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영 선생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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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영 선생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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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의학에 끼친 영향과 생애관

^^^▲ 과거 시절가난의 대를 물렸던 그 시절^^^
색갈론이 많이 대두되고 있다.
색갈론 속에서도 민초를 위했던 위대한 인물 "조헌영"을 찾아 보았다.
제헌국회의원이면서 한의학의 길을 열어 준 그의 한의학 적인 생애관을 찾아 보았다.

조헌영(1)이 우리나라 한의학계에 미친 영향

(국민의료법(법률 221호)에서의 한의사법 제정 과정)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이 되자 의사회와 치과의사회는 4년제 의학전문학교를 폐지하고 예과 과정을 두는 6년제 대학으로 개편하였으나 한방의료는 여전히 동양의학강습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의사회는 동양의학 강습소(1939년4월6일 동양의학협회창립총회)를 1946년 10월4일 인수하여 동양의학전문학원으로 허가를 받았고, 이어 1948년 3월 24일 4년제 동양대학관(동양의학과, 인문학과)으로 개편하였으나 한의사는 여전히 의생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1945년11월2일 조선의생회창립)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 법령 제1호로 보사. 행정업무를 사회부로 이양하면서, 1실 5국 22과를 설치할 때 보건국에 한방과를 두었으나, 1949년 7월 25일 정부조직 1차 개편 때 삭제되었다. 결국 이 때는 한국의 의료체계를 미국식 의료제도로 바꾸려는 시기였기 때문에 한의학을 유지, 계승하려는 민간의 노력이 있었지만 아주 미비했고 정부 기관에서조차 한방의료를 배제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49년 제헌국회가 개회된 후 1950년 보사부의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의사제도만 두고 한의사제도는 폐지한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사부안은 당시 제헌국회에서, 한의학계의 유일한 대변자였던 조헌영 의원의 "민족의학을 말살시켜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호소와, "5천 년 전통의 민족의학의 맥을 단절시킬 수 없다"는 진정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노력을 통해 법안이 폐지되었다.

당시 조헌영이 없었다면 아니 조헌영이 한의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면 현재의 한의사제도는 1950년에 사라졌을 것이다. (박용신-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의 글 참조)

법을 공부했던 입장에서 보면 법이란 모법보다는 시행령에 많은 무게를 둘 수 밖에 없구나란 생각을 가끔씩 갖게 한다. 이유는 모법(母法)의 발의는 각기 이익단체의 존폐가 몰리는 극한 상황을 종종 보이기 때문에 입법을 시행하는 의원들 입장에서 보면 입법, 사법, 행정부 및 압력 단체와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들에 곱지 않은 시선에 곤혹을 치루는 것보다는 시행령이라는 행정령을 동원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들 믿고 있어 이익대변자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하위법일수록 특히 시행령일수록 그 민감도가 더 하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2대 국회는 1대 국회의 선례를 받아들여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9월25일 “국민의료법”인 법률 221호로 한의사제도를 공포하게 된다.

일제시대하의 조선의료령에는 의사와 치과의사만의 종별과 자격을 규정하고 있을 뿐 의생은 구체적인 사항이 없어 기득권자만 인정하고 있었다. 해방 후 조선의료령에 따르면 의생으로 격하된 한의사들은 살아남을 길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1951년 국민의료법을 제정하면서 “제2조에 한의사, 제3조와 제8조에 한의원, 제13조에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나온 자로서 국가고시에 합격하여 자격을 획득하게 함” 이라 하여 한의사들은 의사와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의료는 양방의료와 한방의료라는 “의료이원화”의 틀이 갖추어진 셈이다.
이를 토대로 1952년 1월 30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규정이 갖추어짐으로써 한방의료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게 된다.

조지훈님의 유명한 ‘지조론’을 보자.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조지훈의 아버지가 바로 조헌영이다.

8.15 해방이후 한국 민주당(한민당)은 간부의 대다수가 일제의 한반도 점령시 친일 지주와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조헌영은 처음에 조선민족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고 다시 조선민족당이 한민당에 통합되자 조직부장을 맡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친미적인 이승만이 정권을 잡게 되자 마음에 상당한 갈등을 겪게 된 듯 하다. 조헌영은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민당으로 경북 영양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지만 곧바로 한민당에서 탈퇴하여 반민특위 특별법(2)을 제정하는 데 앞장섰고 '반민특위' 조사위원을 맡게 된다.

집권당에서 권력의 실세로서 충분히 자기의 영달을 꾀할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역사 앞에서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헌영은 어릴 때 200여 년간 지속된 남인학풍(3)을 따른 집안의 영향(三不借(4))과 의병활동을 했던 할아버지 승기(承基)와 아버지의 영향 속에서 사서삼경 등의 한학을 익히고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닌 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의학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한 결과라고 한다. 조헌영의 한의학 연구는 어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익힌 결과물로 보아진다. 이는 유학을 중시했던 당시의 조선선비들이 양생(養神과 養身)의 의학으로서 한의학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동의보감이 그 당시에선 지금의 해리슨(양방의학대사전)과 같은 책이었지만, 한의학적인 많은 오류들을 영문학도인 조헌영이 나름대로의 객관화, 과학화를 이룬 인물로서 평가해야 할듯 싶다. 또한 동의보감 자체가 민본들을 위한 국가적인 사업 의학의 전초물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의 한의학에 대한 열정은 민초 사랑의 결정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헌영은 와세다대학 재학중인 1927년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新幹會)의 동경(東京) 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하기도 하고, 1935년에는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큰사전편찬전문위원(5), 귀국하여 1929년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조선민족당·한민당 가입과 탈당, 무소속구락부 등과 같은 이력으로 보아 조헌영은 중도적 민족주의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민당을 탈당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은 그의 성향이 어떠한 지를 잘 나타내 준다.

일본의 경우 한방의학의 부흥을 위해 1934년(昭和9년) 젊은 醫師들이 중심이 되어 日本漢方醫學會를 결성, 월간지 한방과 한약을 간행한다. 조헌영의 경우는 1931년 신간회(6)가 해체된 뒤에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서 한의학 연구(東洋醫藥社 개설)에 몰두, 1930년대 조선일보 및 신동아(新東亞)에 한의학의 학술논문 및 연재를 통해 한의학 부흥을 위해 많은 글들을 기고한다. 특히 1934년도에 간행된 "통속한의학원론 및 동양의학사"는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게 된 동기가 된다. 또한 한의학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1947년에는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이라는 서적을 출판한다.

일본의 경우 1950년(昭和25년) 漢方醫學의 최고 연구단체인 日本東洋醫學會가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1945년11월2일 조선의생회창립단체가 만들어 졌을 뿐 한의사는 여전히 의생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이 한방의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이미 조헌영선생은 국가적인 관점에서 국민들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북한에서 한 행적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평양의과대학 동의학부에서 교수를 역임하면서 주로 한의학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동의보감'(7) 번역사업을 진행한다. 조헌영선생이 동의보감 등에 연연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生齒不繁(생이불번)”허준이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표현 말이다. 기근과 전쟁 그리고 역병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는 당시 조선 정부에서 가장 심각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8)
허준과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게 아닐까?

( 조헌영선생의 학술사상)

영문학도였던 그가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장단점을 통달했던근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1934년도에 간행된 통속한의학원론 및 동양의학사는 그의 학술사상의 일면을 엿 볼 수가 있다.

이 책에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을 비교 고찰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의 상대적 특징은, 綜合醫療(종합의료)와 局所處置醫術(국소처치의술), 自然療法醫術(자연요법의술)과 人工治療醫術(인공치료의술), 現象醫學(현상의학)과 組織醫學(조직의학), 靜體醫學(정체의학)과 動體醫學(동체의학), 治本醫學(치본의학)과 治標醫學(치표의학), 養生醫術(양생의술)과 防禦醫術(방어의술), 內科醫學(내과의학)과 外科醫學(외과의학), 應變主義(응변주의)와 劃一主義(획일주의), 平民醫術(평민의술)과 貴族醫術(귀족의술), 民用醫術(민용의술)과 官用醫術(관용의술)이다.

그는 이러한 논의를 통해 서양의학의 장점을 취하고 한의학의 우수한 점을 부각, 계승 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아마도 그는 가난한 민본들을 위한 의미에서 처음부터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의 의료를 구분하려 했을려는지도 모른다.

( 한의학에서 바라 본 일본 의학사)

해방 후 한의사제도 폐지 논란의 이유는 일본식 의료법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라 할 것이다.

지금은 영미법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해방전후 시대의 우리나라 법은 독일법 특히 일본법(9)이 그 근간의 무대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한방의학의 이해를 위해서라면 일본의 한방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이유는 법률적인 관계 때문이다. 해방 이후 의료법 전신인 국민의료법의 근간이 일본 의료법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일본 의학의 계통을 간략하게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한의학이 소멸된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학의 계통에 관한 부분적인 자료는 오현성(경희대) 한의사의 글을 인용하였다.

16세기 후반 도꾸가와이에야스(德川時代)가 네델란드(和蘭)와의 무역을 시행하게 되면서 서양의학이 和蘭醫方으로 바뀌게 된다. 이리하여 화란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학을 ‘蘭方’이라 하고 전래의 동양의학을 ‘漢方’이라 부르게 된다.

마에노료오타구(前野良澤)는 1771년 에도의 코즈가츠바라사형장에서 사체해부를 견학한 바 和蘭의 해부도해와 실제가 일치함에 경탄하여, 화란의 인체해부서를 번역, 가이타이신쇼오[解體新書](1774)를 간행하게 된다. 일본에 최초로 서양의학을 소개한 인물이다.(10)

1823년 나가사키(長崎)에 설치된 和蘭役館에 의원으로 부임한 지볼트(Siebold)는 서양의학을 일본에 전파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독일인으로서 안과. 산과. 외과에 정통하였는데, 당시 日本에서 쟁쟁한 醫人의 대부분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지볼트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한방의학의 멸망)

에도시대(德川幕府時代 1603년~1867년)가 亡하고 메이지유신(明治 1867년)이후(大正. 昭和) 한방의학은 점차 퇴락으로 기울어진다. 幕府부터 明治에 걸쳐서 한방의학은 에도醫學館을 근거로 하는 사람들이 주도하였으나, 幕府의 붕괴와 동시에 醫學館은 폐쇄되고, 이를 대신해서 西洋醫學을 배운 이들이 새로운 政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政權에 참여하게 된다.

메이지유신시대에 이르러 한방이 멸망한 이유는 한방의학 그것 자체가 치료의학으로서의 가치여하에 의하여 망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원인은 제도 때문이고 간접적으로는 서양을 숭배하는 시대 흐름에 휩쓸린 것이 최대의 원인이다.(11)

메이지유신 초기인 1869년 정부당국은 독일의학의 채용을 제안했고, 당국은 이를 승인, 1874년에 의제(醫制)를 포고하고, 다음 해 의료개업시험(12)의 실시를 공포한다.(13)

메이지유신 16년(1883년) 10월 23일에 太政官에서 의사면허규칙이 發布된다. 이 포고의 제35호 제1조에는 ‘의사는 의술개업시험을 받아 內務卿으로 부터 개업면장(開業免狀)을 득한 자로 한다.’라고 하여 이 포고 이전에 개업하고 있던 자는 기득권이 있어 다시 시험을 볼 필요가 없지만, 이후부터는 서양의학을 수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의사자격을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서양의학을 배우고 의사의 자격을 얻은 이상은 한방의술을 가지고 개업하는 것은 자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메이지유신 13년(1879년) 東京에서 山田業廣을 주축으로 한 溫知社가 결성(雜誌 溫知醫談 간행)되어 漢方존속을 도모한다.

그러나 1887년 溫知社가 해체되고 ,메이지유신 28년(1895년) 漢方醫 존속을 위해 의회에 제출한 법안이 27표 차로 부결되어 6여년에 걸친 한방존속을 위한 의회투쟁도 패배로 끝나고 만다.

(일본의 한방부흥을 위한 의사들의 노력)

1934년(昭和9년) 젊은 의사들이 중심이 되어 日本漢方醫學會를 결성.월간지 漢方과 漢藥 간행한다. 1950년(昭和25년)에는 日本東洋醫學會가 결성(한방의학의 최고 연구단체)된다.

1970년대 말(14) 일본에는 전국에 걸쳐 백여 개의 각종 東洋學연구단체가 조직되었고, 특히 의학계의 한방에 대한 관심도는 괄목할 만 하였다.(15)

한편, 일본정부가 건강보험에 한방제재를 채용하면서, 의사들이 한방의학연구회를 조성하게 된 것이 1978년 이래로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다고 한다.(16)

(일본 정부의 한방지원)

한편, 1976년 한약제의 ‘엑기스’가 건강보험에 채용되고, 1978년에는 더욱 많은 ‘엑기스’제가 藥價基準考試에 수록된다.(17)

1976년에 43종의 한방 浸膏․顆粒제재가 채용되었는데, 1982년에 이르러서 이미 150여종에 이르게 된다. 1979년 11월 일본정부의 科技廳에서는 한방의학 기초임상종합연구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정식으로 제정하고, 1980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또한, 1988년 일본정부 과기청은 1988년도 과학기술진흥조정비를 운용하여, “동양의학의 과학적 설명과 관련된 조사”를 진행시키기도 하였다.(18)

(우리나라 한의학의 입법과정)

한의학 발전의 저해는 여러 원인들이 있었겠지만 주 원인은 앞서 보았듯이 서양의학에 대한 기대치(일본)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해방(우리나라) 그리고 친일위정자들의 역사왜곡과 베껴 쓰기 법률(국민의료법)이 한 몫을 더 한데다가 절름발이 한의학(침구사제외)으로 만든 당시의 주변 여건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그 당시 입법 과정에 조헌영선생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독립운동가, 한학자, 한글학자, 한의학자, 영문학도, 정치가 그리고 나라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한의학을 입법권 반열에 올린 열정의 가치는 아마도 허준을 닮은 민본 사랑으로 본다면 조헌영선생 만큼 한의학을 이해하는 이도 그리 많진 않을 것이다.

다음은 입법권에서 조헌영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이후의 입법과정이다. 1951년9월25일 한국전쟁의 와중에 「국민의료법」(법률 제221호)으로 제정 공포된 내용 중 일부 특이한 사항들이다.

우선 의료업자는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보건원. 조산원 간호원의 3종으로 구분하고 있다란 점과 지금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약사법이 1953년도에 들어서야 약사에 관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 졌다란 점을 들 수 있고, 1962년 3월 20일에는 국민의료법의 명칭이 「의료법」(법률 제1035호)으로 개정되었는데, 이와 함께 변경된 내용으로는 의료기관의 분류가 의원 이상 급을 중심으로 보다 세분화되어 종합병원, 병원, 의원, 치과병원, 치과의원, 한의원으로 구분되었다란 점이다.

특기할 사항은 한의사의 자격 및 응시자격 규정으로서 국공립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과정 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하고 있다.

이 조항은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통합을 꾀한 흔적으로 볼 수 있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유아무아로 넘어 가면서, 이후 바로 법이 재개정됨으로써 두 의학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지금의 양방의학이 가장 아쉬워하던 부분 중의 하나다.

(한국경제성장과 한의학의 부흥)

1977년 100억불 수출 달성, 1975년을 계기로 남북한 경제 지표 역전, 1980년대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한국사회의 경제는 이른바 3저 현상 낮은 금리, 달러, 유가의 호기를 타고 경제 호황을 누리기 시작.수입 자유화, 해외여행자유화, 여간 통행금지 폐지, 교복 자율화 등 민심을 무마하기 위한 잇단 자유화 조치와 함께 본격적인 “대중 소비 사회”가 도래하기 시작한다.

종전의, 절약과 저축대신에,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19) 가장 호황기적인 한의학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대중소비의 최첨단에는 보약이라는 미명하에 한의학 관심도 급증과 묻지마 처방(비방)도 한 몫을 더했다.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은 기아(饑餓) 문제에서 비만(肥滿)을 걱정하는 단계 에 이르고,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수여국으로 변화하면서, 사회 보장 제도의 확대 및 여가의 증가와 자가용의 보급과 해외여행 자유화로 이루어진다. 또한 국민 생활면에서는 삶의 질을 중시하고 자연 환경과 조화되는 삶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문제점은 이렇게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변화하고 있는데도 한의학은 기득권에 안주하면서 조헌영선생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과학화, 논리화에서 벗어난 채 경제 논리만을 내세우고 있었다. 반성의 논리는 대중소비에 따른 한의학 호황을 한의학의 위대성에 두고 있었다란 착각들이다.

(조헌영선생의 공(公)과 과(過))

제헌국회의원이면서 헌법기초위원이기도 했던 조헌영선생은 입법과정에서 한의학 발전을 위해 길잡이 역할을 하였지만 반대로 한의학법이란 법률적인 테두리 없는 절름발이 의료를 양산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민초들을 위한 한방의학이 이익집단체의 기득권에 걸려 법이 민초들을 위한 장애가 될 줄을 그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1980년대 이후 경제발전에 따른 한의학의 부흥을 이익화 즉 자본화 되어버린 의료산업을 조헌영선생은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자본주의의 대세론을 보아 오면서 많은 회의감을 갖지나 않았을까? 국가대계를 위한 동의보감, 의림촬요 등의 번안 후에 나타난 의료의 한의학화가 아닌 의학화에 무척 몰두했던 것으로 보아 짐작을 할 수 있다.

국가를 위했던 그의 민족적인 이상주의가 법이란 이익집단체의 걸림길에서 또 한번의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1975년을 정점으로 하여 남북한의 경제지표인 GNP의 역전을 보면서 조헌영선생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자본주의에 회한을 느끼셨던 분의 입장에서...1975년 이후부터는 그의 도전적인 행적들이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도 그의 시대적인 착오의 한 단상이 아닐까 하는 연민의 정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상적인 체계를 넘 볼만큼 글쓴이의 식견도 없을 뿐 더라 다만 그가 한국한의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했음을 상기 시키고자 할 뿐이다.


(조헌영선생의 반민특위)

과거사청산은 현 정부의 일관된 구호다(20). 과거사법은 친일인사 및 군사독재 당시의 탄압사례 등에 대한 조사다.

친일인사의 경우를 보면 해방 이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조헌영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2005년8월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의 명단 발표는 광복 이후 60년 만에 처음으로민간기구에 의해 이뤄진 대규모 '친일파 청산'작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민간 연구단체인 이들은 한결같이 화해를 강조하면서도 반민특위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말한다. 친일파의 기준에 대한 한국 학계의 공식 잣대는 아직까지 없다. 다만 해방 직후 제헌국회에서 시도했다 좌절된 반민특위의 기준과 처벌규정만이 있을 뿐이다. 윤 위원장은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한 과거사 정리일 뿐이다고 말한다.

북한의 경우를 보자.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21)을 채택, 친일문제를 척결해 나갔으나, 그러나 친일파 척결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친일파가 기관과 단체의 간부나 애국자로 둔갑하기도 했던 것으로 조선전사(북한의 역사서)는 기술하고 있을 정도이고 보면.

그러나 이 규정에는 부칙 " 이상의 조항에 해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해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는 면책조항을 둠으로써 중도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헌영선생에 대한 평가)

조헌영선생은 한의사로서 살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나라를 사랑한 정치가이자 지식인으로서 살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분이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한의학을 위해 애썼다는 것 자체를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다. 조헌영선생은 일제시대와 해방 후 혼란한 시대에 후세의 사표가 될 만큼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한방의료 제도를 정립하는 데도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정치적 격변기에 조헌영선생이 한 선택은 역사적으로 훌륭하게 평가받아야만 한다. 조헌영 선생의 기록은 일제시대와 해방 후 미군정기의 역사적 상황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준다.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반추하게 하고 한의사로서 정치인으로서 일생을 고스란히 자기의 뜻을 지키면서 살다간 한 분의 사표를 보게 된다. 조헌영 선생은 그 누구보다 훨씬 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하기에 새로 건립된 한의사협회 회관에 흉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박용신-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의 글 참조)또한 묻혀있는 선생에 대한 많은 자료들이 나타나길 빌어본다.

[조헌영선생에 대한 약력]

(1) 趙憲泳(1900~1988)경북 영양출생.
민족운동가이며 근대 한의학 개척자로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응문(應文), 호는 해산(海山)이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법부 영문과 졸업. 일본 유학시절 재일본 동경 조선유학생 학우회장. 신간회 동경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하기도 하고,1935년에는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 큰사전편찬전문위원.

1945년에는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 역임.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의 제도권진입을 위해 노력, 1950년 6.25전쟁 기간에 납북.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과 1980년 7월 서기장을 맡았다. 1988년 5월 23일 사망.

저서로는 通俗漢醫學原論(통속한의학원론), 民衆醫術理療法(민중의술이료법), 肺病治療法(폐병치료법), 神經衰弱症治療法(신경쇠약증치료법), 胃腸病治療法(위장병치료법), 婦人病治療法(부인병치료법), 小兒病治療法(소아병치료법), 東洋醫學史(동양의학사) 등.

(2)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란 일제강점기 36년간 자행된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헌국회에 설치되었던 특별기구.

(3) 남인학풍의 학파는 주로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들로서 맥을 이어왔는데 ,주로 인격수양과 도덕을 중시하고 국권강화를 통한 민생안정 추구.

(4) 財.文.人으로 이루어진 삼불차는 남인학풍의 뿌리인 동시에 영남지역의 보수성을 대변해 주는 가풍이기도 했다.

(5) 조선어학회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통해 우리 겨레의 얼을 빛내어 문화적 독립에서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고 그 첫 사업이 사전편찬이었다.

사전을 편찬하려면 그 기초사업으로 한글의 맞춤법이 통일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표준말을 제정하여야 한다. 표준말을 제정하기 위하여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는 세차례에 걸쳐 표준말을 사정하였고, 1936년 10월 28일에 사정한 표준말을 공포하였다.

조헌영은 1935년 8월 5일부터 현재의 우이동 봉황각에서 열린 제 2독회에 경북지방 대표로 참여하였고 수정위원회에도 참가한다.

(6)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이념을 초월하여 결성한 항일단체였다.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강령으로 내세웠다.

신간회는 전국 순회강연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일제 식민통치의 잔학상을 규탄하였다. 수재민 구호운동, 재만동포 옹호운동 등의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농민운동,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과 내부의 이념 대립에 의해 1930년대 초에 해체된다.

(7) 현재 우리나라에 출판되어 있는 여강출판사의 '동의보감' 번역본은 1962년 북한의 의학출판사에서 조헌영 선생을 중심으로 번역하여 간행된 것을 1982년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다시 번역하고 간단한 주해를 달아 다섯권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다시 여강출판사가 1994년 5월 재조판한 것이다. 또한 '의림촬요'를 번역하였는데 이 책은 동의 임상치료 편람식으로 만든 것으로 명종 때 정경선이 편찬하고 양예수(허준의 스승)가 교정한 것이다.

(8) 허준의 동의보감연구, 김호지음, 일지사, 80쪽, 2003.

(9) 한일합방의 원흉으로 안중근의사에 의해 저격당한 인물로서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 1882년 유럽으로 건너가 독일헌법을 연구하고 돌아와 일본제국의 헌법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1885년 일본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헌법을 완성 공포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정치구조를 만든다.

(10) 이웃나라 역사(일본편), 한주 ,2000.

(11) 漢方醫學, 大塚敬節 著, 朴鍾甲 譯, 동양종합통신교육원출판부, 1988년 重版.

(12) 의사가 되려면 반드시 다음의 시험과목에 합격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전기시험과목, 제1 물리, 제2 화학, 제3 해부학, 제4 생리학, 후기시험과목, 제1 외과학, 제2 내과학, 제3 해부학, 제4 생리학, 제5 과학, 제6 임상실험.

(13) 日帝侵掠에 의한 韓方醫療制度閉絶에 관한 硏究, 신중완.박찬국, 경희대학교대학원석사, 1909.

(14) 日本史 101 장면, 강창일. 하종문, 가람기획, 1998.

(15) 當時 통계로는 동양의학연구단체가 32개 회원수는 13,357명 이외에도 지방단체, 특수단체, 지방연구회, 대학연구실, 私塾集會의 회원까지 합하면 동양의학연구기관과 관련된 회원 수는 21,700여명이다.

(16) 日本漢方醫學, 潘桂娟 樊正倫 編著, 中國中醫藥出版社, 1994, 北京.

(17) 日本漢醫學의 變遷史에 관한 硏究, 이금준. 홍원식, 경희대학교대학원 박사, 1982.

(18) 日本漢方醫學, 潘桂娟 樊正倫 編著, 中國中醫藥出版社,1994, 北京.

(19) 한국의 연쇄살인, 표창원지음, 랜덤하우스중앙, 2005, p.128~129.

(20) 현 정부의 정체성 이슈가 되고 있는 4대 입법개혁안들이다.
첫째, 과거사법 둘째, 국가보안법 폐지안, 형법개정안 셋째, 언론관련법 넷째, 사학관련법.

(21) 15개 항으로 이뤄진 이 규정이 밝힌 친일파 기준은 ▲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 및 그 관계자 ▲ 귀족칭호 받은 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및 고문.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 중의원 의원 ▲ 악질 고관(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 사상범 담임 판사. 검사 ▲ 민족 및 계급해방운동 참가 민족운동자. 혁명투사 학살 또는 박해자, 방조한 자 등이다.

▲ 일제에 의해 임명된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일진회, 일심회, 록기연맹, 대의당, 방공단체 등) 간부 및 그에 관계한 악질분자 ▲ 군수산업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 조달책임자로 악질적인 분자 ▲ 일제 행정. 사법. 경찰 기관과 관계를 맺고 만행을 감행해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 악질분자 등이 포함됐다.

▲ 일제 행정. 사법. 경찰 부문 관. 공리로 원한의 대상으로 된 악질분자 ▲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며 지원병. 학도병. 징용. 징병 제도 실시에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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