 수없이 파문을 일으키는 강물의 수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잘 가, 진희야!’

태진은 강가에 쭈구리고 앉아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진희의 뼛가루를 천천히 파문이 이는 강물 위에 풀어주었다. 어디에서 날아왔을까. 물총새 한 마리가, 뼛가루와 함께 던져지는 국화 위를 잠시 맴도는가 싶더니,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아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뼛가루가 흘러가는 수면위로 넓게 넓게 퍼져갔다.

“잘 가…….”

태진은 마지막 한 줌의 뼛가루와 뼛가루를 담았던 백지를 물 위에 놓으며, 마치 진희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이 소리내어 말했다. 그리고 몇 송이 남은 국화도 함께 놓아주었다. 그제야 이상하게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던 눈시울이 후끈 달아올랐다. 솟구치는 눈물이 쏟아지는 비와 범벅이 되어 얼굴을 적시었다. 수면에 떠있던 국화마저 이내 흐르는 강물 속에 잠겨버렸다.

…… 이제 끝났다.

진희와의 모든 인연은 이 순간에 모두 끝나버렸다. 이제 태진이 그녀를 추억함에 있어 남겨진 것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뿐이었다. 태진은 흙탕물이 괸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종교는 없다. 하지만 이 순간만은 진희를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최 형사는 우산 가득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흙탕물이 괸 땅에 무릎을 꿇고 어깨를 들먹이고 있는 한 사내의 슬픈 영혼을 보았다. 그대로 두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있을 것만 같았다. 통곡보다 더 진한 한 사내의 소리없는 절규가 절절이 가슴에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최 형사는 아득한 눈길로 건너편 산허리에 걸치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이제 그만…….”

최 형사는 태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태진은 잠시 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빗줄기를 사이에 두고 뒤엉켰다. 최 형사는 어설픈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의 눈에도 물기가 함초롬히 배어있었다.

“이태진 씨, 산 자는 산 자만의 생활이 있는거요.”

“…….”

“자, 이거.”

최 형사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태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태진은 그가 건네주는 것을 받았다. 그것은 작은 비닐 봉지에 담긴, 보석이 박힌 넥타이핀이었다.

“…… 이게 뭡니까?”

“이틀 전에 내가 이태진 씨 집 지하실 소각로 앞에서 발견한 것이오.”

“우리 집 지하실에서요?”

“그래요.”

“내 것이 아닌데…… 왜 이걸 나에게?”

최 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알아봤는데…… 나석만 회장이 평소 즐겨 쓴 것이었소.”

“!”

태진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넥타이핀을 들고 있는 손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렇다면 최 형사는 이미 자신이 진희와 공범이란 사실을…….

“이 사실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오.”

최 형사는 눈을 들어 다시 구름이 걸친 산을 보며 말했다.

“나진희가 북한산 칼바위 벼랑에서 투신자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하오?”

“…?”

“…… 그녀는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이라고 했소.”

“!”

태진은 망치로 강하게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시작의 끝’이오. 그걸 저 강에 던져버려요.”

“…?”

“어서요. 이태진 씨의 기억에 남아있는 아픔과 슬픈 추억까지도 모두 함께.”

“최 형사님!”

태진은 가슴이 복받쳐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난 단지 이태진이라는 사내의 집 지하실에서 모르는 남자의 넥타이핀 하나를 주웠을 뿐이오. 그리고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인간들이 사라졌을 뿐이라는 것이오.”

“하지만…….”

“방금 말했지요? 산 자는 산 자만의 생활이 있다고. 자, 어서 던지라니까.”

태진은 손에 들려있는 넥타이핀을 잠시 바라보다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을 향해 힘껏 던졌다. 강물이 넥타이핀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렸다. 얼굴에 세차게 꽂히는 빗물이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렸다. 최 형사가 우산을 받쳐주며 태진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자, 이제 그만 갑시다. 예전의 이태진이란 사내는 죽고,

이 순간 새로 태어난 이태진만이 있을 뿐이오.”

태진은 길이 미끄럽지도 않은데 자꾸만 발을 헛디뎠다. 그때마다 최 형사는 걸음을 멈추고, 태진의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저만큼 세워둔 차가 보였다. 태진은 이 상태로 서울로 돌아간다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최 형사님, 먼저 가시지요. 전 이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며칠 여행이라도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최 형사는 태진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한 대로 해요. 헌데 너무 방황하지는 말아요. 이태진 씨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리고 이걸 가지고 가요. 다 읽으면 불태워 흔적을 절대 남기지 말아요. 그럼 우리 언젠가 기회가 되어 다시 만난다면 그땐 술 한 잔 나눕시다.”

최 형사는 진희의 일기장을 태진의 손에 쥐어주고 악수를 청했다. 태진은 그의 따뜻한 두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태진의 손을 꼭 쥐고 한참 있었다. 그리고 최 형사는 차에 올라, 태진만을 남겨두고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멀어져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 뒤로 번개가 꽂히는가 싶더니, 천지를 삼킬 듯한 천둥이 울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