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난간에 기대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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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난간에 기대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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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순 아지매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벌써 20년전의 일인데, ‘배란다(裵蘭茶) 여사’라고 하는 연재 만화가 있었다. 왈순 아지매로 유명한 전운경 화백의 작품으로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주부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었는데, 주부 대상의 여성 잡지에 연재되었다. 1980년대에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중산층에 속했던지 호칭 조차 아지매가 아닌 여사였는데, 그 이름이 베란다를 음차한 ‘배 란다’라는 것이 흥미롭다.

베란다는 한옥에도 양옥에도 없는 오로지 아파트에만 있는 공간이고 보니, 베란다로 아파트 전체를 환유한 모양이다. 기실 아파트와 베란다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베란다가 없는 아파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 어느 아파트의 베란다 모습샷시를 설치한 집, 하지 않은 집, 빨래를 너는 집, 블라인드로 가린 집,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베란다의 표정도 제각각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아파트로는 지금부터 2,000년 전, 제정 로마 시대의 ‘인슐라(insular)’를 꼽는다. 이것은 1층에 상가가 있고 그 위에 주택이 있는 3,4층짜리 건물로서, 이른바 저층식 주상 복합 아파트에 해당한다.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이 개선 장군의 시가 행진을 3층 옥상에서 구경하다가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데, 그것이 하필 장군이 탄 말의 머리에 맞아 장군이 크게 노하는 장면이 있다. 그 때의 집이 바로 인슐라로, 인구가 밀집한 시가지 주변에 밀집해 있었다. 로마의 부자들은 ‘도무스(domus)’라고 하는 널찍한 단독 주택을 짓고 살면서 서민과 노예들에게 셋방을 주기 위해 인슐라를 지었는데, 기왓장이 길거리로 떨어지는 사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실과 날림 공사로 문제가 많았다. 세를 많이 받기 위한 욕심에서 무리하게 8층이나 되는 고층 건물을 지었다가 붕괴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A.D 8년 7월,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한다. 당시의 황제는 네로였는데, 휴양 차 별궁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화재 소식을 듣고 곧바로 시내로 돌아와 화재 진압에 노심초사했다. 폭군인 그가 불타는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며 하프를 켜고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폭군, 성군을 떠나 황제에게 민가와 시민은 개인 재산이나 다름 없는데, 귀중한 재산이 불타고 있는 것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솔직히 아무도 없다.

6일 동안 계속된 화재는 로마 시내의 절반을 태워 버렸으며, 이후 네로는 이 곳에 체계적인 도시 재개발을 실시한다. 소방과 진화에 유리하도록 격자형 도로를 내고 인슐라를 질서있게 배치하는데, 이 때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각 인슐라는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최고 높이를 70피트 즉 21m 이내로 한다(이러면 8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가 없다), -각 인슐라는 화재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서로 10피트 이상의 이격 거리를 둔다, -인슐라에는 화재 시 다른 층이나 옆 세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발코니를 둔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원칙들은 현대의 아파트에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물론 수치와 규모의 차이는 있다).

그는 도시 재개발과 건축법을 확립한 최초의 황제였으나, 화재로 파괴된 지역 중 일부에 자신을 위한 대규모의 호화 궁전을 지어 실각을 했다. 도시 빈민굴을 없애고 자신의 궁전을 짓기 위해 의도적으로 방화를 했다느니, 불타는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며 시를 읊었다느니 하는 말들은 호화 궁전의 건축을 빌미로 그를 실추시키려는 반대파에 의해 퍼뜨려진 소문이다.

이렇게 이천 년 전부터 그 설치가 법적으로 의무화된 베란다의 주된 용도는 화재 시 이웃세대로의 피난용이었다. 195,60년대 아파트가 한국에 처음 상륙하던 때에도 약방에 감초가 빠질 수 없듯, 베란다도 함께 상륙했다. 그런데 그 때의 베란다는 지금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 지금은 으레 있기 마련인 알루미늄 샷시가 설치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세대간의 베란다 벽이 육중한 콘크리트 벽이 아닌, 가벼운 철제 난간이어서 이웃집에 사는 주부가 동시에 베란다로 나왔다면 서로 눈이 마주쳐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마치 예전에 낮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간에 부침개 접시가 낮은 담 위로 내왕하듯, 베란다에서도 이웃간에 소통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오래 된 콘도미니엄에 지금도 남아 있다. 콘도미니엄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기는 80년대 초로, 이 때의 콘도는 초기 아파트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단지 며칠을 머물고 갈 콘도를 수리하여 사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마치 각 세대가 복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베란다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가벼운 철제 난간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 그 아래로 테니스 볼이 굴러다닐 정도이다. 이웃 간에 서로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화재가 났거나 도둑이 들었을 때는 베란다로 도망가서 이웃 집에 도움을 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초창기 아파트의 푸른 꿈이 엿 보인다.

이제 배란다 여사뿐만이 아니라 왈순 아지매도 마음껏 아파트에 살 수 있게 된 지금, 베란다는 조금 이상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 곳을 창고로 사용하거나 혹은 확장해서 거실로 사용하는 것 말이다. 아랍인들은 아파트의 침실과 거실에는 양을 재우고 정작 사람은 모두 베란다에 나가 그물 침대를 걸고 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도인들은 베란다에 석유 곤로를 놓고 부엌으로 사용한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베란다를 창고로 사용하거나 확장하여 거실로 사용하는 것에도 필경 이유가 있을 지니, 그 의문은 시골 농가를 방문하고 나서야 풀렸다. 그 곳에서는 툇마루나 마루, 마당 할 것 없이 살림살이들을 쌓아 놓고 살고 있었다. 항아리, 삽, 소쿠리, 오래 된 장롱과 낡은 책상 등 우리가 보통 베란다에 놓고 사는 물건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지금껏 내가 한국의 전통 민가를 본 것은 민속촌 에서였는데, 사실 그것은 아파트 모델하우스와도 같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오로지 보여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일체의 세간을 두지 않는 민속촌의 집들은 당연히 깨끗하고 정갈하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과거 우리의 삶이 항상 깨끗하게 정돈된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는 항상 마당과 툇마루 혹은 마루에 쌓아 두고 사는 것이다.

근대화 무렵의 도시형 한옥을 공부하기 위해 가회동 한옥 보존 지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이제 그 집들은 원래 도면과는 달리 개조를 많이 하여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개조의 방법은 하나같이 툇마루를 터서 방을 넓게 쓰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은 우리의 뿌리깊은 습관이었던 것이다. 별을 보면서 잠을 자야 하는 아랍의 유목민처럼, 실내가 아닌 옥외에서 음식을 조리해야 하는 인도인처럼, 우리도 무엇인가 물건을 쌓아두는 공간과 방이 좁으면 넓힐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침대와 쇼파, 식탁을 놓고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마당과 툇마루에 살림살이를 늘어 놓고 살면서 집이 좁으면 툇마루를 터서 방을 넓히는 그 방식은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다.

아파트는 일견 매우 편리한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을 아직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아파트 내에는 살림살이를 쌓아 둘만한 마당이나 툇마루 하다 못해 창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파트 내에 창고를 마련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를 짓는 회사에서 할 일이니 지금 내가 할 일은 잘 쓰지 않는 살림살이를 버리는 것이 조금 쉬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물건이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소용에 닿지 않는 물건도 쓰일 때를 예비해서 갖고 있어야만 했지만, 요즘은 별로 그럴 필요가 없다.

깨끗하고 널찍해진 베란다에서 난초를 키우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행여 도둑이 들었더라도 베란다를 통해 이웃 왈순 아지매의 집으로 피난할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 땐 아지매의 남편 김소달씨가 속옷 바람에 몽둥이를 들고라도 뛰어나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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