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정책에 內在된 思想性
어문정책에 內在된 思想性
  • 朴京範
  • 승인 2003.03.20 15:0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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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전용은 평등을 제일로 하는 좌파이념에 근거

공산주의 혁명의 첫걸음은 그 땅에 전래되어온 문자의 개혁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문자와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이미 논의되어 왔던 자료들을 論議의 출발점을 높이기 위하여 게시한다.


한국논단

작가 李文烈과의 對談(1999/2)

대하소설 <변경>을 完刊한 작가 李文烈


12년만에 會心의 力作 <변경(邊境)>을 완성한 국민작가 李文烈.
本誌의 <잃어버린 세대>의 작가 朴京範이 그를 만나 최근의 우리사회의 사상적 혼란에 대한 우려의 뜻을 교환하고, 올바른 사회 가치관 확립을 위한 그의 견해를 들었다.
大作家와 新進作家는 文人으로서 우리의 어문정책과 출판관행의 문제가 국민들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제까지 우리의 문학에서 논의가 禁忌視 되었던 한자혼용과 세로쓰기에 대한 심층 분석적인 토론을 함으로써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문화적 상실을 일깨우고, 左右의 개념을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左右同居 사회에서의 左派 혹은 右派라고 불리는 이들의 올바른 처신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작가 李文烈씨는 얼마 전 대하소설 '변경(邊境)'을 完刊했다. 李文烈씨는 그의 영향력에 反하는 세력에게서 혹은 그에게 기대하는 바를 얻지 못한 세력에게서 크고 작은 비판의 화살을 받고 있으나, 크게 보아 이 시대 韓國民이 그와 같은 작가를 가지고 있음은 다행이라 하겠다.
大役事를 치르고 난 그는 이제 다소 여유를 즐길 법도 한데 요즘 더욱 心思가 복잡하다. 바야흐로 이념혼란의 시대가 도래하여 국민의 사상을 啓導(계도)할 이들의 책임이 요구되는데, 그 중추적 흐름이 결코 자신과 조화롭게 보이지를 않기 때문이다.
世紀末 歲暮의 쓸쓸함 속에서 나는 경기도 이천의 負岳文院으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이미 몇 번의 相面이 있던지라 곧바로 공동의 관심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朴京範 : 저는 어릴 적에 서기 二千年에는 도시마다 거대한 半圓의 유리 돔이 덮이고 유리管에 싸인 모노레일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람들은 은빛 우주복에 비행접시를 타고 달나라를 여행하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은 혼자의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달 여행의 감격에 들뜬 1970년 연초 라디오방송에서도 1980년의 가족 달나라여행을 그렸었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날 인류 생활의 總體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二千年이 다가와도 사람들은 섬유옷을 입고 다니며 변두리 주택가 녹슨 철문 옆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이고 있습니다. 인류생활의 변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진다고들 했고 과거 수천년의 변화가 오늘날에는 불과 십년 사이에 이루어진다고들 했는데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앞의 손바닥은 먼 곳의 태양보다 크게 보이는 법인데요. 우리는 변화에 대한 강박감 속에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점진적 발전으로는 성에차지 않아, 뼈대와 틀을 갈아치움으로서 進步의 幻覺을 즐겼던 것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번 완간된 '변경'에 이전 어느 작품보다 큰 의미를 두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변경'에 두시는 특별한 의미는 무엇인지요? 그리고 현재의 시국을 보시는 입장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하신지요?

<변경>은 나의 자기 찾기

李文烈 : '변경'은 12년 전부터 쓴 작품입니다. 물론 12년간 <변경>만을 쓴 것은 아니지만 12년간의 게으름을 근래 三四개월 동안 보충하고 瑕疵(하자)를 보완하여 이번에 완성한 것입니다. 큰 일을 마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현재 저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지금 정치 경제 사회에 상당한 변화가 생기면서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아직은 그 영향이 그곳에 머물러 있지만 결국 문학에도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내가 우울하고 걱정스러운 것은 또다시 우리의 현실이, 역사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 중 변증법의 正反合에서의 反의 상황에 있게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간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나아가는 合의 과정이 아니라 새로이 갈등과 대립이 증폭되어 가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난날동안 지켜왔던 가치에 反하는 주장들이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合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것을 치러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전례 없이 독자와의 대화나 사인회 등에 참석했습니다. 이런 때인 만큼 작가로서 정신적인 힘을 얻으려면 아직까지 독자들에게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결국 그것은 책의 판매 부수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변화에의 대응, 단적으로 말하면 싸움입니다. 그를 위한 바탕이 되어주는 기세를 얻기 위해서도 더한층 독자에게 밀접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변경'이란 작품은 내 家族史라지만, 실제로는 나의 자기 찾기에 해당하는 부분이 많아서 전에 없이 그 호응과 판매에 관심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외 앞으로의 일에는 큰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지금 저의 오십이란 나이는 늙었다고 하기에도 고약하고 젊다고 하기에도 고약한 나이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고 해오던 일을 끝내기도 모호합니다. 이 시점에서 문학의 세계화를 염두에 두고 많은 것을 새로 시작하느냐 아니면 이미 이루어놓은 것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느냐의 갈림길에 있으면서 어느 것도 분명하게 결정이 안되고 있습니다.

좌파임을 자랑하는 시대

朴京範 : 선생님께서는 정치경제가 문학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하셨지만 따져보면 문학이 애초에 원인제공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李文烈 : 그렇죠. 원인을 따져보면 문학이 먼저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영향이 아직 제도화되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流血이 없고 국경충돌이 없을 뿐이지, 몇 가지 是非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습니다. 崔章集교수 논쟁도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한발 물러서 보면 거의 혁명적인 일입니다. 법원의 개입은 어떤 사건해석의 방식이라든가 한 개인의 권리침해 같은 것에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國是를 이루는 이념에 대한 판단주체를 맡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 판결은 대중적으로 보면 법원이 내용까지 최 교수를 편들어 준 것 같아 보입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것은 굉장한 혁명이 일어난 것이죠.

朴京範 : 저는 70년대에는 소수에 그쳤던, 학생의 의식화가 80년도 봄을 계기로 학생대중에 널리 퍼진 과정을 보았습니다. 80년대 졸업 세대는 특별히 운동권이 아니라 해도 그 이후 '再의식화' 되지 않는 한에는 '의식화的'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대가 사회의 중견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지금 그 '의식'은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번 법원의 판결도 그 영향권 아래 있다 봐야 할 것입니다.

李文烈 : 崔교수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여태까지는 많은 지식인들이 이중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지요. 左를 주장하는 것에는 피해가 따랐기 때문에 명백히 左이면서도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서...'라고 위장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좌파를 자랑하는 시대가 됐는데, 지식인들이 정직해져야 하겠습니다.

朴京範 : 북한에 반대한다고만 하면 아무 문제없는 것 같지만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극단적인 예로 남로당을 재건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당연히 저들을 배신하고 숙청한 북한을 적대시하겠고 남한에서 먼저 적화가 되어서 북한의 세력을 흡수하여 사회주의 통일국가를 이룬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겠습니다.

李文烈 : 정직하지 못함은 左뿐 아니라 右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반공으로 위장한 일이 많았습니다. 右派라면 반공이니 애국이니 하면서 막연한 구호로 그치지 말고 정말 우파적 사고가 무엇인가 알려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思考해서 이렇게 행동이 나왔다. 그래서 우파라고 불러다오.'식으로 밝혀야 하겠습니다. 左派도 단순히 북에 반대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그 주장하는 바의 원리가 무엇인가 체계를 세워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원리 명백히 해야

朴京範 : 保守와 進步에 대한 이해가 일반에게 퍽 부족합니다. 보수는 그대로를 선호하고 진보는 발전을 추구하는 양 오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을 내딛는다(進步)는 것이 반드시 더 좋은 곳으로 옮김은 아닐 것입니다. 판단의 눈을 가리면 물 속으로도, 낭떠러지로도, '進步'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李文烈 : 보수와 진보는 현재를 보는 두 가지 태도일 것입니다. 현재의 제도와 문화가 악당들이 저네들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 혹은 어쩌다 강자의 자리를 차지한 바보들의 실수의 결과인가, 아니면 지나온 세월동안 갈고 닦여 이루어진 최선의 것인가 하는 관점입니다. 물론 역사상 어떤 제도는 폭군이 다수를 억누르려는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습니다. 문화의 어떤 부분도 우연의 산물이거나 바보들이 장악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뿐인 삶에 관계된 것을 함부로 바보와 악당에게 내맡기지는 않습니다. 많은 것은 同意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랜 세월 끝에 이루어진 현재의 완전성을 최소한의 타당성마저 믿지 않는다면, 역사를 전부 바보와 악당의 역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의 주장에 깔린 것은 현재에 대한 不信입니다. 현재를 부수거나 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가치부여는 필요합니다. 현재를 완전히 믿는다면 문화의 발전이 멈추거나 더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은 과거의 産物인 현재를 모두 바보와 악당에 의한 결과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過去否定은 식민 사관입니다. 과거사의 잘못이란 과거 지배계층의 잘못이지요. 그래서 덕볼 사람은 우선 식민세력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위한 자리가 생기니까요. 다음은 이제까지와 전혀 이념을 달리하는 세력입니다. 민중에 의한 새 세상을 추구하는 세력이라고 할까요. 재미있는 것은 식민사관과 민중사관이 서로 일치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정치적 프로파갠더로서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앞의 사람을 부정할 수는 있겠지만, 민족 민중 하는 사람들이 너무 구시대를 부정하면 결과적으로 식민 사관에 따르는 것입니다.

朴京範 : 진보 운동권들은 친일파를 가장 죄악시하면서 일제를 부정하지만, 오히려 많은 것을 답습하는 것 같습니다. 소설 太白山脈에는 日帝末의 식민지교육의 陰謀를 폭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日帝는 韓國民을 皇國臣民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시켜야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년이 되어서도 충성을 바치리라는 기대로 교육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릴 때 세뇌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장기의 많은 혼란을 惹起(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李文烈 : 어떤 기자가 상당히 편파적인 보도를 하기에 그것을 지적해주었더니 하는 말이, '예전에 우파에서 그랬지 않았느냐'고 하더군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法 中에서 제일 원시적인 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同害報復입니다. 이 시대가 진정 진보적이라면 예전 상황을 반복 않아야 할 것입니다.

朴京範 : 진보의 의미를 문제의 改善으로 보느냐 피상적 反轉으로 보느냐에서 선생님과 그 기자의 관점의 차이가 있군요. 보수와 진보가 과연 우익과 좌익하고 일치될 수 있을까요? 두 쌍의 용어는 그 의미를 穿鑿(천착)하지 않고 대강대강 쓰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혼용되고 있지만, 사실 같은 용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李文烈 : 진보적 우익도 있고 보수적 좌익도 있겠죠. 보수, 진보는 태도의 문제이고, 우익과 좌익은 어떤 내용이 있을 겁니다.

朴京範 : 총체적인 視角의 균형이 잡혀진 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는 어느 한쪽만 존재한다면 올바른 것이 아니고, 改善을 강조하면 진보이고 補完을 강조하면 보수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右와 左는, 正과 邪, 白과 黑, 明과 暗과 같은 구분이 아닐까요. 우리 나라에서는 用語上 보수와 우익, 진보와 좌익은 거의 일치한다고 봐야 하는데, 진보는 마치 발전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의 진보세력은 하층계급과 소외된 자를 옹호한다는 구실 하에, 향상의 노력을 않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李文烈 : 하향평준화이지요.

朴京範 : 예, 우리의 어문정책과 출판관행 등이 결국은 오늘의 정치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변경>이 최근에 <떠도는 자들의 노래>의 제목으로 신문에 연재될 때, 漢字를 밖으로 하고 한글표기를 괄호 안에 한 것을 보고 저는 긴장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나라에도 진정한 창작표현의 자유가 이루어질 曉示(효시)가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다음 호에는 다시 관행대로 漢字가 괄호 안에 들어가서 그대로 물거품이 되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는 다시 漢字가 앞으로 나오고, 여러 번 거듭 하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더군요.(웃음)

李文烈 : 우리 나라의 문화는 성숙을 지향 않고 하향적으로만 통합하려 합니다. 다수만을 지향하고 자본주의 소비원리에만 충실합니다. 고급화를 추구하려해도 이용자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이용자를 형성하려는 노력도 거의 없습니다. 젊은이 하면 아주 좋은 뜻으로만 사용되고 있죠. 그러나 거기에는 未熟하고 실수를 잘 저지른다는 우려의 뜻도 있는 겁니다. 세계나 인생에 대해서 더 보고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성세대가 그들의 눈치나 보고 아첨만 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입니다.

버팀목 없는 우리 문학계

朴京範 : 예전에 서울대에서 <열린음악회>를 개최한다고 하니까 서울대 음대 교수들이 순수음악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대하여 무산된 적이 있었습니다. 음대교수들의 권위주의가 심하다고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민정서의 중심을 세우기 위하여 문화의 중추에 있는 분들의 龜鑑(귀감)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학은 그런 중추세력의 존재가 매우 약한 것 같습니다. 팝송만 좋아하는 중고생은 聲樂을 들으면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약간의 음악 교육을 통해 성악이 인간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함을 알게 됩니다. 고급문화는 어느 정도의 훈련과 적응과정이 불가피합니다. 일개인의 자연성장과 선택에만 맡긴다면 원시문화에 머물 뿐입니다. 소설에서 漢字를 최대한 억제하다가 가끔가다 피치 못해 괄호 안에 쓰이는 漢字는 읽기에 불편을 줄 것입니다. '必要', '正體' 등 한글로 써(書)도 뜻이 통할 말을 자연스럽게 漢字로도 쓰면서, 일단 漢字混用의 문장해석체계를 머리 속에 띄워주어야 조금 어려운 漢字말이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漢字를 괄호에 넣을까 말까하는 따위의 문제로 골머리 앓는 것은 우리 作家들의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요즘 환상소설이라고 많이 나오잖습니까. 그런데 몇 장 들춰봐도 외국과 수준차이가 납니다. 우선 등장인물의 이름이 엉망입니다. 외국의 소설은 인물의 이름을 지어도 뜻이 있는 낱말로 성격을 풍자하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른바 환상소설은 아무런 뜻도 없이 영어발음 흉내내는 이름들로 채워져 있으니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청소년들은 사고력이 뒤쳐지게 됩니다. '변경'은 한 질이 12권이나 되는데 만약 漢字를 괄호에 넣지 않고 손바닥만한 세로쓰기의 버전을 만든다면 제작비가 半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진작가로서 경제적 여유가 많지 않은 저도 全卷을 구입해 볼 수 있겠습니다.(웃음) 한글전용가로쓰기가 많이 팔린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독자들마저 불필요한 종이 값을 지불하면서 독서능률이 떨어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지요.
李文烈 : 자본주의사회의 비정한 법칙이죠. 조금만 차이나도 팔리는 쪽으로만 통일하죠. 수익성이 떨어지는 방식은 도태되고 마는 것입니다.
朴京範 : 그런데 그보다는 자본주의원리를 가장한 이념적 所信의 영향이 보입니다. 思想을 받아들이면서 눈길을 상하로 끄덕이는 세로쓰기와 달리, 좌우로 흔드는 否定의 습관이 배일 듯한 가로쓰기는, 애초에 이 사회의 제도문화를 토대부터 바꾸려고 하는 세력에게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李文烈 : 상호 악순환이죠. 가로쓰기는 처음 일부 출판사에서 독자에게 맛을 보였는데 결국 독자가 가로쓰기가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고. 실제로 70년대에는 세로쓰기가 우세했습니다. 소설은 거의 세로쓰기였고. 그런데 80년대에 이르러 가로쓰기로 판도가 바뀌었지요. 그리고 교육과정은 예전부터 전부 가로쓰기였고 교육이 끝난 후의 사람을 위한 책만이 세로쓰기였죠.
朴京範 : 일본과 대만은 세로쓰기로 국어교육을 실시하는데 해방 후 한국이 북한과 중국공산당의 경우와 같게 교육을 했다는 것은 그때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李文烈 : 혼란이 있었지요.
朴京範 : 예, 그때부터 이념혼란의 싹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 후 80년대의 운동권 출판사들이 강한 의지를 갖고 밀어붙였고,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출판사들도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고, 가로쓰기가 더 잘 팔리다보니 겉잡을 수 없이 도미노가 일어난 것이라 생각됩니다.
李文烈 : 세로쓰기와 가로쓰기의 지향을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저는 꼭 공식으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보라는 것은 교육적이고 宣傳的인 입장이라서 다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편하게 하는 쪽으로 나아가려 하고, 보수라는 것은 그전의 양식에 대한 존중도 있지만 본래부터 煽情性(선정성)이 강하지 않습니다. 진보 측에서 가로쓰기를 내세울 때에도 보수 측은 당분간 차분하게 나아가다가, 결국 못 견뎌서 모두들 가로쓰기로 변했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이후의 문화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생각해 봅시다. 어느 쪽이 문화의 양식으로서 더 효과적인가 지금 세밀한 자료가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로쓰기가 읽기 편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은 옆으로는 착시가 잘생기지만 위아래로는 착시가 잘 안 생깁니다. 그래서 가로쓰기는 여간해서 딴 줄로 옮아가지 않는데 세로쓰기는 깜빡하면 옆줄로 가버릴 수 있죠. 그렇다면 가독성 면에서 가로쓰기가 좋다는 얘기가 되겠는데, 그러나 세로쓰기가 바로 그 때문에 더 진지한 것을 요구하고, 그로 인한 긴장 때문에 思考促進이나 정보흡수율이 좋을 수 있습니다.

文化全體主義의 팽배

朴京範 : 세로쓰기에 익숙한 기성세대도 가로쓰기 글을 읽는 데에는 어려움을 안 느낍니다. 그러나 가로쓰기에만 익숙한 신세대는 세로쓰기에 부담을 느낍니다. 그것은 두발로 걷는 인간은 네발 걷기를 흉내내기가 어렵지 않지만 네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두발로 일어서기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경우 세로쓰기가 교육과정에 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되어 어린이들도 아무런 부담을 갖지 않게 됩니다. 진지한 내용이 아니라 만화에서도 세로쓰기를 합니다. 일단 익숙해지면 오른손으로 책을 넘길 수 있는 利點이 있기에 문제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세로쓰기를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냐는 것은 아이가 네발로 걸을 때 걸음마를 시킬 것인가 입니다. 문학의 창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신세대 작가들의 글이 가벼워지는 것은 한자를 모르고 컴퓨터를 쓰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도 글쓰는 자세에 영향을 줍니다. 작가 金采原씨는 글을 쓸 때 세로쓰기로 하면 힘이 들어가는데 가로쓰기로 하면 난잡해지곤 한다고 하더군요.
李文烈 : 그러면 朴京範씨는 세로쓰기의 문화적 생산성을 어떤 이유에서 찾습니까?』
朴京範 : 우선 시선을 집중하는 만큼 독서의 본 목적에 충실하다 할 것입니다. 사람의 두 눈은 가로로 보게 있다고 가로쓰기 옹호자들은 말하지만, 사람의 두 눈은 한 곳을 집중해서 보라고 되어있지 옆으로 넓게 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다. 두 눈의 시선을 방만하게 하여 넓게 보자는 것은 인간이 도마뱀, 도롱뇽 같은 동물을 본받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李文烈 : 가로쓰기라고 해서 무조건 시선이 풀린다고는 볼 수 없죠.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글자는 양 쪽 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을 봐야죠. 글을 제대로 읽으려면 가로쓰기도 집중해서 봐야 하죠.
朴京範 : 가로쓰기 옹호자들의 논리가 양 눈이 가로로 넓게 퍼져 있으니 옆으로 넓게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독에 유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李文烈 :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보다도, 평생 언어표기의 효율성에 대해 연구한 언어학자들이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선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굳이 바꿔야할 것인가를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도 세로쓰기와 가로쓰기가 반반씩 있었는데 갈수록 가로쓰기가 많아졌습니다. 아랍어도 그렇고 인도 유럽어 쪽도 가로쓰기입니다.
朴京範 : 티벳어도 가로쓰기입니다. 그런데 책을 위아래로 넘기더군요. 좌우로 넘기는 책에는 세로쓰기가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는게 여기서 입증됩니다. 세로쓰기의 책은 작아도 글이 두 면에 걸쳐서 한 段으로 보이기 때문에 좁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李文烈 : 다만 동양에서만 남았는데 그 종주국이라 할 중국에서도 가로쓰기가 확산되지 않았나요?
朴京範 : 중국공산당혁명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李文烈 : 시기적으로 그렇지만, 몇몇의 독단이라고는 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수의 동의를 통해서 정착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지금 가로와 세로의 문제뿐만 아니라 왼쪽에서 읽느냐 오른쪽에서 읽느냐의 문제도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손이 왼손이냐 오른손이냐 하는 것이죠.
朴京範 : 유럽인들은 왼손잡이가 많지요.
李文烈 : 朴京範씨가 주장하는 바를 설득력을 갖게 하려면 '좌익이 한 것이라서 안 된다.'식이 아니라, 가로쓰기가 문화적 생산성 효율성에서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朴京範 : 우선 다른 나라가 가로쓰기라고 무조건 따라할 수는 없다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진화된 측면을 他 문화의 비교적 下等한 것에 맞춰 퇴보시키는 것입니다. 反面에 他 문화 사회에서는 우리가 흉내내지 못하는, 우리보다 발전된 것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 나름의 진화된 문화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李文烈 : 세계 어느 나라도 소리글자는 대개 가로쓰기를 하고 있다 하지요.
朴京範 : 글자의 모양문제가 아닐까요? 영어는 가로쓰기지만 글자 모양이 다르니 우리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李文烈 : 그들은 글자모양이 오르락내리락하죠.
朴京範 : 영어는 글자의 列이 하나의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가 일종의 글자꼴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은 원래 세로쓰기 아니었습니까.
李文烈 : 오랫동안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그렇다고 할지 모르죠.
朴京範 : 결국 중국문화의 영향권을 인위적으로 벗어나자는 뜻에서는 다른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겠군요. 한글도 시각적인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상하로 들쭉날쭉한 소위 빨래줄 글꼴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읽기에 불안을 주기 때문에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로쓰기용의 안정된 正方形의 글꼴을 가로쓰기로 한다는 것은, 이래저래 편한 경우만을 찾는 격입니다. 결국 그 대가는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책을 보면 이렇게 큰 책이 어디 있습니까. 인접국을 다 보아도 소설책이 이렇게 큰 나라는 없습니다.
李文烈 : 그것은 다른 요소도 있을 것인데. 우리민족성이 확대 지향적이라서 큰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朴京範 : 집 크고 차 큰 것 다 좋다해도, 책 큰 것은 용납 못되리라 봅니다.
李文烈 : 사실은 집 큰 거 차 큰 거 다 나쁘죠. 우리의 환경을 보아서 우리도 축소지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활자 자체가 크기도 하죠. (자료로 놓인 팩스 인쇄물을 가리키며) 여기 이런 글자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자로 책을 내놓으면 아무도 안 읽지요. 요즘은 어린이 국어책처럼 글씨가 커야만 됩니다. 결국 가로쓰기 책이 낭비적이라는 것을 알려야 할 것입니다. 한글 음절글자의 변별력을 떨어뜨려 글자를 크게 하고, 방만한 시선을 유도하여 줄 사이의 공간을 늘리고, 그래서 책의 부피를 크게 하여 종이가 낭비되고... 그런데 그렇다해도, 수요자가 크고 읽기 좋은 책을 고른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朴京範 : 세로쓰기에 익숙하게 하려면 교육, 문학이벤트 등 상업적인 목적이 덜한 기회를 이용하여 약간의 훈련만 시키면 되는 것인데 최소한의 그것이 없는 형편입니다. 저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세로쓰기 조판의 만화방 대여용 무협지가 斷種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꾸준히 나오고 있음을 근래 확인했습니다. 신문의 경우는 진보적 신문과 오락스포츠 신문에서 가로쓰기가 시작되었지요. 물론 제일 처음은 북한의 로동신문이지만. 그렇게 해서 '아래'로부터 가로쓰기로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는데, 예전에는 각 신문의 論調를 보면 ㅎ신문이 외톨이 같았는데 지금은 ㅈ일보가 외톨이 같지 않습니까? 가로쓰기 도미노는 정확하게 우리사회의 진보 도미노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데도 너무 그 중요성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놀라운 것은 언론의 경우와는 반대로 문학에서는 고급문학이라는 순수문학에서부터 한글전용가로쓰기가 단행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목까지도, 아무리 혼동이 쉬운 한자낱말이라도 한글로 달아야만 순문학이라는 관념이 서 있습니다. 한자제목은 무협지에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학의 한글전용가로쓰기化는 대중의 선택이 아닌 문학주도층에 의한 인위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언론은 보수세력이 아직 남아있지만 문학은 이미 보수세력이 궤멸되었음을 말합니다.

문화적 생산성과 효율성 규명

李文烈 : 그냥 '가로쓰기는 진보세력과 운동권의 것이니 버려야 한다.', '보수는 세로쓰기로 남아야 한다.'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시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구체적인 자료가 나와야 합니다. 이를테면 같은 내용의 책을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로 하여 두 그룹에게 주고서 2시간 가량 읽게 한 다음 독후감을 쓰게 하여, 내용의 기억정도의 차이에 대한 결과가 나오면, 설득력을 가질 것입니다. 사람 사는 제도에는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편리를 위한 것이었겠지만 말입니다. 李淸俊씨의 소설에서도 언급되지만 사람은 직립하여 두발로 걷는 것 때문에 치질이라든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떠 안고 있지요.
朴京範 : 저도 '사람은 도무지 편한 자세를 가지지 못하더라'고 개가 말하는 내용을 소설에 삽입시킨 적이 있습니다. 니체는 인간을 초인과 짐승 사이에 놓인 밧줄 위의 광대라 했습니다. 앞으로 가도 위험하고 뒤로 가도 위험하고 그대로 있어도 위험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不完의 존재라 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편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李文烈 : 두 발로 일어서서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인간은 문화적 생산성을 가지게 된 것인데, 바로 편한 네발 걷기에서 불편한 두발 걷기로 옮아갈 때는 그 반대급부가 명확해야 할 것이죠.
朴京範 : 일어나 있던 사람을 누워도 좋다고 하기는 인심도 얻으면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지만 누워있던 사람을 일어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누워있기만 하면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음이 드러나고서야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대형화된 책에 의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로쓰기는 걸음마의 훈련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이 등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동등한 입장에서 비교평가를 해볼 수 있겠습니까.
李文烈 : 양쪽 다 익숙한 세대를 대상으로 해야겠죠. 우리세대가 좋겠습니다. 실험을 한다면 선입감 없이 진행해야 하겠죠.
朴京範 : 또 나이 많은 어른들은 세로쓰기를 좋아하면서도, '젊은이들은 모두들 가로쓰기를 좋아하니 거기에 맞춰야지'라는 지레짐작으로 체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이(本質이) 자꾸 변한다고 하는 게 진보 측의 주장입니다.
李文烈 : 어느 정도 변하기는 변하죠.(웃음) 인간이 재배하는 여러 곡물 중에 쌀과 밀이 가장 맛있는 곡물로 판명 나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곡물을 먹다가 쌀로 바꾼 민족은 다시 돌아가기도 하지만 밀로 바꾸면 다시 돌아가지를 않는다고 해요. 이것을 가지고 밀의 우월성으로 보기도 하는데. 우리의 식성이 어릴 때 어떤 다른 버릇이 들었다해도 자라면서 쌀밥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을 사람도 적지 않을 겁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이 스테이크가 다시 먹고싶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朴京範 : 어린이가 빵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민족특성이 덜 가미된 '기본음식'이라는데 있다고 봅니다. 밀은 확실히 쌀보다는 맛에 있어서 어떤 特性的인 부담을 주지 않는 곡물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洋食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羊고기요리를 사먹어 보았는데 느끼하고 도무지 우리 어린이도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어린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국에는 그 외에도 제가 잘 모르는 많은 미국 특유의 음식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주로 미국에서도 어른들만 좋아할 것입니다. 그들 나름의 문화특성에 익숙해진 사람들 말입니다.
李文烈 : 아무튼 현재 가로쓰기가 너무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과연 바꿀 필요가 있을까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朴京範 : 현재 상태에서의 安住를 지향하는 측면에서 따진다면 몰라도, 원칙적으로 보면 그 말씀은 다시, 수천년의 전통을 단지 몇 년 사이에 바꾼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따져봐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사회의 문화도미노 현상 중에 또 하나가 출판물의 제호, 건물 현판의 한글화입니다. 각 신문의 제호, 국책은행의 현판 등은 본디의 전통적인 漢字 서예체에서 하나하나 중국천안문 광장에 있는 구호와 같이 삐죽삐죽 날카로운 고딕체의 한글로 바뀌어갔습니다. 보는 이에게 온건하고 차분한 思惟보다는 투쟁적 의지를 고취시키는 효과를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도외시하지 말고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서양 중세 이후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종교이념에 눌려 변질된 문화를 복원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현대사의 이념운동에 눌려 변질된 문화를 복원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문자문제는 정보과학적으로 해석

李文烈 :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우리말이 소리언어화가 되어서, 한자어의 경우도 '자기정체성' 같은 것은 한글로 표기해야 잘 알아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朴京範 : 한글표기에 익숙해 있는 탓이겠습니다. 물론 그 의미를 정확히 알면서 알아듣느냐 의문도 나겠지만 말입니다. '正體性'과 '定體性'의 차이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더 이상 문자에서 소리글자 뜻글자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문자라는 것은 無限한 가짓수의 즉 아날로그한 인간의 思考를, 有限한 가짓수의 즉 디지털한 視覺기호로 바꾸는 것임이 정보화시대 文字의 定義일 것입니다. 한글이 소리글자라고 하지만 우리말의 흔한 요소인 장단음의 표기를 못해 엄청난 혼란을 惹起(야기)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漢字는 뜻글자라지만 상당수 장단음을 다른 글자로 辨別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변별은 어떤 체계적인 규칙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음, 다른 뜻은 다르게 표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어의 경우 'seat','sit','sheat','shit'에서 'ea'가 'i'의 長音이라고 할 무슨 근거가 있습니까. 어쨌든 다르게 써서 구분만 하면 될 뿐입니다. 한글은 記號의 수도 적지만 初中終聲 규칙의 제약이 있습니다. 수학적으로, 어떤 배열이 규칙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 가능한 경우의 수가 줄어듭니다. 그만큼 다양한 정보의 표현력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漢字는 자유로이 모양을 이루니까 그런 문제는 없고 로마자의 경우 초중종성의 제한이 없으니까 보다 다양한 표현을 가집니다. 'pitch', 'night' 등이 그 예입니다.
李文烈 : 그렇죠. 영어는 자음이 다양하지만, 한글은 열 네 개의 자음으로 다 표현해야 하고 또 초중종성의 순서제한 때문에 제약이 있겠습니다.
朴京範 : 같은 음은 반드시 같은 표기로 하니까 받아쓰기에 유리하다는 것을 한글의 장점이라고 할 정도니 한글에 대한 찬양이 얼마나 문제가 있었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음까지 같은 표기로 하는 것은 아무 문제를 삼지 않고요. 그렇다고 한글을 나쁜 글자니, 퇴출될 글자니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기야 한자가 없어지면 한글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지만. 한글은 어떤 기업체의 유능한 課長과 같습니다. 맡은 역할에서는 유능하지만 회사를 모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좋은 글자지만 그 역할에 한계가 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언어문화를 보는데 시스템(構造)개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를 보아도 일상어들은 각 나라마다 다르지만 고급어휘는 거의 공통으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틴어가 기본이 됐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급어휘가 발달되려면 그만큼 많은 인구의 생활권 즉 문화권의 뒷받침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권에서 쓰이는 廣域語는 상류층이 많이 쓰기 때문에 더 품위 있어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순우리말이 격이 낮아 보이는 것이 사대주의 때문인 양했지요. 중국의 각 省에도 그들 고유의 격 낮은 고유어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고요.
李文烈 : 문화의 보존성을 위해서라도 한문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합니다. 현재 한자용어가 표음문자화해서, 예전에는 생각 思 字 하나만 알면 思考 思想 思辨 思慮 思料 思念 思慕... 다 되었지만 지금은 각기 따로 배웁니다. 우리말 어휘는 한자합성어까지 포함하면 영어보다 많습니다. 그것을 한자 없이 외우면 영어보다 어렵습니다. 지금은 한글이 당장 배우기 쉬워 쓰이고 있지만 나중에 영어와 일대일로는 한글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朴京範 : 문자문제가 혼란을 빚었던 큰 이유는 정보과학적 개념이 없었던 데 있었다고 단언합니다. 어떻게 훨씬 적은 기호와 제약 있는 배열로서 똑같이 정보표현을 할 수 있습니까. 영어는 발음으로 거의 모든 단어를 구분할 수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소리글자체제로 가자고 하면서, 그러려면 우리도 영어만큼 발음을 빨리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 안 했다니 말이 됩니까. 버터로 식생활을 개선하여 혀를 유연히 하자고 했어야 했지요.(웃음)
李文烈 : 버터 먹으면 말을 빨리 할 수 있다가 확실치는 않지만, 그런 식의 노력은 있어야 했었지요.(웃음)
朴京範 : 漢字는 고저장단의 구분이 있지만 그래도 영어보다는 동음이의어가 많은데, 그만큼 말을 빨리 하지 않고도 많은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물론 우리 글의 소리글자화가 말밖에 모르는 민중을 위한다는 것이었다지만. 참 말도 말-이라고 정확히 발음해야 동물 말과 구분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시중의 어떤 시사잡지도 韓國馬事會에서 나온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李文烈 : 여기서, 편한 것이 왜 나쁜가를 생각해봐야 하겠군요.
朴京範 : 편한 것은 자기 주변과 자기와 조화라고나 할까요. 맑고 깨끗한 호숫가에 않은 것이 냄새나는 시궁가에 않은 것보다 편하죠. 자신과 더 조화로움을 이루니까요. 하지만 그런 경우와, 향상을 위한 에너지 소비의 일시적 불편과 엔트로피 증가에 의한 와해를 방치함으로써의 편함은 구분되어야겠습니다.
李文烈 :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불편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감수하자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교통 규칙도, 나 하나로 보면 아무 때나 길을 건너고 싶지만, 사회의 생산성 효율성을 따져서 불편하더라도 신호등이 켜 있을 때 건너자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다 우리 삶의 제약일수 있습니다. 문자도 불편한 것입니다. 그냥 말하는 게 편하지요. 하지만 글로 생산할 수 있는 지식자본의 효율성이 있죠. 모든 문화라는 것은 불편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왜 요즘 와서 그리도 편함만을 강조하는가 입니다. 편함을 강조하면 그것이 개인적인 만족에 그치느냐 아니면 우리를 퇴화시키며 국민 전체를 하향 평준화시키느냐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朴京範 : 요전에 방송에서 體罰贊反 토론이 있었는데 막상 보니 단순한 罰의 수단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일종의 保革對立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체벌을 반대한다면 떠드는 학생에게는 퇴실을 명한다든가 점수를 깎는다든가 기타 非體罰的인 방법을 거론해야 할 터인데 반대측에서는 추상적인 理想論을 주장하면서 處罰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도 동등한 인격체이니까... 학생만의 잘못이 아니라 어른의 잘못도... 숙제 안 해오는 것은 맞벌이 부부인 부모가 도와주지 못해서 일수도... 등등 주장을 간추리면 아이들을 그대로 놔두어 성인의 미성년자에 대한 영향력을 억제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에서 개체발생은 종족발생을 되풀이한다고 하는데, 곧 인간을 어린 시절의 未進化 상태에서 머무르게 놔두자는 것이 됩니다.
李文烈 : 그런 식 대로라면 사람이 가장 불행하죠. 짐승은 무슨 간섭을 합니까. 사람이 가장 구속이 많고 불행한 동물이죠. 개같이 재수 없는 짐승은 가끔 교육을 받지만. 돼지 같으면 전혀 교육을 안 받고 개체로서 존중받지요. 자유방임이 최선이라면 학교라는 것 자체와의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학교도 있지 말아야합니다. 아이한테 부담을 주지 말고 본성대로 자라라는 것은 좋은 주장도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길러서도 知的으로 풍성하고 인간적으로 선하고 조화롭게 자람을 입증한다면 설득력이 있겠죠.
朴京範 : 입증하기 위한 과정이 엄청난 사회적 손실을 가져오지 않을까요.
李文烈 : 가정이나 추측을 하는 경우가 많지요. 보수적인 교육은 그 동안 해온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효과도 있을 수 있겠죠. 제도 때문에 희생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체벌에 의하여 被害 당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고.
朴京範 :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李文烈 : 體罰이 문제가 있으니 변혁하자는 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길을 제시해야지요. 떠들면 내보낸다든가. 하지만 處罰 그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은, 처벌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인격의 陶冶(도야) 및 지식의 涵養(함양) 대신에 또 다른 문화적 생산성이 못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전교조 합법화 자체 반대 안해

朴京範 : 결국은 전교조 등, 진보적 교육을 주장하는 측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따로 세워 국민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좋겠는데요.
李文烈 : 전교조는 어떤 세력이 맡느냐가 중요합니다. 서구에도 교원노조가 있습니다. 그 의도가 교원의 권익옹호, 신분보장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당히 이데올로기화 되어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교까지의 교육방침은 첫째가 국민형성입니다. 체제에 맞는 모범 국민을 길러내는 것이지요.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다스리기 좋은 국민을 말하는데, 두 번째가 지식함양, 세 번째가 인격도야일 것입니다. 우리의 체제와 다른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측이 교육을 담당하면 국민형성권을 가져가는 것이 됩니다. 정부의 교육권을 대신하여 체제에 안 맞은 아이를, 즉 체제에 저항하는 아이를 기르겠다는 것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朴京範 : 자본에 저항하는 교육이라고들 합니다.
李文烈 : 현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교육권을 가지면 법치주의 관점에서 이상한 모순이 생깁니다. 노동자로서 부당 해고를 막고 신분의 불안정을 방지하는 것은 열두번 찬성합니다. 하지만 국민형성권 내놓아라 그게 문제인데, 그것이 아니면 전교조의 합법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朴京範 : 선조의 지혜를 성장시기에 집중 주입하여 자연방임의 상태보다 빨리 인간을 성숙시키자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요. 그런데 포괄적인 열린교육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앞서 말한 한자혼용과 세로쓰기교육의 미비로 인하여 신세대는 문화적으로 下等하게 퇴화한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개체의 본질'에 따르는 要素를 북돋워야 합니다. 즉 우리 민족의 전통에 맞는 정서를 함양해야 하는 것인데 현재의 교육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한글전용교육에 의한 발음체계와 어의파악의 단순성으로 인해 退化한 發聲 능력과 知的 능력은 교육과정을 끝낸 후에는 여간해서 올리기 힘듭니다. 저의 의견으로는 가로쓰기만의 교육도 마찬가지라 하겠지요.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우리도 쉽게 하는 발음이 있는 반면에 /th/,/f/ 등의 발음은 하기에 어렵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린이도 'Thank you'를 'Tank you', 'fine'을 'pine'으로 발음합니다. 우리의 어문정책은 마치 그들로 보면, 어린이들이 /th/,/f/ 등의 발음이 어렵다고 해서 국어에서 없애버리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I'm pine, tank you.' 해도 앞뒤정황을 보아 알아들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웃음) 지금 우리의 未進化된 신세대는 그 타성에 젖어 文化的 向上의 노력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漢字가 있는 책은 안 팔린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교정직원의 업무의 용이함을 위하여 판매를 위한 事情 以上으로 출판물에서 漢字를 없애고 있는 것입니다. 국내 굴지의 중견 작가의 소설작품이, 漢字를 모르고 쓰기 귀찮아하는 출판사의 젊은 교정직원에 의해 사정없이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잡지사에서 세로쓰기 편집을 시도하려해도 가로쓰기의 단조로운 편집의 타성에 젖은 젊은 제작직원이 바꿀 수 없다 떼를 쓰기 때문에 난관에 부닥치게 됩니다. 최근 有數의 출판사들이 젊은이 최우선의 문화풍조에 편승하여 20대 작가를 키우려고 많은 투자를 하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출판사에서 밀어주려 해도 그 작가 자신의 함량부족으로 인해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글은 연륜이 있어야 깊이가 생긴다는 말도 거론되는데 일부 타당성은 있으나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문학계 스스로가 그들이 그토록 神聖視하는 20대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명작을 봐도 20대에 창작한 작품이 많습니다. 또 국내에서도 60년대까지는 <廣場>,<霧津紀行>등 20대 작가들의 훌륭한 창작이 있었고요. 교육에 의해 인간은 직접경험을 하지 않고도 미리 先代의 지혜를 배워 知力을 향상시키는 것인데 우리의 20대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수업에서 '전통의 무게'를 되찾아야 우리의 문학계에서 그토록 갈구하는 20대 천재작가도 나올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간의 進化에 거스르는 '進步'

李文烈 : 내가 요즘 우울한 것이, 우리 현대사에서 그 많은 곡절을 겪고서도 아직도 正에서 反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한심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내가 명확히 우파인지 잘 모르고 단지 우파로 규정되었을 뿐인데, 보수라는 것은 인정했지요. 우파라는 말은 호감 가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에 아버님이 被害 당한 이야기가 생각나서. 하여튼 우익에게 맞아죽은 얘기, 우익에게 잡혀간 얘기들로 어감이 썩 좋지가 않습니다. 이제 전 시대의 왜곡, 분단상황, 첨예한 이념대립 상황, 내 식으로는 '변경' 상황이 끝나 가는 만큼, 이중성이 정리돼야 하겠습니다. 어째서 좌파고 어째서 우파인지 말해야합니다. 껍데기가 아닌 본질입니다. 좌우에 동시에 주문해야 할 것이 그들의 참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朴京範 : 이제까지는 좌우익이란 호칭이 이래저래 상당히 좋지 않은 어감을 주어왔기 때문에 自稱은 물론 他稱도 삼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앞으로는 서로가 떳떳이 자처하고 또한 지칭해야 하겠습니다. 좌파, 우파의 용어를 꺼리다보니 현재 거의가 進步, 保守란 말로 대치하고 있는데 이 경우 '진보'라는 말이 語感上 너무 유리합니다. 제가 左右를 定義해 봤는데요. 右는 향상의 노력을 하며 그 목적으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左는 안전한 삶, 생존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편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지요. 극단적으로 보면 성서에서도 세로자세로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인간은 조물주의 형상이고 가로자세로 항상 편하게 지내는 뱀은 사탄이라고 하듯 말입니다.
李文烈 : 좌우가 명백히 정의가 된다면 나도 우파를 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좌우의 유래는 프랑스 3부 의회에서 래디칼한 곳이 좌측에 있고 부르조아가 오른편에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지요. 좌는 개체적인 것보다는 집단적인 것, 개별적인 것보다는 기계적이고 구조적인 것을 신뢰합니다. 소유와 물질운용의 측면에서는 私有와 共有의 차이가 있지요.
朴京範 : 좌파의 논리는 사람은 자꾸 변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개인의 인생에서의 성장을 중요시하는 것과, 세대간의 차이를 중요시한다는 것에서, 우파의 개인중시 성행과 좌파의 집단중시의 성향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좌우의 명칭을 우연으로는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중세유럽의 聖畵에서도 天使는 오른쪽, 사탄은 왼쪽에 있습니다.
李文烈 : 儒學에서도 正統의 孔孟이 아니면 左道라 했지요. 근대적인 의미로서는 집단과 구조의 관계라고 봐야합니다. 좌는 집단적 사고를 중시하지요. 그런데 경쟁이라는 것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이서 라도 경쟁한다면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기 때문에, 경쟁에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쟁결과에 만족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요. 100명의 경쟁에서 1등은 만족하겠죠. 객관적으로는 49등까지는 만족해야 합니다. 적어도 이십 등까지는 만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21등도 불만이 됩니다. 자기 뒤의 80명을 생각 않고 자기 앞의 20명만을 생각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좌는 경쟁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요. 경쟁을 없애고 인간사회를 집단적이고 구조적으로 재편성하는 것이 지향하는 바가 될 수 있지요.
朴京範 : 일단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는 것이 삶의 자세 아닐까요.
李文烈 : 그래서 자본주의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등 많은 무마를 하지요. 그런데 저쪽에서는 아예 없애려고 하는 것이지요. 경쟁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하향평준화가 됩니다. 그런데 朴京範씨는 좌익은 편함을 추구한다고 했지만, 운동권은 데모하고 감옥가고 하며 고생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朴京範 : 어느 성향이든 주동자들이란 그 자체가 소극적일 수는 없겠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그렇게 유혹한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李文烈 :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이 편함을 미끼로 한다는 것이다 하겠네요.
朴京範 : 예,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려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찌 보면 지도자로서 나아가는 방법에서도, 즉 자아실현과 뜻의 성취를 위해, 지속적인 노력보다는 지름길을 택한다고 볼 수 있죠. 가령 성당에서의 농성은 힘들 것 같지만 오랜 세월 자기분야에 땀흘려 일하여 인정받는 것보다는 쉬울 겁니다. 저는 생물진화에서도 좌우익이 있다고 봅니다. 가령 새 중에서는 수리, 매 등이 우익이며 도도새, 키위 등은 좌익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李文烈 : 맹금류는 우익이고, 날지 못하는 새는 좌익이라는 얘긴데, 그러면 우익이 공격적이라는 말이 되는군요.
朴京範 : 우리 사람의 눈으로 보면 먹이가 저항력이 있는 생물이냐 아니냐로 인해 차이가 많아 보이지만, 생태계의 본질로 볼 때는 짐승을 잡아먹느냐 벌레를 잡아먹느냐 풀을 뜯어먹느냐는 다 같은 행위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더 좋은 삶의 질을 위한 향상의 노력을 대대로 해왔느냐에서 그들 동물의 현재의 형태가 갖춰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생물의 좌우분류문제는 제가 따로 정리해 볼 것입니다.

대담을 마친 후 헤어지는 인사를 위해 서있는 상태에서, 李文烈씨는 거실 유리창아래 負岳文院의 정원을 내려보며 추가의 辯을 더했다.
李文烈 : 우리문학의 세계화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방향을 아직 확실히 잡지 않은 상태입니다.
朴京範 : 그런데 요즘 여러 곳에서 우리문학의 세계화를 말하는데,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 문학의 漢字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보표현의 解詳度(해상도)부터 외국의 문학에 비해 빠지지 말아야 외국어로의 번역에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李文烈 : 내 경우는 <皇帝를 위하여>를 일본에서, <詩人>을 독일에서 내겠다 등 여러 얘기가 있어요. 그런데 내 생각은 단순히 번역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들을 위하여 쓰고 그것이 성공하면 다시 국내에 도입하는 형식을 취하고 싶은 것이지요. 지금 어찌 보면 할만큼 해놓은 상태지요. 이렇게 좋은 환경 이뤄놓고 후배 가르치며 품위 있게 늙어가고 하면 부러울 것 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라면, 지금 새로이 세계의 독자를 상대로 데뷔해 글을 쓰고 싶어요. 뉴욕의 뒷골목에 셋집 얻어놓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보고 싶지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미국의 교민사회에서 李文烈 이가 여기 왔다는 둥, 어느새 북적이게 되고 도로 마찬가지가 되고 말겠지요.

세계문단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그 언어는 무엇일까? 영어이면 되는 것일까? 李文烈씨는 국내의 입장에서 보는 세계문단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외국에서 본다면 그는 이미 세계문단에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는 막연하게 또 다른 향상을 위한 노력을 동경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정진하고픈 그의 바램은 아마도 현세에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무엇을 설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는 가능하다. 아무리 이루어 놓은 것이 많아도 어차피 인간은 이윽고 空手去하게 될 것이며 후에 空手來하여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으니, 인간은 거듭 輪回(李文烈씨는 이 개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하여 살아가면서 성취에 성취를 거듭함으로써 더 높은 존재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사를 마치고 정원을 걸어 내려오니 黃狗 두 마리가 다가와 반겼다. 둘을 번갈아 쓰다듬고 안아주고 한 다음 잔디밭에 털썩 앉았다. 녀석들은 내 앞에서 저네들끼리 장난을 치며 놀았다. 잔디밭에 뛰노는 황구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도 언제까지 그들과 함께 풀밭에 가로자세로 누워 장난치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대접을 받는 만큼의 삶의 의무가 있다. 나는 일어서 두발을 딛고 불안한 직립자세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돌아가 오늘 하루를 누워서 쉬면, 내일 또다시 일어나 새로운 창조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좌익의 사회적 高地 점령전략

- 사회문화적 관점으로 본 좌경운동

(1998.4. 한국논단)

여기 커다란 황소가 묶여있다. 이 소를 제물로 쓰기 위해 잡으려 한다.
그런데 소를 잡는다고 아무 데나 마구 도끼로 찍어대면 과연 소가 쉽사리 쓰러질까? 필경 발광하는 소의 피로 주변은 범벅이 될 것이며 요긴하게 쓰일 쇠가죽도 제대로 얻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때 솜씨 좋은 백정이 필요하다. 백정은 자그마한 망치로 황소의 정수리를 내리친다. 몸뚱이를 여러 번 도끼로 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가죽도 상하지 않는다.
흔히들 좌익혁명은 하층 민중을 선동하여 일으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역사상으로는 그런 사례들이 있고, 좌익혁명은 그 본질상 하층 민중들에게 '모두가 고루 잘사는 사회'를 당근으로 제시하여 혁명을 유도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六:二五를 거쳐 그들의 실상을 보아서 그런지, '하층 민중'이라 할지라도 하나같이 공산주의란 말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좌경혁명적 '지식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고 한심하게도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혁명과업'은 완수해야 하는 것... 어찌해서라도 남한이 主가 되는 흡수통일은 막아야 하며, 통일 이후에도 되도록 북한의 세력이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남한에 공산주의와의 이질감을 갖지 않는 계층을 두텁게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따라 남한의 좌익세력이 채택한 고도의 혁명전선전술은 마치 백정이 소의 정수리를 때리는 것과 같은 사회적 高地占領의 전략이었다. 즉 민중을 부추키기보다는 지배층의 思考를 '民衆化'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각 분야 중에서 정신적으로 상층부에 있고, 聖域 혹은 準 성역으로 간주되는 곳에 침투하고 또한 자라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학과 종교가 그 가장 적합한 토양이다.

어느 사회이든지 이른바 고급문화는 하층 대중문화보다 쉽게 변화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의 문학계는 이른바 고급문화에 속하는 곳이 더 '진보적'이다.

純文學이란 인간의 眈美的 욕구에 의해 여느 예술작품처럼, 대중에로의 전파라든지 상업성 등을 고려하지 않고 창작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일단 순문학이라는 목적을 가지면, 인간심리의 내면적 성찰을 주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쉽게 쓴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순문학의 본질로 볼 때 우리의 문학이 일찍이 하나같이 한글전용에 가로쓰기로 통일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중문학을 순문학으로 위장하는 경우는 별도로 하더라도, 순문학이라는 그 자체로 어차피 만족할만한 대중성과 상업성은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산뜻하고 삼빡하고 상큼한' 분위기로 포장되고 편집된 문학서적이라 할지라도 담아있는 내용이 순문학의 목적에 충실할 경우, 가지고 있는 순문학 본연의 무게를 감당 못하여 대중성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상업적인 사정에 의한 선택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민중지향적'인 인위적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들'의 '商業外的 所信'에 基因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漢字로된 제목에 세로쓰기의 책은 지금은 어둠침침하고 퀘퀘한 뒷골목 만화방의 무협지에나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교계에서도 思考의 '非反動化'를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의 엄숙함과 권위를 없애고 쉽고 편한 한글가로쓰기로 바꾸기 운동이 있었다.

그런데 신도중에서 漢字나 漢字말을 전혀 모를 하층민중은 오히려 기독교(개신교)측에 많은데도 어찌된 일인지 상대적인 상류층 종교인 천주교에 쉽게 각색한 한글가로쓰기성경이 채택되고 있다.

천주교 미사는 전통적으로 권위와 격식을 존중하기 때문에 까다로운 祭禮儀式을 하층민중으로서는 따라가기 어렵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기본 교양이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고, 열성적으로 전도를 하지도 않으므로 주로 代代로의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믿는 중상류층 종교이다. 요전의 유력한 대통령후보 二명이 모두 (국민전체의 신도수는 그렇게 많지 않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천주교 신자들 중에 전통 성경이 어려워서 못 읽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혁신'은 강행된 것이다.

천주교가 그 본질을 벗어나 모든이에게 쉽게 읽히는 성경을 위하여 본래의 엄숙함과 경건함 그리고 섬세한 의미의 소멸이라는 희생을 치루면서 '쉽고 편한' 한글가로쓰기 성경을 正經으로 채택한 것은 二律背反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든이가 다 같이 동등하게 신앙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바라는 바라면 뇌성마비자는 할수 없는 聖號긋기를 폐지해야 할 것이고 여성차별의 상징인 面紗布쓰기를 폐지하여야 할 것이다. ("男子는 하나님의 形像과 榮光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고린도前書 一一:七) 하느님도 "스스로 判斷하라" (고린도前書 一一:一三)고 했다. 하느님의 말씀도 스스로 판단하여 업데이트하면서 그 정도 것들을 스스로 판단하여 개혁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결국 앞에 든 예들은 사회적 상류계층에로의 '非反動的思考' 注入運動의 하나라고들 밖에는 달리 추론할 근거가 없다. 이렇듯 국내의 좌익운동은 단순히 고전적인 방식을 탈피하고, 檢察力 等이 손을 대기 어려운 곳에 파고들어 '장차 자리잡을 체제'(?)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좌익'은 어찌보면 左翼이라는 말도 맞지 않다. 그들은 고전적 의미의 좌익하고는 다르다. 그들은 남한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을 방지하며, 통일후에 북한의 관습과 이념이 최대한 힘을 발휘하도록 남한에 기반을 조성하려는 측이다. 흔히들 좌익의 비판에 대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 하다못해 일본의 사회당 같으면 그런 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새는 왼쪽 날개 끝에 추를 매달고 날 수 없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앞날은 세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첫째는 국가정책의 大右回轉을 단행하여 일본이나 대만과 같이 고유전통을 살리면서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국력을 신장하는 길이다. 건국이후 오십년을 그렇게 일관하였더라면 진작에 독일과 같은 통일을 이루어 지금쯤은 그 지리한 이념싸움을 안해도 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어서 빠른 '민족간의 동질성확립'과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사회문화를 '그들의 뜻대로' 더욱 더 북한과 유사하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설사 정치권력은 남한정부가 主가되어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일단 통일 후 대세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하여 이 첫 번째 案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고 두 번째 안 또한 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세번째 案은, 지금까지와 같이 완전한 자유민주 체제도 아니고 사회주의 체제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계속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가장 편한 타협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우리의 국력은 갈수록 쇠약해져 결국 주변국의 속국으로 전락되고 말 것임은 명백한 일이다.

수박씨와 석류씨가 이념에 미쳐 날뛴 날

사상 좌경화 유도한
한글전용 가로쓰기

주인과 도둑
도둑이 침입해 주인과 싸웠다. 이 때 도둑이 도리어 큰소리치며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이 것을 賊反荷杖이라고 한다.
어떤 언쟁이 있을 때 知覺없는 자가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모든 것을 주장한다면 이 때 我田引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한마디로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도둑이 주인의 밭에 침입해 한바탕 격전을 치렀다. 온힘을 다해 싸운 주인은 겨우 자기 밭을 빼앗기는 것까지는 막았으나 그 통에 기름졌던 밀밭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도둑도 지쳤는지 더 이상 거친 싸움을 걸기는 포기한 것 같았다. 도둑은, 역시 지쳐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아직도 도둑을 쫓아내기 위한 戰意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는 주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그 동안 싸운 건 없었던 일로 하고 같이 저 쑥대밭을 일구며 잘 지냅시다."
이 상황을 표현하는 故事成語가 있음직도 한데 여기 인용해 쓰지 못하는 것은, 필자의 無知의 所致가 아니라면 人類史上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발한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요즘의 우리 문학계 일각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좌우익의 싸움의 시대도 지나갔으니 인간본질에 대한 탐구에 함께 노력을 기울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변질된 우리의 문학은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좌익에 의한 '민중적 사고' 최우선의 文化觀은 우리 사회의 형식적 자본주의 틀과의 억지결합으로 경박한 대중성지향의 천민자본주의문화를 낳았다. 국민의 의식수준을 키워야할 문인과 출판인들이 '쉽고 편한' 독서만을 국민에게 버릇들이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기호를 독서보다 쉽고 편한 여타 오락문화 쪽으로 향하게 하여 문학의 침체를 가져왔다. 문제는 이러한, 좌익에 의한 우리 고유 정신문화의 파괴를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잘못 알고 체념하는 사고가 팽배해있는 것이다.

좌익에 의한, 문학의 변질
중세의 종교이념에 눌려 변질된 옛 문화를 되살리자는 르네상스운동이 있었듯이, 이제 좌익의 발호에 의하여 변질된 우리 문학을 그 이전 시대로부터 다시 되돌아보는 省察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문학의 脫 이념화이다. 지금 이념을 주장하는 문학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 사실 문학의 창작표현의 자유로 볼 때 그 내용을 일일이 시비건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 그 문학의 <틀>인 것이다. 좌익사상이 우리문학에 끼친 폐해는 '좌익문학작품'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에, 좌익사상의 副作用이 우리의 문학풍토에 끼친 영향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이다. 이에 대해, 그 원인과 時期를 문제삼으며 좌익운동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반론할수 있다. 그러나 절개와 지조가 있어야 할 문학에 있어서 외부적인 요인에 대하여 최소한의 저항도 없었다는 것은 곧 동조를 의미한다.
좌익세력은 독재정권下에서 민주화세력에 寄生하여 자라났으며 오히려 독재정권의 전체주의적 성향을 자연스럽게 계승하여 우리의 문학에 파급시켰다. 요컨대 '꼭필요하지 않은' 정서적인 면은 무시하고 '민중의 생활에 꼭필요한 것'만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당연히 문학을 통해 어떤 知的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지식층의 욕구는 거세될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에서는 불황이면 책이 더 잘팔리는데 우린 그렇지 않다고 한다. 60년대 어려웠을 때에도 대학의 문학과 철학강의는 성황이었는데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꼭 필요한 것만 공부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로서는 불황이면 책이 더 안팔리는 것이 당연하다. 웬만한 장편소설 읽으려면 극장값의 두세배인 큰 책 몇권값 몇만원을 써야한다. 작은 지면에 압축되어 인쇄된 선진국의 책편집이 최대의 독자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되어있다면 우리의 책편집은 글자크기와 공간을 늘려 책크기와 권수를 늘리는 등 독자가 혹 값이 비싸서 사지않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가격대 판매수로 보아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방향으로 되어있다.
우리의 문학이 어차피 꼭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애자는 좌익전체주의의 노선을 따르는 한에서는 우리생활에 꼭필요하지않은, 문학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 꼭필요하지 않은데 漢字는 쓰지말자, 꼭필요하지않은 불편한 세로쓰기는 없애자 하고 밀어붙였던 이들이 꼭필요하지도않은 문학을 살리자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꼭 필요하다의 '꼭'도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必要라는 말에 '꼭'의 의미가 있으니까.)

한글전용의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다
이제는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위한 새로운 가치관이 定立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존에 잘못 판단했던 많은 문학적 가치관에 대한 재평가이다.
순수예술이라 하면 그 추구하는 바에 對해 어떠한 外壓을 加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압'은 우선 상업적인 요인에 의한 대중 인기영합의 흥미유발이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이념적 목적을 띤 계몽, 선동의 목적이 있을 수 있겠다. 물론 이 경우 어떤 큰 사회적 共感帶에 의한 集團偏向을 뜻하므로 일반적인 문학작품의 思想性과는 의미가 다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 근대문학에서 당연시 되어 왔던 한글전용의 문학은 純文學이 아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서 문단 원로급 평론가 두 분의 말(言)을 인용하도록 한다.
'한글전용은 어떤 인위적인 것이 아니었을까.'(金允植:<現代文學>)
'민중 속에 사용의 역사가 긴 낱말이라야 정서적 호소력이 있다.'(柳宗鎬:평론집, 同時代의 詩와眞實)
前者는 그 말(言) 그대로, 한글전용이란 것이 문학 본래의 순수의미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여건에 따른 인위적인 작용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니 그대로 의미가 통하지만, 後者는 얼른 그 연관이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사실 後者는 본래, 민중사이에서 쓰여진 역사가 오래된 순수 고유어를 많이 써야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의 정서적 호소력이 강하다는 것을 力說하는 글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한글이념'에 물들은 상당수 문학인들은 대뜸 '그러면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영어는 물론 에스페란토語等도 자유로이 활용해야겠네.' 하고 비웃을 것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옳다. 따지고 보면 黑白的으로 모국어와 비모국어를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本 목적으로 볼 때, <어느 만큼 그 민족에게 오랫동안 쓰(用)여와서 그 민족의 정서 속에 의미가 배여 있는가>가 文學語로서의 쓰임에 우선권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낱말 역사의 길고 짧음이 불과 수십 년의 삶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그 느낌의 차이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獲得情緖의 遺傳이라는 精神的 用不用說에 의해 설명되어져도 좋고, 因緣이 얽힌 곳에 다시 태어나곤 하는 輪廻의 사상으로 설명되어도 좋다.
그렇다면 오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글보다 당연히 이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漢字가 더 우리민족 특히 지식인 계층의 정서에는 깊이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는 본래 중국어인데 어불성설'이라고 할 지 모르나 여기서는 '文學'의 의미를 살려 글을 말(言)하는 것이지 말(語)을 말(言)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글자로서 나타내고자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지 반드시 한자를 중국어 유사 발음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 창제로 한자음을 중국어 발음식으로 통일시키기 전까지는 한자는 일천오백년 가량 우리말(語)의 표기수단이 되어왔다. 오히려 한자어를 일일이 한글로 音表記함으로써, 우리 식으로 그 뜻을 생각하지 않고 중국어에서 따온 音讀만을 강요하는 것이 중국어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층민중(어린빅셩)의 최소한의 자기표현을 위해 창제된 문자를 '예술문학'의 專用도구로서 轉用한 한글전용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다. 한글전용 문학은 이광수, 심훈의 맥을 잇는 계몽주의 문학 혹은 민족주의 문학(한글전용이 정말 民族主義인지는 論外로 치고, 일단 당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니) 혹은 상업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대중문학인 것이다. 재미를 늘리기 위해서 주제의 나타냄과는 무관한 장면을 삽입하고, 가끔은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묘사를 늘리며, 어찌하면 보다 읽기에 편하게 할 수 있을까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중요의미를 때로는 稀釋하고 생략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이 표현을 한자를 안 쓰고 나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군더더기 같은 한자괄호를 없애고 '삼빡'하게 글을 쓸(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창작하는 것은 全혀 同等한 것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문학의 목적을 위한 창작표현 이외 일체의 외압을 거부하는 것만이 진정한 순문학인 것이다.

교육계에게만은 절대 순종하는 문학계
이런 문제가 거론되면 많은 문학관련 종사자들은 교육제도가 그러니 어쩔수 없다고 한다. 물론 교육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원인제공자라는 교육계쪽에 정식으로 한마디 항의를 하는 것을 보지못했다.
이것은 문학계 측이 상당부분 교육계 측과 이해를 같이하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우리의 문학계는 각종의 외부압력에 의한 물리적인 표현자유의 제약에 대해서는 훌륭히 투쟁해 온 바 있다. 사회제도에 의한 창작자율권의 침해에는 민감하기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문학계이다. 최근의 음란물시비에 관련해서도 꽤나 저항의 의지표명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같은 표현의 자유 문제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원천봉쇄적 표현자유의 억압이 이제껏 우리문학에 행해지고 있음에 대해 저항한 문인은 거의 없었다. 되도록 한글로만 쓰는 것이 쓰기에도 쉽고, 한자를 일일이 괄호안에 넣는 것은 원고매수를 늘리기 위한 좋은 방편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좌익운동세력의 문화사상적 소신과 일반 문인들의 현실적 편의추구는 서로간에 조화로운 타협을 이루었던 것이고 그에 대한 어떠한 異議의 제기도 머쓱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문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발표하고서 문제가 되어 봉변을 당하는 것보다는 아예 발표를 못하게 봉쇄하는 것이 더욱 큰 탄압이다. 작금에 이르러 우리 전통의 멋을 온전하게 지닌 어떤 문학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자비출판이 아니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아직도 '한글이 우리글이니 우리문학은 한글로 창작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는 문인들이 있을 것이다. 문자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고 있다. 이미 국가 권력의 핵심에 근접한 수많은 인사들이 한자교육 강화의 의견표명을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아직도 교육과 문학은 요지부동으로 한글전용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후 수십년간 한글에 대한 과대평가에 의한 사회문화의 불합리에 편승하여, 우리사회에는 이미 쉽사리 건드릴수 없는 광범위한 기득권층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자혼용주장은 여기서 略하기로 하자. 단지 우리의 문학계에서 그리도 떠받드는 한글의 實狀에 대해 조금 알아보자. 의미없는 뜻글자 소리글자 운운은 불필요하다. 문자의 기능은 아날로그한 정보인 사고를 디지탈한 활자로 표기하는 것 즉 視覺기호에 의한 의미변별력의 문제이지 뜻글자 소리글자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의 수많은 동음이의어 문제는 한자사용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 말, 눈, 눈, 밤, 밤, 등 순수고유어의 장단음 혼동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소(牛)'와 '소년(少年)', '새(鳥)'와 '새(新)', '사자(買)'와 '사자(獅子)'는 'ㅅ' 이 있는 음절의 발음이 다르다. 우연한 대중적 관습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다르게 발음하므로 귀로 들을때는 구분이 가는데, 한글로 쓰(書)면 앞뒤정황을 보아 추측하지 않고는 구분이 안가는 것이다. 영어로 보면 'sit', 'sheet', 'seat', 'shit'를 모조리 같은 글자로 표기하는 것이나 같다.
'나와 놀자' 하면 'lets play with me' 인지 'lets come out and play' 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충 집을 나와서 말한 자와 함께 놀자는 것은 맞으니, 대충 알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런 표기법을 신봉하면서 무슨 문학을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글을 그리도 중하게 여긴다면 한자배격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한글학자'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작가들이 솔선하여 이러한 사례들에 대한 변별의 기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매너리즘에 대하여도 솔직이 대중문학을 표방하면서, '현재 교육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대중의 취향에 어쩔수 없이 맞춰야 한다'하면 뭐라할수 없다. 그러나, 딴에는 우리의 문화를 선도하는 고급예술문학을 표방하면서 그리하니, 자가당착적이며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토인문학만을 고집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한글만으로도 '좋은' 글을 잘쓰는 작가들은 많다. 아프리카 토인의 고유어만을 가지고도 좋은 문학작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어휘로 문장을 무리없이 구성하는 일종의 기교 혹은 기술이 우리문학에서는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문장구성의 기술습득에만 많은 노력을 투입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주제포착력과 풍부한 어휘사용력 배양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작가는 사회의 정신적 지도층이 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전문기술을 가진 직업인화 되는 것이다.
이전에 프랑스에서는 저네들의 글자에 점찍거나 꼬리달린 것 등이 실용적으로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을 없애도 좋도록 맞춤법을 개정한다고 하니까 文人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 어찌 우리말의 오묘한 맛을 없애려 하냐고... 그러니까 당국자가 하는 말은, 여러분의 항의는 지극히 온당하다, 앞으로도 문학작품에 그대로 점찍고 꼬리달고 쓰라고... 다만 앞으로 신속을 요하는 실용문에서는 그런 것 없이도 괜찮도록 하는 것 뿐이라고... 였다.
이 사례에서 우리의 방식과의 다른 면을 보았다. 그들에게서 문학어는 실용어의 超集合(superset)이다. 당장에 꼭 필요하지는 않아도 언어의 잠재적인 확장성을 위해서 문학어는 편의성을 희생해서라도 실용어보다 더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문학어는 실용어의 방향을 이끌고 啓導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꼭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문학어는 실용어의 部集合(subset)이다. 설령 실용어 이상으로 쓰는 언어가 있다 하더라도 거의가 '지청구', '고샅', '밭은 기침', '도리질' 등의 末端語들일 뿐이다. 이들 낱말들은 읽는이에게 우리말의 색다른 자료를 제공하는 효과는 있을지라도 어떤 派生力있는 사고력을 증진시켜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경량급' 문학은 '민중지향적' 이념 외에는 그 안에 어떤 짙은 思想을 담기가 어렵다.

우리 전통 글양식의 복원
우리 옛 여인은 우물가에서 나그네가 물을 달라할 때 표주박에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고 한다. 목이 마른 나그네가 물을 함부로 들이켜 체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지혜로운 배려였다. 우리의 전통문화는 빠르고 경박한 것 보다는 慇懃(은근)하고 鎭重한 것을 추구하며 마음을 수양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글공부를 할 때나 글을 쓸 때 '편안한' 자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곧고 바른 자세를 유지하라고 했는가 다 이유가 있었다. 세로쓰기의 글양식은 그러한 우리의 전통문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가로쓰기가 읽기 편하다는 것은 마치 똑바로 앉아 있다가 기대앉으면 긴장이 풀려 편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남의 思想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쉽고 편하게만 하지 말고 되도록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여 精讀을 유도하는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것을 문학의 상층부에서 지키게하고 권장해야 마땅하거늘 오히려 무너뜨리는데 앞장섰으니 어찌 우리문학이 온전히 이어왔다고 할수 있겠는가. (또 귀찮게, '그러면 가로쓰기를 한 서양인들은 어찌 그렇게 나라가 발전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독서를 하는 것은 왜 따라하지 않는가.)
좌익에 의해 변질된 문학을 원상회복 시키는 것은, 이미 남발되어 의미가 바랜 낱말인 民族精氣를 되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좌익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아무리 '탈이념화'된 문학을 추구한들 그것은 跋扈(발호)하는 좌익문화의 기세를 막기 위해선 역부족이다. 완전한 우리문학의 복원 즉 르네상스만이 이념에 물들지 않은 참 문학을 일으키는 길이다. 赤菌을 옮기는 벼룩을 퇴치하기 위해서 예전에는 살충제(반공문학)를 사용했지만 이미 면역성이 강해진 벼룩에게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청결히 몸을 간수하는 자에게 벼룩이 기생할수 없듯이 우리의 전통문화의 氣로 충만한 문학이 문화계의 상층부를 占하고 있으면 좌익문화는 파고들 여지가 없어 저절로 퇴치될 것이다.
일찍이 60년대의 저항詩人 金洙暎은 당시의 암울한 시기를 딛고 언젠가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단단하고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복사씨와 살구씨가 사랑에 미쳐 날뛰는 세상은 정말 벅차게 기대되는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대사는 實로, 붉은 속살의 열매를 키울 그날을 기대하며 설레이는 수박씨와 석류씨가 이념에 미쳐 날뛴 날이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들 그 시절의 集團狂氣로부터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
(한국논단 19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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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2003-03-20 09:54:42
이글을 복사해서 그대로 올리시다니.. 쩝...

작성자 2003-03-20 11:17:36
관심 감사합니다. 모양이나마 조금다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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