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에 펼쳐진 미로
스크롤 이동 상태바
반상에 펼쳐진 미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 너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我有一鉢囊 無口亦無底 受受而不濫 出出而不空
(하나있는 내 바랑이는 열린 입도 없고 빠진 밑도 없네.아무리 담아도 넘치지 않고 아무리 내줘도 비지 않고.)

- 법장의 홈페이지에서 -

바둑을 두다가 귓볼이 달아올랐다면 부끄러움 때문일까, 화가 난 것일까. 지금부터 160년 전 일본의 명인(名人) 인세키(因碩)와 슈사쿠(秀策) 사이에 이적지수(耳赤之手)가 기록으로 전해진다. 인세키가 어느 한 부분을 추궁한 수를 놓자 이에 대응한 슈사쿠의 착수는 사방을 굽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면의 기보를 들여다보면, 과연 명성에 걸맞은 슈사쿠, “오직 한 수”라는 감이 온다. 그러나 이 타이밍에서는 최선의 수를 찾아낸 슈사쿠 보다 여기에 부끄럼을 탄 인세키의 이미지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처참하다기보다 오히려 아름답다, 정상에 홀로 선 자의 처절함이.

바둑판은 기껏해야 가로세로 19줄이 교차한다. 그리고 그물 같이 361개의 매듭과 324개의 뚫린 칸이 있을 뿐이다. 흑과 백의 돌이 교차하며 361개의 그물코 가운데 어느 하나를 차지한다. 빈 그물코에서 봤을 때 돌이 갑자기 출몰하여 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빈 자리는 단 하나의 돌만을 받아드린다.

전자(electron)가 그렇다. 바둑판같은 에너지공간에 먼저 빈자리(vacancy)가 주어진다. 전자는 모두 같으나 에너지만 각각 다르다. 이때 하나의 전자는 자신이 지닌 에너지상태에 따라 정해진 빈자리를 차지한다(employed). 에너지공간은 다만 바둑판보다 더욱 복잡한 구조를 가진 것이 다를 뿐이다.

한 판의 바둑은 흑과 백이 각각 가로와 세로로 울타리를 넓히고, 최종적으로 더 크게 영토를 확보한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흑과 백은 반상에서 공존하나 승부가 가려지면 생멸이 엄숙하게 나뉜다. all or nothing!

바둑판 평면은 정사각형 대칭을 가지고 있다. 바둑판의 좌표를 정할 때 원점으로 네 귀 중 어느 한 코너를 잡는다. 수학에서는 원점이 “0”이지만 바둑판에서는 자연수 “1”로부터 시작한다. 몇 개의 예를 들면 삼삼(3, 3), 소목(3, 4), 화점(4, 4), 외목(3, 5), 고목(4, 5), 오오(5, 5) 등이다.

19줄로 닫힌 바둑에서 통상 3선은 실리선, 4선은 세력선이라고 가르친다. 가령 흑돌 52개가 모두 3선으로, 백돌 44개가 모두 4선으로 각각 둘러쳤다고 하면, 흑집 140집, 백집 121집이 각각 계산된다는 근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돌 하나당 차지한 집은 백이 조금 더 효율적이다.

17세기 초 일본의 패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정책적으로 바둑을 국기(國伎)로 장려했다. 당대 불세출의 명인 도샤쿠(道策 1645-1702)의 수나누기(手割論) 해석에 따라 바둑의 수법은 구체적인 논리로 설명되었다. 문용직(五段, 정치학 박사)은 도사쿠를 기점으로 싸움 바둑에서 구조주의 바둑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것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19줄에서의 포석이론이 출발하였다.

구조주의 포석은 3선의 소목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귀에서 변으로 확장하고, 그 다음 중앙으로 뛰었다. 이것은 일본의 근대바둑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혼인보(本因坊) 가문의 전통이었다. 그들은 중앙으로 답답한 삼삼이나 실리에 허황된 화점은 포석으로 나쁘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구조주의의 낡은 이론은 1930년대 우칭위엔(吳淸源)의 4선과 중앙을 중시한 신(新) 포석에 의하여 깨어졌다. 한 점으로 귀를 확보하는 삼삼과 변신이 빠른 화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천재의 안목을 통하여 범인들은 깨닫게 되었다. 이어 1970년대 변의 포석을 중시하는 중국식, 1990년대 마침내 중앙으로 향한 다케미야의 우주류 포석으로 모더니즘 바둑이 완결되었다.

21세기 들어 스피디하고 두터운 한국바둑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열었다. 그런 한류 뒤에는 눈물로 부끄러움을 대신 지는 추기경의 기도가 있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기획특집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