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된 약속 - 5
혼자된 약속 - 5
  • 이영철 소설가
  • 승인 2006.04.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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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나진희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야? 다들 시말서를 쓸 각오를 하고 당장 사무실로 들어와!”

최 형사는 수화기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나진희를 놓친 모양이죠?”

불독이 물었다.

“어제 저녁, 사람이 많은 남대문 시장에서 놓쳤답니다.”
“이거 큰일이군. 혹시 이태진과 함께 있지 않을까요?”

불독은 수화기를 들고, 이태진을 감시하고 있는 팀의 휴대폰 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 번째 갈 때 그들이 전화를 받았다.

“나야…… 뭐? 어젯밤부터 민소영과 함께 있다고? 뭐라고? 그게 정말야? 그래서 지금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막 들이닥치고 있다 이 말이지? 알았어. 곧 갈 테니까, 이태진 집 앞에서 만나자고.”

최 형사는 그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이태진 집에 기자들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오늘 아침에 민소영과 이태진이 결혼을 발표한다고 해서, 기자들이 난리가 났답니다. 그 일대가 방송국과 신문사, 잡지사 기자들 보도 차량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는군요.”

불독은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양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태진과 나진희를 엮어서 추리한 것이 한낱 물거품처럼 보기좋게 빗나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담한 놈이라 해도, 결혼 발표를 앞두고 그런 범행을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태진은 나진희와 같이 있지 않고, 자신의 결혼 상대자인 민소영과 함께 밤을 새웠다지 않은가.
최 형사도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 헛다릴 짚었을까요?”
“적어도 이태진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요. 어젯밤부터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무엇보다 그런 큰일을 앞두고 그토록 끔찍한 일을 벌이겠습니까?”

최 형사는 암담했다. 그렇다면 나석만 회장을 납치해 간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란 말인가. 불독이나 자신의 육감으론 분명히 나진희와 이태진, 두 사람이 공범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기좋게 빗나가 버린 꼴이 아닌가. 놈들이 지금쯤 어디선가 자신들을 비웃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자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가장 시급한 것은, 나진희의 행방을 찾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군요. 헌데 나진희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요?”
“바보 같은 놈들이 여자 하나도 제대로 미행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 말이 없다가, 최 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이태진의 집에 가봐야죠?”
“이거 영, 똥 밟은 기분입니다.”

불독은 이빨 사이로 침을 찍 갈겼다.

“실은 저도 똑같은 심정입니다.”

최 형사의 말에 그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최 형사도 따라 웃고 말았다. 불독이 말했다.

“저는 나진희가 살고 있는 집을 수색할 테니, 최 형사님은 이태진의 집에 가보시겠습니까?”
“그러죠.”

두 사람은 각자 차에 올랐다.
최 형사는 핸들을 잡고 이태진의 집으로 향하면서, 차창에 부딪치는 봄 햇살을 보며 참 좋은 날씨라고, 화사한 햇살이 한창 물 오른 처녀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엔 한적한 호숫가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온몸에 받으며 낚시나 해야 하는데……’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그건 꿈 같은 얘기였다. 평생 형사 생활을 하면서, 이 나이가 되도록 그렇게 한가롭고 마음 편하게 산 날이 며칠이나 될까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태진의 집 근처는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최 형사는 결국 차 댈 곳을 찾지 못해 근처 파출소 앞에 차를 대야 했다. 집 안 역시 북새통이었다. 넓은 정원이 사람들로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원 한쪽엔 이태진과 민소영의 기자 회견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 있는 방송사, 신문사, 웬만한 잡지사의 기자들이 모두 온 것 같았다. 방송을 통해서나 보던 연예인들도 제법 눈에 들어왔다.

이태진을 감시하던 국가정보원에서 파견된 요원과 형사가 최 형사를 보고 다가왔다.

“기자 회견이 몇 시야?”
“열 시라고 알고 있는데, 좀 늦어질 거 같은데요.”
“특별한 일은 없었지?”
“전화로 말씀드린 거 외에는 별다른 사항이 없습니다.”
“수고했어. 오늘은 철수해. 사우나에라도 가서 한숨 푹 자라구.”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최 형사는 기자들 틈에 섞여 집을 둘러보았다. 보고에 의하면 이태진이 혼자 살고 있다고 했는데, 남자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큰 집이었다. 대부분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선호하는데, 이태진은 좀 특이한 사람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정원이 웅성거리더니, 이태진과 민소영이 기자들의 카메라 사례를 받으며 모습을 나타냈다. 이태진은 검정색 양복에 흰 나비 넥타이를 매고, 민소영은 진달래색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최 형사가 봐도 민소영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기자들 대부분의 질문은 민소영에게 집중되었다. 민소영은 시종일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따금 이태진에게도 질문이 던져졌는데, 그는 민소영과는 달리 몹시 어 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시간.
불독은 수사 요원 세 명과 함께 나진희의 집을 수색하고 있었다. 일단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이상 철저한 수색이 필요했다. 나진희의 아파트는 여느 살림집과는 달리 썰렁한 느낌을 줄 정도로 단출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주방용품과 화장대, 책상과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침대 정도가 전부였다. 집 안을 꾸민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불독은 책상 위 사진틀의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예쁘게 생긴 여자와 나석만 회장이 활짝 핀 벚꽃 아래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직감적으로 사진 속의 여자가 나진희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꽂이의 책들을 훑어보던 불독은,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방송 대본이 많이 꽂혀있었는데, 모두 이태진이 쓴 것이었고, 몇 권의 에세이집도 이태진이 쓴 것이었다.

‘역시 생각대로 이들은 보통 사이가 아닌것만은 틀림없어.’

불독은 그렇게 추측하며 책상 서랍을 차례차례 열었다. 서랍 속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맨 아래 서랍을 열자 고급스런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싼 것이 있었다. 보자기를 풀자,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은 오동나무로 된 상자였다. 상자 속에는 여자들의 귀고리와 브로치, 반지 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퇴색한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는데, 나석만 회장과 모녀의 사진이었다. 나석만 회장의 품에 안겨 있는 갓난 아이가 나진희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잠깐만요. 이걸 보시죠.”

불독은 수색 요원이 건네주는 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눈에 익은 몇 송이의 검정색 종이 장미와 그걸 만드는 재료인 종이였다.

“어디서 찾아냈지?”

불독은 가슴이 뛰었다. 이제 거의 확실한 물증을 찾아낸 것이다. 드디어 그동안에 연쇄적으로 일어난 납치의 범인이 누구인가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침대 밑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쌓여있는 비디오 테이프들도 수상합니다.”
“그래? 당장 틀어봐.”

불독은 그 중 한 개를 거실에 있는 비디오에 넣고 틀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그룹 이만덕 회장이 납치돼 살해당하는 장면을 녹화한 것이었다. 방송국과 신문사, 잡지사 등에 보낸 테이프와는 달리, 편집이 안 된 원본이었다. 그 테이프에는 나진희의 모습이 간간이 녹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태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테이프를 틀었다. 그것은 탤런트 민철국에 관한 것으로, 역시 편집이 안 된 상태인데, 그 테이프 역시 그녀의 모습이 곳곳에 찍혀있었다. 불독은 테이프를 고속으로 돌렸다. 어느 것은 민철국이 테이프가 다 돌아가도록 개미에 뜯기어 죽어가는 과정만이 담겨 있었다.

불독은 최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종이 장미와 범행 기록을 담은 테이프 원본을 찾았다는 얘기를 듣고 최 형사는 당장 달려오겠다고 했다.

다음 것은 나리라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다른 것들과는 달리, 나진희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웃는 모습까지 또렷하게 담겨있었다. 이제 증거가 확실하게 확보된 셈이었다.

“여기 좀 보십시오.”

계속해서 수색을 하던 다른 수사요원이 불독을 불렀다. 그는 베란다 한 쪽 구석에 담요 같은 것으로 덮어놓은 길다랗고 커다란 유리 수족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거기엔 지금까지 살해된 남자와 여자들의 국부를 파먹어 들어갔던 불개미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불개미들에게 먹이로 준 듯한 작은 동물의 하얀 뼈다귀들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급하게 달려온 최 형사도 수사 요원들이 찾아낸 증거품들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나석만 회장 납치범이 누군지 분명해졌습니다. 나진희가 아버지를 납치한 것은 원한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입니다. 나진희는 어머니가 불행하게 죽고 자신이 사생아였다는 사실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생활이 시궁창 같은 사람들만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었고요.”

최 형사의 말에 불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형사가 덧붙였다.

“이제 나진희가 범인이라는 또 다른 확실한 증거와 공범의 신원을 간단하게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지난 번에 김상수가 했던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아! 화장품과 향수!”
“바로 그겁니다!”

최 형사는 화장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나진희의 화장품과 향수병을 치켜들어 그의 눈 앞에 바짝 내밀었다. 불독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압구정동 카페에서 김상수를 만났을 때, 그는 분명히 말했었다. 범인들은 남자와 여자가 한 팀인데, 자신은 분명히 두 사람이 쓰는 화장품과 향수를 기억해 낼 수 있다고.
불독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태진 집으로 가서 그가 어떤 화장품과 향수를 쓰는지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런데…… 오늘은 이태진이 민소영과 결혼을 발표한 날 아닙니까. 만약에 섣부르게 행동했다가는 우리가 크게 다칠 염려가 있다 이겁니다. 이제 이태진은 과거의 그가 아니라는 얘기죠. 일약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있다 이겁니다. 수사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태진이 공범이 아닌 경우도 생각해야 하고요. 그가 매스컴을 동원해 강력하게 항의해 오면 우린 개망신 당하기 딱 좋죠.”

최 형사의 말에 불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떡하든 알아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이태진의 집에 어떻게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그가 쓰는 화장품과 향수 상표를 확인하느냐를 생각해 봐야죠.”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이태진에게 접근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범
인 한 명이 확실하게 밝혀진 이상, 공범을 찾는 일만 남았다. 그것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었다.

“아, 방법이 있습니다.”

최 형사가 무릎을 쳤다.

“오늘 두 사람이 결혼을 발표한 날이 아닙니까?”
“그런데요?”

불독은 최 형사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김상수를 그곳에 보내는 겁니다. 두 사람 모두 김상수를 잘 아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두 사람의 결혼 발표를 축하한다고 난 화분이라도 들고 자연스럽게 찾아가서 이태진이 쓰는 화장품과 향수를 알아온다면 확실해지는 거 아닙니까. 김상수가 분명히 남자의 화장품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으니까.”
“대단하십니다. 정말 최 형사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이거 쑥스럽게 왜 이러십니까.”

최 형사는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역시 이 계통의 베테랑은 뭐가 달
라도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독은 정색을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보다가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럼 김상수에게 빨리 연락을 해야겠군요.”
불독은 전자 수첩을 꺼내 김상수의 전화 번호를 찾아,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김상수와 통화를 마치고 불독이 말했다.
“그나저나 나진희의 행방이 묘연해요. 그녀의 차는 전국에 수배했으니까 금세 밝혀지겠지만…… 지금 나석만 회장, 아니 자기 아버지와 함께 있을 텐데. 또 그동안 쓴 방법으로 잔인하게 죽이지나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구해낼 수도 있으련만…….”
“그동안 나진희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요. 난 어느 일면으론 그녀의 지금까지의 행동과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불독이 최 형사를 보며 말했다.

“휴머니스트시군요.”
“제가요? 그렇게 보입니까? 처음 듣는 말이군요.”

최 형사의 말에 불독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최 형사도 나진희를 동정하는 그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김상수는 이태진의 집에 들렀다가 수사본부로 왔다. 최 형사는 일단 김상수에게 나진희 집에서 가져온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를 맡게 했다.

“맞습니다! 여자 화장품은 바로 이 냄새고, 향수는 이겁니다!”

김상수는 세 개의 향수를 차례로 냄새 맡다가 그 중에 한 개를 집었다.

“그런데 이태진은 아니더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태진 씨가 쓰는 화장품 상표를 확인하고 화장품점에 들려 냄새를 확인했는데, 제가 납치됐을 때 맡았던 화장품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외람된 얘기지만, 그 사람은 그런 일을 할 만큼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가 못 됩니다. 방송국에 있을 때 몇 번 만나서 아는데, 상당히 겸손하고 말도 별로 없는 전형적인 샌님 타입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최 형사는 실망이 컸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 때는 이태진이 공범일 확률이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김상수의 말은 이태진은 결코 범인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나진희와 공모한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범인들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범인이 나진희로 밝혀진 이상, 외국으로 도망가지 않았다면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최 형사는 노심초사하고 있는 상부에 수사경과를 보고했다. 이 정도 밝혀낸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체면이 서고 일할 맛도 났다.

그때였다.
전국 경찰에 수배령을 내린 나진희의 차가 동대문 지하철 옆 쇼핑센터 주차장에서 발견됐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급히 출동한 최 형사는 일단 차에 있는 지문을 채취하고 차 문과 트렁크 문을 열었다. 트렁크에서 발견된 것은, 전자 충격기와 마취제로 쓰이는 약품과 폭이 넓은 접착 테이프 등이었다. 그런데 더 결정적인 증거물은 지금까지 살해된 사람들에 대한 조사 자료가 적혀있는 노트 한 권이었다. 그 노트에는 그들의 집과 근무처의 전화 번호와 약도, 출퇴근시 이용하는 도로와 시간대, 자주 가는 곳과 취미, 습관, 가족 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일목요연하게 빼곡히 적혀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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