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태극기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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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태극기를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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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하임 에인절스 마운드에 꽂은 태극기

 
   
  ▲ 애너하임 에인절스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
ⓒ 뉴스타운
 
 

그건 분명한 오버 퍼포먼스였다. 우리가 보기엔 속이 후련한 장면이었지만 세련된 느낌은 아쉬웠다. 특히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선 애너하임 에인절스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를 보고 말들이 많단다.

단일민족 국가나 애국적 문화가 없는 타국민들이 볼 때도 의아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일본인들은“조선인다운 행동이다.”거나,“도발”이라는 표현조차 서슴지 않았다. 이 날 서재응은 행동은“아직도 일본이 우리보다 한 수 위이다.”는 김인식 감독의 말과 극을 이루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것은 분명 서재응에 의해 철저하게 준비된 반란이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이치로가 그를 자극했건 일시적인 흥분이 낳은 결과라도 좋다. 어쨋건 그의 가슴 속에는 늘 그런 생각들이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며,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딜 가든 태극기를 꽂고 싶어 한다. 한국인은 그러고 싶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서재응과 같은“국수적 오버”를 할 수 있는 당찬 민족이라는 걸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 것만으로도 그 퍼포먼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것이 어쩌면 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한국인의 열정이기도 하다. 남극이든 히말라야든 거기에 태극기를 꽂는 한국인들의 열정은 여느 탐험가들이 자신의 정복행위에 대한 증거물로 택하는 국기의 의미와는 다를 것이다.

거기에 피의 냄새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그 피는 한 핏줄이라는 족속의 의미 외에도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흘린 선혈의 흔적을 포함한다. 이미 우리는 보았다. 2002년 월드컵 4강에서 축구장을 수놓던 붉은 물결의 티셔츠 위로 휘날리는 붉은 태극기를.

그리고 신성불가침처럼 여겨져 온 그 태극기가 그 날로 알몸에 수놓인 바디 페인팅의 무늬로, 옷감으로 우리 몸에 입혀졌다. 그건 오래 축적된 태극기에 대한 우리의 복합적 욕구불만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는 태극기에 담긴 우리 자신의 피의 느낌을 진하게 맡아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처럼 태극기가 우리에게는 다르다. 심지어 딴 나라에 가서 바람피는 짓을“태극기를 꽂는다.”고 표현하는 민족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불량한 속어에 조차 핏줄의 냄새가 난다.

불과 그라운드보다 10인치가 높은 야구장 마운드. 그 10인치가 그 날은 얼마나 높아 보였던가. 거기 태극기가 꽂히는 순간 만큼은 에너하임의 마운드가 히말라야 정상과 같은 높이로 다가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1인치만 높이면 타자들이 맥을 못 춘다는 것이 투수 마운드. 일찌기 거기에 자기 나라 국기를 꽂은 이도, 그런 생각을 했던 이도 없었다. 적어도 서재응에게는 그 마운드가 고상돈이 바라본 에베레스트 정상의 높이와 같았을 것이며 그는 그곳을 완벽하게 정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9회말 일본의 세 번 째 타자인 다무라 히토시가 헛스윙을 한 순간, 서재응에게는 세계 야구 챔피언 나라의 심장부에서 미국을 이기고 일본을 두 번이나 이긴 벅찬 감정이 자신도 모르게 거기 태극기를 꽂게 했던 것이다.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겪은 소수민족 선수로서의 비애나 고생에 대한 복받치는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그런 그의 행위는 적어도 한풀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태극기에 키스를 했다.

만약 단지 미국에서 열린 어떤 대회에서 4강 또는 우승을 하고 거기 태극기를 꽂았더라면. 많은 미국인들조차 지금의 일본인 처럼“역시 한국이라는 나라는….”라고 폄하했을 수도 있다. 그날은 달랐지 않은가. 이미 자존심을 버린 세계 최강의 미국 선수들과 미국민들이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한국의 승리였는가. 그리고 전 세계로 중계된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미국, 쿠바, 일본 등 열강이 버티고 있는 야구의 세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한편으로 납득이 가는 상황이기도 했다.

자,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처음에 꺼낸 오버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날 서재응의 행위는“적절했으나 오버였다.”는 패러독스를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만약 거기에 일장기가 꽂혔더라면 우리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은 이미 그런 퍼포먼스를 할 모티브가 약하다. 우리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울 수도 있고, 세계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정서를 표출한 사건이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발산해야 할 그 무엇과 풀어야 할 응어리진 한이 많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세계 속에서 한국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단일민족이라는 특수성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볼 만한 시점에 서 있음을 숙고해 보자.

이제 세계 무대에서 벌어지는 한국인의 도약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우리는 그 변화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우리가 처한 위치를 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축구나 야구에서 조차 그렇다. 한류의 초강세와 쇼트트랙, 피겨 스케이팅까지도 반도체나 태권도의 신화를 이미 옛것으로 만들고 있다. 매일매일 뉴스를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신화를 새로 경험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태극기와 국가를 앞세우고 있다. CF에서조차 박지성은 애국가를 열창한다.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태극기를 흔들 필요는 없으며, 오직 조국을 위해서라는 일념으로 상황을 몰고 갈 것만은 아니다. 그럼 다른 대안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우문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 최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이미 최고에 도달해 있기도 하다는 것이 그 우답이다. 과시보다는 표적이 되는 것을 경계할 이유가 있다. 쇼트트랙에서나 황우석 사건에서나 반도체 덤핑에서도 우리는 이미 세계 최고라는 것의 부담스러움을 느끼고 있다. 한류가 뜨면 반한류나 성형의혹이 함께 뜬다.

앞으로 우리는 UN 사무총장도 배출하고 경제와 외교 등에서 지금보다 더 확고하게 세계의 중심부로 다가가야 한다. 스포츠와 대중문화로 세계 중심에 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다가가면 그토록 서재응이 지배하고 싶은 그 마운드의 중심이 우리에게도 한 자리를 열어 줄 것이다. 멀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은 서재응과“일본이 한 수 위”라고 한 김인식 감독의 말은 절묘한 희석상태를 보여준다. 역시 노장 감독은 중용의 미학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스즈키 이치로나 안톤 오노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강자의 위세를 부려서도 자만이나 과시를 해서도 안 된다. 한 때 도요타 자동차를 앞세워 미국시장을 점령한 일본이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록펠러 빌딩과 고가 미술품을 사정없이 매입하던 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자본력 앞에 무릎을 꿇은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본을 무너뜨린 건 미국만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을 일본의 두 번 째 패전이라고도 한다. 그날 이후 일본 경제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리고 1차 이라크 전쟁에서 CNN의 중계로 미디어 전쟁의 재미를 톡톡히 본 미국이 알카에다의 인질 참수 비디오로 간단히 무너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위협대상이 미국이든 유태인이든 일본이든 중요치 않다. 세계 최고의 앞에는 누구나 적이며 동지이고 위협은 늘 수면 아래 있는 법이다. 변방의 알카에다가 미국을 누를 수도 있다. 그래서 약자는 수명이 길고 강자는 단명할 수도 있다.

서재응의 애너하임 태극기 사건을 보면서 이보다 좀 더 세련된 표현기술은 없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세계의 몇 안 되는 단일민족 국가인 우리를 표현한다는 것. 색깔과 위험. 두 가지 문제가 늘 함께 간다.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은 여전히 우리 앞에 올라야 할 산이 높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서재응 식과 김인식 식의 중간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아직은 필요로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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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 2006-03-17 13:54:36
마운드의 태극기
미국가서 얼마나 서럽고 외롭게 메이저 리거 생활을 했으면,
그런 행동이 나왔을까.
이해된다. 돼.

돌출 2006-03-17 16:21:59
생각이 없어서 그러했겠냐?
암만 생각해도 잘 한건 잘한거다
언제 그런 날이 또 오겟냐? 태극기를 꼿은건 사실이고 태극기가 나풀거릴때 가슴이 뿌듯한 것 또한 사실아닌가 잘한 일이다.

컴친구 2006-03-17 17:40:48
좋은 지적 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한이 어린 민족의 표출이 언젠가는 중용과 포용의 미덕이 움트지 않을까요......

나라사랑 2006-03-17 17:49:29
마운드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를 꼿는것은 그만큼 나라 사랑이 크다는 뜻이여 왜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뭔 눈엔 뭐만 보인다고 잘하고 좋은 날 그런 행동도 못하면 혹 거시기 똘마니 아니여?

컴친구 2006-03-17 18:22:09
"특히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선 애너하임 에인절스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를 보고 말들이 많단다". 이런 말을 하는 일본인들도 자중해야 한다.그들도 야구의 종주국 미국을 이겼으면 이보다 더했으리라. 진주만도 선전포고 없이 포격했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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