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4.17. 대법원 판결의 의미
1997.4.17. 대법원 판결의 의미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7.08.17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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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민주화에 아부한 대법원은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재심절차 없이 5.18을 다시 재판

▲ ⓒ뉴스타운

1981년의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이 주도한 내란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갑자기 뒤바뀌었습니다. 국가가 386주사파들에 점령되었고 민주화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1997년, 민주화에 아부한 대법원은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무시하고 재심절차 없이 5.18을 다시 재판했습니다. 헌법이 유린되었습니다. 5.18이 ‘전두환의 내란’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검찰기록에 명시돼 있는 사실들은 1981년 것이나 1997년 것이나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세도에 따라 180도 달라졌습니다.   

반공이 지배했던 1981년에는 5.18이 붉은 이념의 폭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린데 좌파가 지배했던 1997년에는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둔갑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이 죄인이 됐습니다. 전두환이 죄인이 된 유일한 이유는 오직 하나 “5.18은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무조건 수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5.18은 민주화 운동인데 전두환이 탄압했다는 것”이 전두환의 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신기루였습니다.“5.18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것”이 이제라도 증명됐으니, 그것을 대 전제로 하여 판단한 1997년의 대법원 판결은 무효가 돼야 할 것입니다.  

[1997.4.17.선고96도3376전원합의체판결], 이것이 이른바 1997의 대법원 판결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판결문은 무효입니다. 1) 대법원 판결문에는 20개의 ‘판시사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5.18이 진정 민주화운동인가?”를 판단한 판시사항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2) 5.18측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3개 법안과 1997.대법원 판결을 내세우면서 “대법원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이미 인정했다 주장합니다.

3) 하지만“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문장이 처음 들어간 법안은 1990. 노태우 시절에 정치인들이 합의한 “광주보상법”(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입니다. 4) 이어서 1995.12.21.에 김영삼의 말 한마디로 제정된 "5.18특별법"이 나왔고 2002년 “예우법”이 나왔습니다. 이 모든 법안들은 모두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타협하고 절충된 내용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지금 5공 시대에 공안부서 등에 근무했던 인사들은 매우 뒤늦은 후회들을 합니다. 아무리 최규하 대통령이 “묻어라, 더 이상의 갈등과 분열은 안 된다” 명령했지만, 그때 그 당시 공안차원에서 확실하게 규명하지 않은 것이 오늘의 이 난국을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노태우는 한술 더 떴습니다.

여소야대의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였던 그는 좌경화된 야당 정치꾼들에 놀아났습니다. 1990년,‘광주보상법’(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을 제정했습니다. 피해자 2,224명에 대해 당시 화폐로 1,430억원을 지출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게 한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1990년 화폐로 많게는 1인당 3억1,700만원을 지급하고, 1990년 화폐로 많게는 매월 420만원의 연금을 지급하라는 법률입니다. 다른 유공자들과는 달리 5.18유공자만은 광주사람 10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광주시장이 지휘하여 선발하고, 이 선발결과를 대통령에 토스해 대통령으로 하여금 집행하도록 제정된 법률입니다.

5.18유공자들의 명예를 개국공신 급으로 존중하고, 5.18유공자에 대한 취직 명령권을 5.18단체에 부여하고, 모든 국가고시에 5-10%의 가산점을 부여하되 과목별로도 5-10%, 필기시험에도 5-10%, 실기시험에도 5-10%, 면접시험에도 5-10%를 각각 부여하라는 내용의 법률입니다. 6급 이상의 아들들에는 병역이 감면되어 공익으로 때웁니다..   

이 국고금은 처음‘민주유공자’로서의 희생과 공헌이라는 명분으로 지급되었지만 1997.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부터 좌익세력은 이들에게 주는 돈을 대폭 늘리기 위해 2002년 이른바 “5.18민주화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고, 보상명목을 1개에서 3개로 늘리면서 보상 액수가 2-3배로 증폭되었습니다. 이런 대우를 받는 5.18유공자들이 2017. 현재 5.769명으로 폭발했습니다. 권노갑, 한화갑, 이해찬, 함승현 등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정치인들이 5.18유공자가 되었습니다. 이 ‘5.18민주화’가 들어간 법률들은 민주화의 대세를 이용한 억지요 횡포였습니다.  

이런 민주회의 횡포를 1997년의 대법원이 높이 받들었습니다. 5.18을 다시 재판할 때 재판의 대전제로 사용한 것입니다. “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내란행위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헌법수호기관 내지 준-헌법기관이었고, 이 시위는 전국에 빠른 속도로 확산됐어야 할 민주화운동이었다.”이 판결문은 사실과 법률로‘판단’한 것이 아니라 초법적으로‘전제’한 것입니다. 하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대전제는 당시 ‘화해와 통합’이라는 사회적 명분하에 정치인들이 타협하고 절충한 결과였을 뿐, 이 대전제가 과연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연구하거나 사법적 판단을 한 바 없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매우 기이하게도 명백한 사실로 지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인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5.18의 진실을 밝히는 또 다른 차원의 역사이기 때문에 짚고 가려는 것입니다. 저는 16년 동안의 연구 끝에 검찰 및 안기부 자료 등 정부문서들로부터 “5.18은 폭동이었고, 북한군 600명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반면 지난 두 시대 즉 1981년과 1997년의 조사관들은 음미력과 분석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똑 같은 자료들을 가지고도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의심 자체를 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이 새로운 발견은 팩트의 함수가 아니라 분석력의 함수였습니다. 팩트는 분명하게 있었는데 분석을 안 한 것입니다.   

“5.18은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새로운 결과를 내는 데에는 게릴라작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한몫 했습니다. 미해군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통해 훈련된 분석력이 가장 큰 몫을 하였습니다. 국방연구원에서 8년 동안 분석능력을 향상시킨 것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학습한 북한의 생리와 공작전술에 대한 지식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능력을 가지고도 1-2년의 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무려 17년이나 연구를 했습니다. 5.18에 대한 18만 쪽 자료를 정리하는 데만도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그 다음은 새로운 자료를 찾고, 정리한 것을 음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탈북자들로부터 구한 증언과 자료들은 참고로만 사용하고 증거자료로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확실한 증거만을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제 연구 결과를 과학적 분석능력을 갖추지 못한 재래식 분석관들이 단 기간에 얻어낸다는 것은 불가능 그 자체일 것입니다. 좁은 법정에서 극히 제한된 시간 내에 극히 제한된 자료를 가지고 법관들이 '판단'해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2016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 600명 개입사실은 금시초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광주는 치안부재였기 때문에 정보관들을 투입할 수 없어 광주사태 진상에 대해 깜깜했었다”고 밝혔습니다.   

경찰들은 변장을 한 채 각자도생하자며 도망갔고, 군은 정보관을 투입할 수 없었기에 그 누구로부터도 자세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남한 기자들은 다 광주에서 축출 당했고, 광주MBC와 광주KBS는 모두 불탔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시의 광주는 완전히 보도부재, 공안정보 부재의 도시였습니다. 반면 당시의 현장들은 곳곳에서 촬영되고 있었습니다. 북한촬영가들이었습니다. 북한이 촬영한 이 동영상들은 두 가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는 즉시 광주비디오로 전환되어 광주-전라도 사람들을 순식간에 세뇌시키는 핵무기 역할을 수행했고, 다른 하나는 전세계로 방송되어 한국을 모략하는 핵무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북한이 촬영한 동영상들을 북한 이름으로 세계에 내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북한이 촬영한 것을 외국기자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이 몰래 몰래 숨어서 본 이 광주비디오는 황석영 이름으로 발생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에 그대로 투영돼 있습니다.

북한이 제작해 전라도 지역과 좌파들에 뿌린 이 광주비디오만이 5.18에 대한 전라도 사람들의 진실이요 종교로 굳어진 것입니다. 1997의 대법원 역시 이 광주비디오 내용을 그대로 재판에 투영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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