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백제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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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백제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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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국모(母) 소서노

우리 역사속에는 언제 부터인가 식민사관이라는 유령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우리의 역사를 재단 조정 감시(?)해 오고 있다. 식민사관이란 두 말 할것 없이 일제 강점기 근대식 교육이라는 모토로
한국 역사 학계의 가닥을 잡은 일본 학자들이 만든 학풍으로 그 학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인 후학(?)들의 역사 쓰기를 통칭 하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 학단은 식민사관이란 말에 결코 동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학이 유전자 생물학 의학등의 도움으로 순수 과학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 마당에 시민사관이 왠말이냐고 펄쩍 뛴다. 그러나 역사 학계에 식민사관은 분명 존재 한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의 부정이 대표적이다.

일본 학자들은 백제의 역사를 근초고왕(346년 즉위)으로 부터 잡는다. 그 앞의 시대는 부족 사회 형태의 불 완전한 성읍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 학풍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우리 역사 학단의 주류는 아직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신빙성을 두지 않는 입장이다. 이들에게 백제 창국모 소서노는 중요한 관심 대상이 아니다.

서기전 40년대에 부여에 살던 한 젊은 여자로 부터 고구려 백제가 시작 되었음에도 학자들의 연구속에서 그녀는 아직도 실체가 불분명 하다. 소서노는 북사와 수서(隨書)에 등장 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소서노의 등장에 당황 했던듯 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집필 의도에 기이하고 신비스런 일은 되도록 제외 한다 하면서도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소서노를 기록 했다.

김부식은 소서노가 주몽의 아내로 살다 비류 온조를 낳고 주몽이 부여에서 낳은 아들을 데려 오자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젊잖고 유교적인 기록을 정사(?)로 적고 다시 고개를 갸우뚱 하며 한가지를 더 첨부 한다.

소서노가 졸본에서 우태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자 다른 곳에서 온 주몽과 살며 그를 도왔는데 주몽이 부여에서 살 때 낳은 아들 유리를 불러 오자 소서노가 두 아들과 상의를 하여 10여명의 신하들과 남행을 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우태는 수서에 동명의 후손중에 우태가 있어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우고 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에도 보이는 인물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자식이 아니라 우태의 자식임이 더 설득력이 있다. 소서노는 온조왕13년, 61세로 죽었다 했으니 그녀의 나이 40무렵에 두 아들을 데리고 부악에 올라 새로운 나라를 세울 꿈을 꾼다.

그러나 이들은 부악에 올라 갈등을 한다. 부악 아래에 나라를 세우자는 온조와 달리 소서노와 비류가 바닷가를 택하고 미추홀로 떠난 것이다. 십제(十濟)라 처음 이름 지었던 백제는 초기 부터 두쪽이
난것이다. 온조는 위례성에 목책을 쌓고 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미추홀에 공세를 가한다. 온조의 전격적인 공세는 순시간에 비류를 무너 트린다.

삼국사기는 이 상황을 짠지역에 자리를 잡은 것을 후회한 비류가 자살을 한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으나 이는 형제간의 골육상전을 은폐 하기위한 장치에 불과 하다. 이 때에도 소서노는 건재하다. 큰 아들 비류의 죽음에 절치부심 하던 소서노는 드디어 온조왕 13년 2월 위례성을 포위 하고 반격에 나선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상황을 늙은 여자가 남자로 변하고 범 다섯마리가 성안으로 들어 왔다고 적고 있다. 온조는 소서노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치루어 난을 평정 하고 소서노를 제거 한다. 이 해에 삼국사기는 국모가 죽었다고 간단 하게 적고 있다.

온조는 이 상황에 크게 충격을 받고 왕도를 위례성에서 한성으로 옯긴다. 소서노가 61세에 죽었다고 했으니 61세의 늙은 여자가 군마를 몰아 아들이 경영 하던 나라를 공격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한 전과가 있는 역전의 용사다. 비류 백제와 온조 백제도 그녀의 입김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소서노는 과연 여왕이다. 그녀의 손 바람 아래 고대의 삼라만상이 납작 엎드렸고 고구려, 비류 백제, 온조 백제가 생겨 났다. 일본에 최초로 여왕이 등장한 것이 겨우 7세기니 소서노의 등장은 신선하고 놀랍다. 온조는 소서노가 죽자 장사를 지내고 드디어 동명묘를 세운다. 부여의 창건주 동명(東明) 그는 과연 사람인가 아니면 자연신을 지칭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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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 2006-03-27 19:52:04
잘 읽었습니다.

백제사랑 2006-03-29 17:18:38
이작가님의 글을 읽을 수록 점점 흥미와 신선한 느낌을 받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백제사에 귀추가 주목됩니다...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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