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폭동 최후의 폭도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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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폭동 최후의 폭도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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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6.25 말기의 폭도들

▲ 제주 4.3 자료 사진 ⓒ뉴스타운

5. 6.25 말기의 폭도들

1952년 하반기에 이르러 경찰은 잔비색출 소탕작전과 병행하여 폭도들에 대한 선전공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산자에 대해서는 안전을 보장하고, 따뜻한 동포의 정으로서 대한다는 사항을 홍보하는 대민공작에 나섰다. 관대한 취급을 받고 가족들과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귀순자들을 홍보에 동원하기도 하고, 하산 권고문이 산중 곳곳에 게시되기도 했다.

귀순 폭도들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폭도들의 소규모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1952년 11월 20일 경의 폭도들의 숫자는 44명으로 파악 되었다.

1953년에도 경찰들의 폭도 색출과 폭도들의 마을 습격은 빈번하게 발생했다. 1월 24일에는 중문면 중문리에 무장공비 약 20명이 침입하여 경찰과 교전 중에 경찰과 2명과 협조원 2명이 사망하였다. 중문리를 습격했던 폭도들을 추격 중인 경찰은 25일 상오 한라산 서북방 지대에서 약 3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무장공비를 발견하여, 교전 끝에 적의 아지트를 점령하고 무장공비 5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26일 하오에는 한라산록 붉은오름 근처에서 약 50명의 무장공비와 교전 끝에 공비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이외에도 M1총 2정, 동 실탄 다량, 축우 5두, 우마육 약 4두분, 식량 3표(俵), 배낭 10개, 모포 10매, 불온문서 등을 노획했다. 1월 30일에는 중문면 월평리에 무장공비 약 30명이 습격 해와 경찰이 격퇴시켰다. 3월 23일에는 조천면 교래리 밀림을 수색하던 경찰이 약 15명의 무장공비를 포착하여 치열한 교전 끝에 공비 3명 사살, 생포 1명, 그 외 무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3이 발발한지 만 5년이 되는 1953년 4월경에는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들의 숫자는 3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4월 15일에는 조천면 와흘리 산록 부근에서 김의봉이가 지휘하는 약 20명의 무장공비와 40분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김의봉과 중요 간부 강봉오 등을 사살하고 무기와 문서 등을 다량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김의봉은 3대 사령관을 지냈던 거물 폭도였다. 김의봉의 시체는 경찰국 뒷마당으로 운반되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시체 복부에는 2발의 총탄이 관통되어 있었는데 차림은 상의는 한국제 군복, 하의는 일본제 군복, 내의는 미제, 신발은 일본제 군화에 면도도 하고 회중시계, 만년필, 자석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5월 17일에는 애월면 납읍리 동남방 도로상에서 경찰관으로 가장한 무장공비 8명이 출현하여 남녀 2명을 납치하고 우마 8마리를 약탈하여 갔다. 5월 31일 경찰은 한라산 서부지구 북방 약 2km 지점에서 적의 본부거점을 발견하고, 김성규가 지휘하는 무장공비 20명을 포착, 치열한 공격전을 전개했다. 폭도 1명을 사살하고 피랍자 4명을 구출했다. 7월 10일에는 한라산록 남송악 서방 밀림지대에서 약 13명의 무장공비를 포착하고 공비 1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을 노획하였다.

7월 16일에는 한림면 동명리 속칭 ‘병두선’에 약 9명으로 추산되는 무장공비가 침입하여 야간경비를 서는 주민 1명을 살해했다. 7월 21일에는 약 8명으로 추산되는 무장공비가 조천면 북촌리 동부락에 침입하여 아녀자 3명을 납치하고 식량 등을 약탈했다. 7월 26일에는 완전무장한 공비 7명이 제주시 오라리 부락에 침입하여 말과 양곡을 약탈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한라산 쪽으로 도주했다.

11월 2일 경찰은 중문면 다래오름 부근에서 약 8명으로 추산되는 공비를 포착하여 2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무기와 실탄 다수를 노획했다. 이것으로 1953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한라산에 남아있는 폭도는 12명으로 줄어들었다.

두목 김성규를 사살하거나 생포 또는 귀순, 중간 역할로써 그 자를 사살이나 타살하였다는 확증을 경찰관에 제시, 시체 인도하였을 시는 구대(舊貸)로 금 1,000만원을 지급하겠다는 현상금이 걸렸다. 기타 구비(舊匪) 1명에 대하여서는 금 100만원을 각각 상금으로 수여할 것이며 귀순 공비들에게도 동일하게 수여하고 즉시 자유를 주겠다는 현상도 걸렸다.

11월 27일에는 구좌면 평대리 산간지대에 약 10명의 잔비가 출현하여 부근에서 방목하던 동네 청년 1명을 납치하고 축마 26두를 약탈하여 갔다. 뒷날에는 이를 추적한 경찰이 공비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오후 1시경에는 한라산 어후악 동부지구에서 약탈된 축마 25두가 발견되었다. 12월 5일에는 아라리 남방 1km 지점에 5명의 잔비가 출현하여 방목하는 소 4두와 말 3두를 약탈하고, 도남리 주민 1명을 납치하여 돌멩이로 전신을 타박하여 학살했다.

12월 24일에는 공비 1명이 사살되고, 12월 29일에는 여비 1명이 탈출하여 귀순하였다. 이로써 1954년이 밝아올 무렵에 한라산의 잔비는 여비 2명을 포합하여 합 6명이 전부였다. 6명의 폭도는 두 갈래로 분열되어 상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고, 4명의 남비 중 2명은 총상을 입고 있었다.

1954년 2월 16일에는 1명의 여비가 탈출하여 귀순함으로서 잔여 잔비는 1명의 여비와 4명의 남비를 합하여 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연명에 급급하며 도주를 거듭했고, 다가오는 최후의 운명 앞에 이들은 인민해방군도 아닌, 항쟁투사도 아닌, 그저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절도범에 불과했다.

이들 5인방이 상당히 오랜 기간 포착되지 않자 1954년 9월 21일을 기하여 한라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4.3 정부보고서에는 한라산이 개방된 이 날짜를 제주 4.3의 종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한라산에는 5명의 무장공비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제주 4.3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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