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폭동 최후의 폭도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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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폭동 최후의 폭도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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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폭도들의 융성기

▲ ⓒ뉴스타운

2. 폭도들의 융성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의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히 경찰지서 12군데를 기습하면서 4.3은 발발했다. 그리고 4월 10일 남로당 제주도 유격대는 인민해방군의 이름을 내걸고 극악 반동분자는 엄벌에 처하며, 인민해방군에 적극 협력하라는 요구와 함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투쟁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경찰관을 살해하는 데에는 보상금이 걸려 있었다. 경찰을 살해하는 폭도에게는 순경 1인당 1만 원을, 경사 1인당 1만 5천원을, 경위급 이상 1인당 2만 원이 지급되었다. 폭동에 사용된 칼들은 전라남도의 민주애국청년동맹에서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폭동을 진압해야 할 9연대는 제주인민해방군에 호의적이었고, 국방경비대 김익렬 9연대장은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과 접촉에 나서면서 혼란을 키웠다. 김익렬 연대장이 진압에 미온적 입장을 취한 것은 결정적으로 인민해방군에 시간을 벌어줬고,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월 10일 제헌선거는 제주인민해방군에 의해 파탄을 맞았다.

4.3 폭동은 바로 5월 10일 실시되는 대한민국 제헌의회 선거를 방해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5월 10일이 다가오면서 제주도는 폭동 당일보다 더한 지옥으로 변모했다. 선거관리위원이나 동조자에 대하여 남로당의 살인협박과 테러가 횡행했고, 투표소가 습격당했다. 협박에 견디다 못한 선거관리위원들이 마을에서 피신하거나 사퇴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선거 당일에는 폭도들이 아예 마을주민 전체를 산으로 끌고 가버려 선거가 불가능한 마을들이 나타났고, 선거가 진행되는 마을에는 폭도들이 들이닥쳐 투표소를 불태우고 선거관리 인사들을 마구 살해했다.

북제주군 관내 133개소 투표소 절반 이상이 선거인명부를 탈취당하거나 불에 탔다. 선거 당일에만 선거관리위원 15명이 살해되었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피의 5월 10일이었다. 제헌선거가 불발된 곳은 전국에서 제주도가 유일했다. 제주도 3개 선거구에서 2개 선거구는 1년 뒤에야 정상적인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진압군 측에서는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박진경 중령을 9연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9연대가 상황파악 부족과 부대 정비 사정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인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5월 20일에는 진압에 불만을 가졌던 남로당 병사들이 대규모 탈영하여 폭도 측에 가담하는 일이 벌어졌다. 비로소 폭동 진압에 대한 전적인 임무가 경비대에 맡겨졌다. 진압군이 진압다운 진압에 나섰던 것은 5월 22일부터 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경진압에 불만을 가졌던 9연대 내의 남로당 프락치 병사들이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6월 18일 승진 축하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취침 중인 박진경 연대장은 그의 부하들에게 총을 맞았다. 체포된 범인들은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되었다.

7월에 접어들면서 폭동은 약간의 소강상태를 맞았다. 남로당에서 지하선거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하선거란 북조선 정권을 수립하는 남한 대표 대의원을 비밀리에 뽑는 선거였다. 남로당에서는 야간에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백지에 서명을 받거나 손도장을 받기도 했지만, 대낮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단체로 서명을 받는 일도 있었다. 8월초 제주인민해방군 1대 사령관 김달삼이 월북할 때 싸들고 간 지하선거 투표용지는 모두 52,350명분이었다. 제주에서는 모두 6명이 북한의 대의원으로 참석했고, 김달삼은 주석단 일원으로 뽑혔다.

대한민국 건국 선거에는 폭동으로 반대하는 모습과, 북조선 수립 선거는 지하선거까지 하면서 열렬히 지지하는 두 개의 모습이야말로 제주 4.3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고, 9월 9일이 북조선 정권이 수립되었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설 조짐이 보이자 힘을 받은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9월 초부터 다시 폭도들의 습격이 재개되었고, 제주도에는 인공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갓 탄생된 정부에서도 4.3을 심각하게 보기 시작했다. 4.3은 폭동을 넘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반란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9월초부터 제주도로 응원군이 증파되기 시작했다. 2대 사령관 이덕구 체제로 정비한 폭도들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4.3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삐라가 곳곳에 나부끼고,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곳곳에서 피살당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진압 파견명령을 받은 경비대 14연대가 제주도로 출발하기 직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0월 19일 여순반란사건이 격발되는 순간이었다.

제주 4.3 폭동과 여순반란사건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연속하여 발생한 공산주의 사건으로, 이 두 개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에 반공이라는 DNA를 깊숙이 새겨 넣었다.

11월부터 강경진압이 전개되었다. 바야흐로 제주도의 ‘잔인한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 지역에 주민 소개령이 내려졌다. 소개령을 거부하는 마을에서는 잔존주민이 폭도 간주되어 즉결처분이 벌어지기도 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4.3 폭동 초기에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무기탈취, 탈영병 가세 등으로 화력이 급증하여 경기관총, 중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무장할 정도였다. 북한 정권의 수립으로 사기가 오른 제주인민해방군은 대한민국 정규군과 대등할 정도의 전투를 벌였고, 매복전과 기습으로 경비대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심지어 정규군 1개 중대를 전멸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에 들어서면서 제주인민해방군은 주요한 몇 개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맛봄으로서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전투에서 제주인민해방군은 96명이 사살되고 14명이 생포되었다. 2월 16일 남원 전투에서는 160여 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3월말에는 경비대 4개 대대가 동원되어 대규모 수색전 벌이다가 녹하악오름 근처에서 이덕구가 진두지휘하는 1천여 명의 제주인민해방군과 조우했다.

유격대 178명이 사살된 녹하악 전투는 제주인민해방군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이 전투 이후 제주인민해방군은 다시는 경비대를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벌이지 못했다. 제주인민해방군은 소규모 부대로 분산되어 흩어졌고, 이후 경비대는 소탕전과 귀순공작을 적절히 혼합하는 작전을 펼치면서 폭도들의 주력부대는 와해의 길을 걸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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