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가면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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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가면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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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지?”
“2분 전요.”

태진과 진희는 거실에 앉아 두 대의 텔레비전을 주시했다. 각종 광고가 빠른 화면 전개와 함께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태진은 두 사람이 보낸 비디오 테이프가 어느 정도까지 보도될지 초조했다. 녹화 준비도 끝마친 상태였다.

드디어 아홉시 시보가 울렸다.

KBS, MBC가 스타트 뉴스로 이 회장의 피살을 다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진은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두 방송은 마치 합의라도 한 듯이 거의 비슷한 수준의 내용을 내보내고 있었다. 내용도 부실했고, 테이프도 흐리게 화면 처리를 해서, 두 사람이 노린 효과를 반감시켰다. 오히려 이 회장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소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사건의 핵심인 본질에 대해서는 어물쩡 넘어갔다. 차라리 신문의 호외만도 못한 알맹이 없는 내용이었다.

“예상했던 대로예요.”

진희도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태진은 허탈한 기분이었다. 누군가 윗선에서 방송국에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추세라면 내일 석간에 나올 내용도 보나마나 뻔했다. 매스컴들은 그렇고 그런 내용으로 도배할 것이다. 태진은 녹화하던 비디오를 꺼 버렸다. 녹화해서 다시 볼 가치조차 없었다.

“실망했어요?”
“…….”

태진은 진희의 물음에 대답 없이 담배를 뽑아물었다.

“이제 2단계 작전을 펼쳐야죠.”
“2단계 작전?”
“그럼 제가 그렇게 쉽게 물러설 줄 알았어요? 저들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착각?”

진희의 말은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요. 착각이잖고요. 어떻게든 튀고 싶어서 안달인 잡지와 신문은 얼마든지 있어요.”

아, 맞다!

태진은 왜 거기까지 생각을 못했는지, 명색이 방송작가라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느끼는 거지만, 진희는 자신보다 세밀했고, 한발 앞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빅 뉴스를 잡지사나 주간 신문사에 보내면, 판매 부수와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특집으로 다룰 것이 틀림없었다. 없는 사건도 꾸며 진실처럼 보도하는 형편에, 이 회장의 죽음을 녹화한 테이프까지 동봉해서 보낸다면…….

“그렇다면 비디오 테이프를 더 복사해야겠구만.”
“당연하죠.”

태진은 테이프를 방송국과 신문사에 부칠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두 사람이 처단한 색마의 지난 날이 낱낱이 공개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냄새나는 사체를 석회로 덮어버리듯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우리 일을 공개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언론에서도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을 거예요.”
“공개적으로? 무슨 뜻이지?”
“이 회장과 같은 파렴치한 색마들을 더 색출해서 살해할 거라고 공개하는 거죠.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번 이 회장 사건을 가장 비중있게 자세히 다룬 방송사나 신문, 또는 잡지에 앞으로 사건 기록 테이프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는 단서를 다는 거예요. 어때요, 내 생각이?”
“베리 굳!”

태진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각 방송국이나 신문사, 잡지사 등에 진희가 말한 대로 편지를 보내면 엄청난 반응이 올 거 같았다. 전 국민의 관심사인 사건을 놓치기 싫어서라도 앞다투어 심층 보도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과 같은 엉터리 보도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태진은 진희를 꼭 끌어안고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이 방송사나 신문사의 사장이래도 놓치기 싫은 거래였다. 만약에 한 곳에서만 계속해서 사건의 테이프를 제공받아 터뜨린다면, 방송의 시청률이나 신문 부수, 잡지 부수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 뻔했다. 그들은 하늘이 내려준 이런 기막힌 기회를 서로 차지하려고, 그래서 테이프를 독점으로 받으려고 불꽃 튀는 경쟁 보도를 할 것이 틀림없었다.

며칠 후.

잡지와 주간 신문들은 두 사람의 의도대로 이 회장의 사건을 특집으로 편집해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그것도 경쟁적으로 비디오 테이프를 근거로 이 회장의 고문당하는 모습과 고백을 몇 페이지씩 할애했다. 몇몇 주간 신문과 잡지는 태진이 보낸 편지의 전문을 그대로 싣기도 했다. 이제 방송이나 일간 신문에서도 이 회장 살해 사건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몇만 모여도 온통 이 회장에 관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동안 베일에 가린 듯 숨겨져 있던 여자 관계들도 속속들이 파헤쳐졌다. 기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 진희나 태진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내용들까지도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드러났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 회장을 처참하게 살해한 두 사람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국민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려 그런 지저분한 인간을 잘 처치했다는 심정적 동조를 보내기 시작했다. 일부 매체를 보면, 은근히 다음 사건을 기다리고 부추기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우린 성공한 거야.”
“그래요. 확실히 성공했어요.”

이 회장 사건을 다룬 신문과 잡지들은, 태진이 두 팔로 안아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회장의 난잡한 사생활은 끊임없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이제 이 회장이 처참하게 죽었다는 동정에서 점차 맹렬한 분노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 회장의 그런 죽음을 보며 은근히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기는 이른 새벽부터 별이 보이는 밤까지 허리가 휘도록 일 년을 일해도 벌지 못하는 액수의 돈을 하룻밤 화대로 가볍게 날린 이 회장을 드러내놓고 욕하기까지 했다.
태진은 아침에 신문과 잡지들을 구입하러 시내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이 회장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개새끼! 그런 놈은 열 번을 뒈져도 싸다고. 그래, 하룻밤 기집년을 끼고 잔 화대로 지금같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세상에 수천만 원을 줬단 말야? 저희 회사 종업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정리 해고를 시켜 고개 숙인 가장을 만드는 판국에…… 그리고 차고 넘치는 게 여잔데, 영화 배우나 탤런트, 모델은 뭐 거기에다 금테를 두르고 다이아몬드라도 박았나? 발가벗겨 놓고 보면 다 똑같은 게 여자 아니냐고. 내 말이 틀렸어?”
“맞아. 그리고 여비서들도 몇 달이 멀다하고 계속 바꿨다잖아. 그 새끼는 L호텔 이발소가 단골인데, 한번 관계를 맺은 애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잖아.”

가판대 옆에 선 사내들이, 신문마다 일면 톱으로 장식한 이 회장에 관한 기사들을 훑어보며, 이 회장 성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범행을 저지른 녀석들이 또 이 회장과 같은 놈들을 납치해서 살해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잖아. 평소에 난잡한 생활을 한 놈들은 지금쯤 등골이 오싹하고 똥줄께나 탈거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터진 뒤로는 고급 요정이나 룸 살롱에 손님이 없어 파리를 날리고 있대잖아.”
“하긴 나라고 해도 무서워서 함부로 그런 곳에 드나들 수 없겠다.”
“난 이 회장을 죽인 애들을 한번 보고 싶어. 솔직히, 아무도 모르게 만날 수만 있다면 포장마차에라도 데리고 가서 닭똥집에 소주라도 한 잔 사주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그들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화이트 칼라들이었다. 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가는 그들까지 예상 밖으로 심정적 동조를 보낸다는 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는 일들이 적어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태진은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얼마나 짜릿한 쾌감을 느꼈는지 몰랐다. 그들 앞에 당당히 나서서 '‘내가 바로 그 더럽고 냄새나는 늙은이를 살해한 당사자요’라고 떳떳히 밝히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태진은 들뜬 마음으로 샴페인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성공을 위해서 자축해야지?”
“좋아요.”

태진은 이번 일의 주역인 진희의 잔을 채웠다. 다음엔 진희가 그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잔을 쨍 소리가 나도록 건배한 다음 단숨에 잔을 비웠다. 또 한 잔의 샴페인이 두 사람의 잔에 채워졌다.
이번에는 진희가 잔을 들고 외쳤다.

“두 번째 성공을 위하여!”
“굳!”

태진은 맞장구치며 잔을 또 부딪쳤다.

두 사람은 편안한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볼 것이 없는 은밀한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다. 이제 그들은 공범이었다. 같은 목적을 가진,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지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무도 모르는, 두 사람만이 공유한 비밀이 있다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깊은 신뢰를 줄 수 있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리라. 그 은밀한 즐거움을.
취했다.

태진도 진희도 취했다. 탁자 위엔 세 병째 위스키병 뚜껑이 열려있었다. 진희는 술잔에 술을 따른다고 옆에 따르기도 하고, 잔에 넘치도록 따르기도 했다. 진희의 눈이 풀려가고 있었다. 태진은 그녀가 이토록 취한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춤출까?”
“좋아요.”

진희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와서 태진에게 안겼다.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는다고는 하지만 엉망이었다. 그것은 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희는 아예 태진의 품에 안겨버렸다. 태진은 진희의 어깨를 감싸안고 이마에 입술을 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음악에 취해 뼈가 없는 연체 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희가 무너지듯 거실 카펫 위에 누워버렸다. 태진도 옆에 따라 누웠다. 진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진희의 길다란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이 오늘따라 더욱더 매혹적이었다. 태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볼과 귓불을 만졌다. 진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이 오르내렸다. 너무도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태진은 진희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그대로 있었다. 태진은 그녀의 닫힌 입술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놀란 조개껍데기처럼 굳게 닫힌 진희의 입술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태진은 진희의 목을 억세게 끌어안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열리지 않는 입술을 열기 위해 억지로 진희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었다.

한참 후 입술이 열리고, 진희는 태진의 혀를 받아들였다. 태진은 손을 뻗어, 도발적으로 솟아오른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아파요.”

진희는 얼굴을 찡그렸다.

태진은 진희의 셔츠를 급하게 밀어올리고, 젖가슴을 가리고 있는 브래지어마저 밀어올렸다. 그리고 팽팽하게 긴장된 젖가슴으로 입술을 옮겼다. 완두콩만한 유두가 입 속에 쏙 들어왔다. 턱수염으로 젖가슴을 비비며 탐욕스럽게 유두를 애무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태진은 느꼈다.

어쩌면 오늘 밤, 두 사람이 지금껏 어렵게 지켜온 관계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 침대에서 그렇게 수많은 밤을 지새우면서도 넘어서는 안 될 선만은 지켜왔다. 하지만 그 마지막 선이 무너질 것만 같은 예감이었다.

“진희야, 네 몸이 너무 뜨거워.”

태진은 진희의 젖가슴에서 입술을 떼며 말했다. 어느새 진희의 몸은 모닥불 속에서 건져낸 감자처럼 달구어져 있었다.

태진은 천천히 진희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었다. 브래지어마저 벗겨냈다. 바지는 꽉 죄어 조금은 애를 먹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벗겨냈다. 이제 진희가 걸친 거라곤 손바닥만한 팬티 뿐이었다. 불빛에 드러난 몸매가, 술에 취해 불그스름하게 물든 몸매가 매혹적이었다. 태진은 심호흡을 하고, 앙증맞게 걸쳐진 팬티마저 밀어내렸다.

그 순간, 진희는 태진의 손을 꼭 잡고 억세게 포옹했다. 그리고 태진을 바닥에 뉘고, 태진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그가 걸친 거추장스런 껍질들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느 새 태진도 모든 껍질이 벗겨지고 팬티만 남았다.

“내 포로야…….”

진희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태진을 향해 격렬하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한덩어리가 되었다. 진희가 이렇게 적극적인 모습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태진의 남자는 당장이라도 폭발을 앞둔 활화산처럼 부풀어올랐다. 태진의 손은 거침없이 진희의 여자를 더듬었다.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과 동시에 촉촉함도 느껴졌다. 진희의 여자는 어느 새 젖어 있었다. 태진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뜨겁게 달아오른 태진의 남자가 여자에게 서서이 접근해 갔다. 이제 태진의 남자가 여자 속으로 들어가며 끝도 알 수 없는 늪으로 침몰하기 직전이였다.

“안 돼!”

진희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태진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태진은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진희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세요.”

진희가 손을 내밀었다.

태진은 갑작스런 진희의 마음의 변화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면서도 내민 손을 잡았다.
“…… 하마터면 후회할 일을 저지를 뻔했어요.”

진희의 얼굴은 그 짧은 시간에 본래의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누가? 내가? 진희가?”

태진은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허공에 길게 내뿜었다.

“둘 다요.”
“둘 다?”

태진은 진희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소영 씨를 생각했어요.”
“!”

그 순간 태진은 진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영’이란 말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욕정의 불씨가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인간의 욕정이란 이토록 허망한 것일까. 방금까지 그토록 터질 듯이 머릿속을 꽉 채웠던 욕정이 순식간에 이렇게 거품처럼 사그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토록 허망한 것을 위해서 인간들은 때론 목숨까지도 걸고 갈구한단 말인가. 이토록 부질없고 허망한 것을 위해서…….
“난 아직 남자를 몰라요.”
“…….”

왜 갑자기 진희는 자신이 처녀임을 밝히는 것일까. 진희에게 처녀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밤을 함께 지새면서 마지막 선을 넘지 않았을 뿐, 서로의 육체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않은가. 진희는 마지막 선만 넘지 않는다면 자신이 순결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자에게 있어 순결이란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태진은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은 소영 씨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태진은 기분이 언짢은 상태였다.

뭔가? 지금 진희는, 자신이 소영이를 사랑하기 때문에 대타로는 섹스 파트너가 되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것이 아니면,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왜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려고 하느냐는 질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순간에 소영이를 들먹이는 까닭이 뭐란 말인가.

“소영 씨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것은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소영이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결혼 얘기를 먼저 꺼낼 정도로 믿고 있었다. 망설이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그것은 소영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과의 결혼으로 인해 절정기인 그녀의 인기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그녀의 인기와 명성에 결혼이란 굴레로 흠집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녀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청혼을 흔쾌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먼저 청혼을 했을 것이다.

“진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태진은 그녀의 의표를 찌르듯, 가장 예민한 곳을 건드리고, 눈을 똑바로 보았다.

“…….”
진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런 태진의 눈길을 서둘러 피하며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왜 사랑은 꼭 하나뿐이어야 하지? 왜 한 사람뿐이어야 하
느냐고?”
“…….”

진희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태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 가를.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학이었다. 어쩜 그 물음은 자기 자신에게 던진 것인지도 몰랐다.

태진은 진희를 사랑하고 있었다. 소영이에게 쏠리는 만큼은 아닐지라도, 진희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진희는 자신이 힘들 때 의지하고 싶고 외로울 때는 언제라도 찾아가 안기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학하지 마세요. 난 선생님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한다해도 이미 선생님 마음을 알고 있단말예요.”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진희의 눈에 물기가 어려왔다. 태진은 그런 진희의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도 진희처럼 눈물이 핑 돌았다. 동병상련. 두 사람은 이미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태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두 여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소영이와 진희였다.

진희가 태진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태진은 진희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서서히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 상태로 나란히 앉아 창 밖을 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희였다.

“하마터면 일생 일대의 후회할 일을 저지를 뻔했어요.”
“…….”
“둘 다요.”
“…….”

태진은 진희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뚝처럼 꼼짝도 않고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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