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는 어디에 간 걸까.
아침부터 연락두절이었다. 태진은 그녀와 함께 식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연락조차도 없었다.
태진은 거실의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병아리 솜털 같은 따뜻한 봄 햇볕이 온몸에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오디오의 리모컨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 생상스의 가극 '<삼손과 델릴라>의 '‘그대 목소리에 나의 마음은 열리다’가 흐르기 시작했다. 델릴라가 삼손을 유혹하여, 삼손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고 부르는 유명한 사랑의 노래였다.
‘'…… 그대 말에 내 마음은 아침에 피는 꽃처럼 열린다.
제발 맹세해 주세요, 델릴라.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
고…….’
태진은 노래를 들으며 진희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어렸을 적에 전라도 깊은 산사에 버려져 스님들이 거두어 길렀고, 그곳에서 무술하는 스님들로부터 무공을 배웠다는 정도와 기 치료 수입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상수 PD를 납치해 왔을 때도, 이만덕 회장을 납치해 왔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그들에 대해 불타는 듯한 적개심을 보였다. 그리고 너무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다루었다. 평상시에 본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순간순간 얼굴에 드리워지던 어두운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때 보면, 창가에 앉아 뭔가 깊은 생각에 젖어있을 때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범접하지 못할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수수께끼 같은 여자였다.
음악을 듣는 것도 싫증이 났다.
소영이라도 불러내 드라이브라도 하면 좋으련만, 그녀는 촬영차 로마에 가고 없었다. 일 주일 후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음악을 끄고 벌떡 일어섰다. 어딘가 한바탕 쏘다니면 답답한 마음이 풀릴지도 몰랐다. 벽에 걸린 옷 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거리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통조림 속의 번데기들>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언젠가 술 안주로 먹은 번데기 통조림이 생각났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까. 서울이라는 통조림통 속에 갇혀서, 그 속의 번데기처럼 몸을 비비며,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
태진은 횡단 보도 앞에 섰다.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자, 사람들이 밀물처럼, 썰물처럼 쓸려갔다. 태진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파란 불이 세 번째 바뀌어서야 길을 건넜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끼여 번데기 중 하나가 되어 무작정 걸었다. 다리가 아플 때까지. 길은 끝없이 이어지고, 그 길이 끝나는 곳까지 걷고 싶었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걸을지는 자신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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