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마이트 폭탄 조립 사실 은폐에 나선 무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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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범 다이너마이트가 조립돼 있었다고 증언

▲ 전남도청 TNT ⓒ뉴스타운

무등일보가 2015. 04.21에 “6. 도청지하실 폭탄 북한 특수군이 설치?”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지만원 등 세력에 대한 반론”에 대한 시리즈 제6회인 모양이다. 요지는 도청 지하실에는 다이너마이트도 있었고, 뇌관과 도화선도 많이 쌓여 있었지만 그것은 탄광인부들이 가져다 놓은 것이고, 뇌관과 도화선은 “마치 연결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계엄군을 속이려 한 것이지, 실제로 연결하지는 않았다는 주장이다.

2015.4.21. 무등일보 주장의 요지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신만식씨는 "떡밥과 뇌관의 결합작업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 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고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 텐데 시민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등일보: 도청지하실 폭탄 북한 특수군이 설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번의 무등일보와 1996년 10월 10일의 광주일보가 동시에 인용했던 양홍범의 증언 두 개는 모두 허위여야 한다. 무등일보는 바로 이 글 밑에 양홍범의 아래 증언을 소개했다. 하지만 양흥범의 증언은 실제로 누군가가 이 세 가지를 다 연결하여 폭탄을 조립해 놓았고, 이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계엄군에 해체를 요청하였다고 증언했다. 2015. 04.21.자 무등일보 기사는 앞 다르고 뒤가 다르게 썼다. 앞의 문장들에서는 신만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세워 다이너미이트는 폭탄으로 조립되어 있지 않았고, 광주시민이 그냥 조립된 것처럼 보이게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립을 위해 전문가가 투입되지 않았다고 새로운 주장을 한다. 그러나 기사의 후반 문장들에서는 양흥범, 문영동, 김영복 등이 폭탄을 지켰고, 무영동이 전교사 준장을 만나 폭탄 해체 작업을 요청했고, 전교사는 문관 1명을 지원 받아 25일 해체작업을 했다고 설명한다.

양홍범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하자. “5월 23일 나를 포함해 폭약담당 9명은 처음으로 지하실에 모였다. 문영동과 김영복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그들은 이곳에는 자율적으로 모인 사람들끼리 폭약담당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한번은 문영동 씨가 밖에 나갔다 왔다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문영동 씨는 상무대에 갔다 온 것이었다. 상무대에서 준장까지 만나서 뇌관 제거 지원을 요청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폭약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폭약 관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5월 25일경 문영동씨의 지원요청을 받은 계엄사령부에서는 문관 한명(배승일)을 폭약 담당반으로 보내왔다. 지하실에는 상당량의 다이너마이트 뇌관이 있었는데 25일 하루 동안 나를 제외한 4명은 배승일과 함께 뇌관분리 작업을 했다.”

2015년의 무등일보는 9년전인 1996년 광주일보가 야심적으로 쓴 역사실록을 완전 뒤집고 전혀 세로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광주일보사의 ‘실록 5.18광주항쟁사’ (제79회 도청 폭탄뇌관제거) 1996.10.10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이중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光州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 폭약반으로 활약했던 양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문동영씨와 김영복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文영동.金영복씨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文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金基錫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文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전교사에게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한다는 데 폭약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날 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金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들은 지하실에 있던 폭약류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선의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 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은 96년 7월 15일 5.18 22차 공판에서 나와 "전교사 부사령관으로서 광주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25일 항쟁지도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폭약반을 소개받았고 이날 오후 폭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만난 뒤 뇌관제거를 위해 특수요원 파견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85년 6월 7일 尹誠敏 국방장관이 국회 국방위에 출석, 발표한 '光州사태 보고'라는 문건에도 "도청지하실에 모아둔 폭발물의 폭발방지를 위해 폭약반의 양해아래 특수요원 투입,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하는데 성공, 광주시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힘으로써 신군부와 항쟁지도부와의 사전교감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취해졌던 뇌관제거. 결국은 계엄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겠다며 버텨왔던 시민군. 마지막 보루였던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되자 도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신군부는 그들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폭약류 뇌관이 제거되자 상무충정작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특별취재반>

상무충정작전 수행 지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6일 22시경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5월 26일 22시 이후에는 언제라도 광주재진입작전을 실행해도 좋다. 다만 쌍방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광주재진입작전 개시 명령을 받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5월 26일 10시 30분경에 전교사 사령관, 20사단장, 31사단장, 특전사 3, 7, 11공수여단장, 보병학교 교장, 포병학교 교장과 기갑학교 교장이 참석하는 상무충정작전에 관한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얻은 세부작전계획 내용을 작전 참가 지휘관에게 알리고 상무충정작전을 27일 01:00분에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재진입작전의 실시가 확정되자 광주시내와 무장시위대의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가발과 사복을 착용한 정보 수집요원들을 광주 시내 주요 공격목표 지점에 침투시켜 무장시위대의 배치장소, 인원수, 무기배치 현황, 경계상태 등을 각 주요 건물별, 지역별로 샅샅이 파악하여 작전부대에 알려주어 작전 시 희생자를 극소화하도록 배려했다.

무장시위대의 본거지인 도청 지하실에는 당시에 무장시위대가 약탈한 약 300상자에 이르는 폭약이 은닉되어 있었고 도청을 점거하고 있던 강경파 학생들은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할 경우에 이를 폭파하여 저항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신관과 뇌관을 장치해 놓고 있는 상태였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계엄군이 도청을 공격할 경우에 강경파 학생들이 이성을 잃고 폭약을 점화할 경우에는 엄청난 인명 피해는 물론 광주시내의 파괴도 심대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보병학교 병기기동대에 근무하는 문관 배승일에게 도청에 잠입하여 지하실에 있는 폭약의 신관과 뇌관을 제거하라고 비밀리에 지시를 했다. 배승일 문관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청에 잠입했다. 그리고 도청 안에 있던 온건파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지하실에 들어가 폭발물에 장치되어 있던 신관과 뇌관을 극적으로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배승일 문관의 용맹스러운 행동으로 도청은 오늘 날 까지도 건재해 있고 광주재진입작전에 있어서도 큰 희생자 없이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TNT를 제거한 사람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서)

계엄군이 철수한 뒤의 광주시는 완전히 무장시위대가 지배하는 치안부재의 도시로 전락했다. 시위대는 탈취한 무기로 나쁜 일들을 저질렀다. 5월 25일에는 광주 지원동 일가족을 카빈총으로 살해했고, 26일에는 학은동에서 3명 일가족을 살해했고, 같은 날 학동에서도 3인 일가족을 살해했고, 금은방, 병원 등에 난입하여 금품을 탈취하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에 전문가의 솜씨로 뇌관까지 설치하여 언제라도 폭발시킬 수 있는 준비상태로 만들어 놓고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해 오면 이를 폭파시켜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이 사실을 가장 우려한 사람들이 학생수습위원장인 전남대생 김창길, 문영동, 김영복 등이었다. 이 폭발물이 터지면 이리역 폭팔사고와 같은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김창길 등은 전투교육사와 은밀히 접촉했고, 전교사는 폭발물 전담 요원을 시민군으로 위장투입 시켰다. 전교사 병기근무대 소속의 배승일 문관(5급갑) 등을 무장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는 도청 지하실로 2회씩이나 잠입시켜 25일에는 밤9시부터 새벽 1시까지, 26일에 다시 잠입하여 오전과 오후에 걸쳐 피를 말리면서 뇌관을 제거했다.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무장시위군은 광주시민 전체의 생명을 인질로 삼았지만, 광주에 살지 않는 진압군은 목숨 걸고 광주시민을 히로시마의 악몽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것이다. 광주시민들은 목숨을 구해 준 이들 온건파 학생들과 계엄군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계엄군이 전라도 사람들을 싹쓸이 하러 왔다면 계엄군이 목숨 걸고 시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 10시간 이상씩이나 피를 말리며 그 엄청난 분량의 뇌관들을 하나하나 분리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   론

양홍범의 증언은 이번 무등일보와 1996년 10월 10일의 광주일보에 중점적으로 인용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인용된 양홍범의 증언은 이번 무등일보가 얼마나 거짓말을 거짓말인지도 모른 채, 기사를 쓰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양홍범은 다이너마이트가 조립돼 있었다고 증언했고, 무등일보는 조립이 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양홍범의 증언을 소개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김대중의 후예다운 행동이다.   

여차 하면 광주시를 히로시마처럼 날려버리고 이를 계엄군 소행으로 뒤집어씌우려 한 것을, 배승일 문관이 25-26일 양일간 목숨을 걸고 잠입하여 조립된 것을 해체했다.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개, 수류탄 450개, 최루탄이 500개로부터 뇌관을 뽑아냈다. 신문 뒤져 봐라. 배승일은 그 선행으로 보국훈장 광복장을 탔지만, 노무현이 박탈했다. 그 후 그는 소송을 걸어 훈장을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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