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 성삼문의 시조, 절의가에서 -
절신(節臣)의 상징, 성삼문(成三問 1418-56)의 유허비(遺墟碑)는 지금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다. 외가 집이 이곳 노은골에 있어서 그는 여기에서 태어났다. 삼문(三問)이란 이름은 하늘에서 3번씩이나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왔었다는 출생설화에서 따왔고, 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매죽헌의 성격은 대쪽같았다. 그의 논리는 흑 아니면 백, 이렇게 딱 뿌러졌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변절과 누구보다 친했던 보한재의 배신, 이것에 대하여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저들을 죽이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이처럼 생사(生死) 역시 잣대처럼 명쾌했다.
매죽헌 일파의 역 쿠데타는 배반자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이제 역모에 대한 멸문지화(滅門之禍)의 다스림만 앞에 남았다. 그러나 세조는 매죽헌의 인품과 능력을 아꼈고, 국문(鞫問)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쓴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다. 형의 집행 직전까지 달랬다는 기록이 보인다.
매죽헌은 몸까지 벗는다. 이제 시원하다. 아무도 부럽지 않았다.
수양산(首陽山)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고사리까지 캐어 먹겠는가.
비록 절로 나는 풀이라지만 그 누구 땅에서 난 것인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형제로서 주(周) 무왕이 은(殷)을 멸망시켰던 시기의 전설적인 성인(聖人)들이다. 이때 무왕에게 부친상이 끝나기도 전에 병사를 일으킨 불효와 신하로서 군주를 무찌른 불충을 지적했지만, 결과는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주 나라의 녹(祿)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갔으며,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끝내 굶어죽었다.
매죽헌은 그 뒤 끌려가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한다. 사육신과 함께 머리는 효수(梟首)되어 전국을 다니며 전시되었다. 아버지, 형제들, 아들들 남자는 젖먹이까지 모두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아내와 딸들은 관노(官奴)가 되었다. 이때 공신들은 저마다 죽은 자들의 여자를 차지하려고 애썼다지. 음.
여기서 매죽헌의 죽음에 대하여 3번 묻고 싶다.
1. 40세도 되기 전에 효수를 받을 만큼,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섰는가?
2. 어린 아들들의 생명까지 몰살되도록, 그토록 절의가 중요했었는가?
3. 아내와 딸이 천민으로 전락해도 좋은지, 여자의 뜻까지 헤아렸는가?
오백여년 전 유교문화와 군주제(君主制)에서 매죽헌이 온몸으로 보여준 죽음을 오늘날 세계화와 민주주의의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투표로 간단히 정권을 바꿀 수 있는 사회가 있는 줄 그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안타깝다. 아니,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너무 터무니없이 당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북소리는 사람 목숨을 재촉하고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고개를 돌려보니 해는 지고 있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황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오늘밤은 누구의 집에서 자야하나?
매죽헌이 죽기 전 적멸(寂滅)의 순간을 생생하게 읊은 한시(漢詩)이다.
당시 양화진에서 처형당한 사육신의 시신을 김시습이 수습하여 강 건너 노량진 언덕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후 삼백년 넘게 반역자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와서 비로소 그 명예가 회복되었다. 1758년 매죽헌은 정2품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시호로서 충문(忠文)까지 추증되었다.
매죽헌은 창녕(昌寧) 성씨의 한 부분을 함몰시켰으나, 그의 불굴의 투혼은 오늘날의 “필승 코리아” 유전자를 각인시켜 우리 모두에게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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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정치인들을 일커러 철새에 비유를 하곤한다.자신의 정치이익을 위해서라면 어제와오늘의 말과행동을 수시로 달리하며 이리저리 당을옴겨 다니며 주관없이 행동들을 한다 .성상문같은 곧은 성품과 지조를 본받음이 어떨런지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