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된 약속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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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된 약속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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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과 소영은 노을이 지는 베란다 파라솔 밑에 앉아있었다. 뒤 늦게야 두 사람의 결혼 발표 소식을 알고서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다가, 전화기 코드를 뽑고 휴대폰까지 꺼버렸다. 그리고는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북새통을 이루던 기자들과 축하객들이 빠져나간 정원과 집안은 적막감마저 감돌았다.

소영이 아득한 시선으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노을이 너무 예쁘네요.”
“그렇군.”
“힘든 하루였어요.”
“나도 그래.”

태진은 소영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소영은 의자를 태진의 옆으로 옮겨와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태진은 그런 소영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제 두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다음 달 초에 결혼하기로 약속한 예비 부부였다. 집 안은 두 사람을 아는 사람들이 들고온 꽃다발과 화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태진은 소영이와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지하실에 있을 나 회장과 진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쯤 나 회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확실치는 않아도, 진희를 쫓고 있는 형사들이 오늘 이곳에 다녀갔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지하실에 내려가 보고 싶지만, 소영이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피곤하지 않아요?”
“조금. 소영인?”
“엄청 피곤해요.”
“한숨 자.”

태진은 바람에 날려 얼굴을 가린 소영이의 긴 머리카락 몇 올을 손으로 쓸어넘겨주었다. 마스카라를 한 길다란 속눈썹과 아이샤도를 한 눈매가 몹시 매혹적이었다. 익숙한 얼굴인데도 어쩐지 조금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소영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쥐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소영은 눈을 감고 태진의 입술을 받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들어가요.”

소영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태진은 소영이를 번쩍 안아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가는 동안 소영이는 팔로 태진의 목을 끌어안았다. 태진은 오늘이 있기까지 소영이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소영이를 침대에 뉘고 옆에 누웠다.

소영이 태진의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사랑해요.”
“나도.”

그들은 서로 꼭 끌어안았다. 태진은 이 순간만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소영이와 같이 있다는 그 자체에 충실하고 싶었다.
소영이 태진을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오늘은 우리 두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그래. 난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두 사람은 긴 키스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뽑아 물었다.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피우는 담배 맛은 고소했다. 창 밖에선 어느 새 어둠이 슬금슬금 스며들고 있었다. 태진은 허기가 졌다. 그러고 보니 북새통에 두 사람 모두 점심도 거른 상태였다.

“저녁 먹어야지?”
“그 말을 들으니까 배가 고파지네요.”
“나갈까?”
“아뇨. 집에서 해결해요.”
“반찬이 없는데. 냉장고엔 음료수와 인스턴트 식품밖에 없을 걸.”
“함께 나가서 찬거리를 사다 해 먹어요.”
“귀찮지 않아?”
“이젠 선생님을 위해서 매일 해야 할 일인데요.”

태진은 그렇게 말하는 소영이가 새삼스러워 보였다. 이제 정말 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이 기대되는데.”

태진은 그녀의 앙팡진 엉덩이를 '‘철썩’ 소리가 나도록 때려주었다. 그리고 매무시를 고친 소영과 손을 잡고 쇼핑하러 나섰다. 찬거리를 사면서 태진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시선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단 소영이에게 꽂혔다가 다음에 자신에게로 옮아왔다. 소영이는 그런 시선에 이미 익숙한 탓인지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태진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영 불편했다. 익명의 다수로부터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이토록 사람을 부자연스럽게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 태진을 보고, 소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못 본 체하세요.”
“이상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아서.”
“곧 익숙해질 거예요. 그냥 평상시에 하던 것처럼 행동하면 돼요.”

소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 식탁에 필요한 찬거리들을 샀다. 찬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아는 체를 하면 그냥 미소로 가볍게 받아넘겼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그 유명한 탤런트를 보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악수를 청해오면 악수를 해주고, 사인을 청하는 사람에게는 미소 띤 얼굴로 사인을 해 주었다.

태진은 그 옆에 서서 영 쑥스럽기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 뉴스에서 결혼 발표를 보았다며 축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태진은 그 인사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건만, 소영이는 잘도 받아 넘겼다. 소영이 덕택에 태진도 어느 새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갇힌 공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소영이로 인해 졸지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소영이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찬거리들을 다듬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태진은 소영이 집에서 몇 번 식사 대접을 받아 이미 그녀의 솜씨는 알고 있었다. 뛰어난 솜씨는 아니지만, 그 바쁜 와중에 익힌 요리 솜씨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마늘 좀 까주시고, 대파 껍질도 좀 벗겨주세요.”

소영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태진을 시켰다. 태진은 주방에 서서 요리 준비를 하는 소영의 뒷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야채를 씻느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팽팽한 엉덩이가 그 어느 때보다 섹시하게 보였다. 태진은 슬그머니 다가가 소영이의 엉덩이를 슬슬 만졌다.

“간지러워요.”

소영이 엉덩이를 빼며 곱게 눈을 흘겼다. 태진은 소영의 뒤에서 몸을 밀착시켜 끌어안으며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브래지어조차 하지 않은 탐스런 젖가슴을 꼭 쥐었다. 그리고 귀에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소영이 넌 이제 내거야. 영원히…….”

소영이 고개를 돌려 태진을 보았다. 태진은 소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두 사람은 그 자세로 한참 서 있었다.

늦은 저녁 식탁에 촛불을 밝혔다.
식탁은 풍성했고, 사랑이 가득 넘쳤다. 두 사람은 포도주를 곁들여 식사했다. 하지만 태진에겐 오늘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소영이가 냉장고로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술잔에 미리 준비한 수면제를 탔다. 소영이 몇 번이고 술잔을 부딪쳐 왔지만, 되도록 천천히 술잔을 비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소영이는 깊은 잠 속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왜 이렇게 졸리는지 모르겠어요.”

드디어 소영이 하품을 하며 눈이 거슴츠레해졌다.

“피곤해서 그럴 거야. 들어가 자.”
“설거지도 해야 되는데.”
“그런 건 신경 쓸 거 없어. 내일 해도 되니까.”

태진은 잇달아 하품을 해대는 소영이를 침대에 뉘었다. 소영이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금세 잠이 들었다. 태진은 혹시나 해서 몇 번 소영이를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소영이는 몸에 약 기운이 완전히 퍼졌는지 깨어나지 않았다.

“진희야!”

태진은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말고, 그 자리에 고드름처럼 굳어져 버렸다. 고개를 떨구고 늘어진 나 회장의 머리에 까만 비닐 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진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 이제 다 끝났어요.”

그렇게 말하는 진희의 입에서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눈두덩이 벌겋게 부어 있는 걸로 보아, 한동안 운 것이 분명했다. 눈에 핏발도 서 있었다. 태진은 서둘러 나 회장의 얼굴에 씌워진 비닐 봉지를 벗겼다. 순간, 독한 위스키 냄새가 훅 풍겨왔다. 진희는 나 회장을,아니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전에 함께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나 회장은 눈을 허옇게 뜨고 죽어있었다. 아버지에게 비닐 봉지를 씌우며 고통스러워 했을,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껴야 했을 진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소영이와의 결혼을 발표한 시간에 진희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태진은 명치끝이 저리는 아픔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진희가 태진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에서 봤어요.”
“…….”
“함께 있지 않나요?”
“잠들었어.”

태진은 진희 앞에 놓여 있는 위스키병을 들고 몇 모금 벌컥벌컥 마셨다. 답답하게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기분이었다.

“저도 주세요.”
“그만 마셔.”
“취하지 않았어요.”
“결국…….”
“……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지만…… 내 손으로 끝내
고 싶었어요. 질긴 인연의 끈을…… 당신도 날 원망하지
않았어요.”
“무섭군.”
“두려우세요?”

진희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살려줄 수도 있었잖아?”
“말했잖아요. 질긴 인연의 끈들을 모두 내 손으로 정리하
고 싶었다고…….”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태워요.”

진희의 목소리가 마치 끝도 모를 깊은 동굴을 돌아나온 메아리처럼 들렸다.

“아버지의 마지막까지 제가 처리하고 싶어요.”

진희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진희의 말에 따르고 싶었다. 어차피 끝난 일이라면, 진희의 의견에 따라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나 회장의 죽음을 보고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태진은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 펼처져 있는 상황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두 사람은 나 회장을 쇠고랑에서 풀어, 소각로가 있는 보일러실로 옮겼다. 소각로 뚜껑을 열고 나 회장을 그 안에 넣었다. 나 회장의 옷가지들도 같이 넣으려던 태진은 양복 호주머니에 뭔가가 들어있는 것을 느꼈다. 끄집어냈다.

“아니, 이건…….”

그것은 진희가 가지고 있던 옥 목걸이와 똑같은 것이었다. 태진은 그 목걸이를 진희에게 주었다. 진희는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반쪽 옥 목걸이와 맞추어 보았다. 두 개의 목걸이가 합쳐져 완전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태진은 다른 호주머니도 뒤지다가, 안쪽 호주머니에서 비닐로 코팅된 사진 한 장과 조그맣게 포장된 물건도 발견했다. 사진은 어린 진희가 나 회장과 활짝 웃으며 찍은 것이었다. 물건의 포장을 벗겼다. 큼지막한 진주가 박힌 귀고리가 나타났다.

“진희에게 주려고 사온 거 같아.”

태진은 사진과 함께 진주 귀고리 한 쌍을 진희에게 주었다. 진희는 아무 말 없이 사진과 목걸이를 받아 한동안 보더니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다.

“옷도 넣고 태우세요.”

진희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겨있지 않았다.
태진은 소각로 뚜껑을 닫고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소각로 버너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불이 당겨졌다. 정적이 감돌던 지하실은, 나 회장의 시신과 옷가지와 소지품들을 태우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두 사람은 더 이상 한 마디 말도 없이 소각로의 맹렬한 가스 불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소각로 속에서 펑하는 첫번째 소리와 한동안 있다 두번째 소리가 들려왔다. 첫번째 소리는 시신의 배가 터지는 소리이고, 두번째 소리는 두개골이 파열되며 나는 소리였다. 이제 이대로 몇 시간 후면 나 회장의 시신은 연기와 함께 한 줌의 재도 남기지 않고 굴뚝을 타고 흩어져 나갈 터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불꽃이 이글거리는 화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희의 눈에서 어느 순간 이슬이 반짝 빛을 발했다.

“올라가지.”

태진은 진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진희는 순순히 태진의 말에 따랐다.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까지만 해도 하늘이 맑았는데, 어느 새 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거실의 불을 모두 꺼서,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태진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비가 오는구만.”
“…….”

진희는 내리는 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태진은 무슨 말이든 해서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한 잔 해요.”

한참 만에 진희가 입을 열었다. 태진은 개봉하지 않은 양주병을 가지고 왔다. 진희는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진희의 볼을 타고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희!”

태진은 그런 진희를 보며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 나도 사람이에요. 상처가 나면 뜨겁고 붉은 피가 흐
르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요.”

진희는 태진의 가슴에 무너지듯 얼굴을 묻었다.

태진은 진희의 어깨를 꼭 안고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격한 감정을 참아내는 진희의 흐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한동안 있었다.

“…… 선생님은 행복해야 해요.”

진희가 태진의 가슴에 묻었던 머리를 든 것은 한참 후였다.

“약속해요. 행복하게 살겠다고요. 어서요.”
“…… 알았어. 약속하지.”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나를…… 사랑한 적이 있었나요? 단 한 순간만이라도 진정으로?”
“진희!”

태진은 진희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태진은 진희의 볼을 감싸쥐고 한동안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진희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했다.

“고마워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진희가 태진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포개어왔다. 키스를 하면서도 끝없이 흘리는 눈물이 태진의 뺨을 적시어 왔다.

“이제 떠날 때가 됐어요.”

진희는 밑도끝도 없는 말을 불쑥 던졌다.

“떠나, 다니? 그게 무슨 말야?”
“이제 제가 할 일은 모두 끝났어요.”
“그럼?”
“그래요. 이제 우린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태진은 어디로 갈 거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런 것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지도 몰랐다. 이제 두 사람은 어차피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다. 경찰에 진희의 신분이 노출된 이상, 서로가 모르는 남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서로를 위하는 길인지도 몰랐다.
진희가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소영 씨와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진희!”

태진은 뭐라곤가 꼭 한 마디 해주고 싶은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갈게요.”

진희는 태진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잠깐만. 우린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거야?”
“네.”
“이렇게 허무하게?”
“이별의 순간은 빠를수록 좋대요.”
“정말 내가 진희를 위해서 해 줄 일이 없을까?”
“없어요, 아무것도. 내가 해야 할 일만 남았어요.”
“그게 뭔데?”
“곧 알게 될 거예요.”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말하는데, 선생님과 소영씨 두 사람은 행복해야 돼
요. 알았죠?”

태진은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는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태진은 그런 진희의 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뒤를 따랐다. 어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진희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이 집에서 벗어나는 곳까지라도 따라나가 배웅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은 후문까지 갔다.

“더 이상은 안 돼요. 들어가세요.”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태진은 다시는, 영영 두 번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진희를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이 빗속에 우산도 없이 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기다려.”

태진은 지하실을 향해 뛰었다. 그 사이에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조급했다. 우산을 찾아들고 지하실 계단을 나는듯이 뛰었다.

“자, 받아. 비 맞으면 감기 들지도 모르잖아.”

태진은 진희의 손에 펼친 우산을 쥐어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할게요.”

진희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태진은 보았다. 진희의 미소 뒤에 숨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소리없는 눈물을.

태진은 우산을 받고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가는 진희의 뒷모습이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소영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태진은 무릎을 꿇고, 잠든 소영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지금 진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그동안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정말 이래도 될까 하는 죄책감이 뭉클뭉클 솟구쳐올랐다.
태진은 비가 쏟아지는 베란다로 나갔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두시. 세상은 내리는 폭우 속에 갇혀 적막했고, 얼굴을 때리는 빗줄기의 감촉은 차라리 시원했다. 금세 옷이 젖어왔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답답하게 뭉쳐 있는 응어리는 풀어지지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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