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에 미쳐버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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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 미쳐버리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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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릉 , 정릉으로 달려가다

^^^▲ 정릉뒤산 숲을 배경으로 정릉능침이 고요속에 꼭꼭 숨겨져있었다.
ⓒ 서울시 문화재 홈페이지^^^
‘왕릉을 가다’ 두 번째 장소인 정릉(중종)으로 가보았다. 정릉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위치에 있으며 사적 199호다. 현재 정릉은 같은 능역에 선릉(성종)과 함께 있다. 보통 선정릉 또는 선릉으로 알고 있기에 사람들은 정릉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종은 승하 후에 다음 왕 인종 원년(1545) 1월에 만들어준 묘호이며, 능호는 정릉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며

선정릉 정문으로 들어서서 정릉 능역으로 들어가는 시작인 홍살문을 바로 볼 수는 없다. 삼각형을 기준으로 왼쪽 꼭지점이 성종 능침이고 중간 꼭지점이 성종계비 정현왕후의 봉분이며 마지막 오른쪽 꼭지점 끝자락에 중종 능침이 있다. 문제는 중종 능침이 삼각형 꼭지점에서 한참 늘어져 있다는 것이다.

^^^▲ 선정릉 안내지도기형적인 삼각형 형태로 세곳 능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김신일^^^

^^^^^^▲ 선정릉 안내지도기형적인 삼각형 형태로 세곳 능의 위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 김신일^^^^^^
정현왕후 봉분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산등성이를 오르면 산속으로 잘 다듬어진 산책길이 나온다. 이 때 시간이 오후 5시가 넘어가고 있었기에 등산과 걷기를 적절히 조합한 운동을 하시는 어르신들을 볼 수 있었다. 정현왕후 능에서 가벼운 걸음으로 약 5분에서 10분정도 걸으면 중종 능역이 시야에 시원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도시 빌딩속에 파묻힌 선정릉을 생각할 때 산속에 푹 빠져든 호젓한 ‘중종능침으로 가는 길’은 실로 편안하고 아름다웠다. 입구에서 도심 길가 쪽으로 걸어 중종능역 홍살문으로 바로 들어설수도 있으나 산책길로 돌아 걸어 이곳으로 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 홍살문이곳이 특별한 금기지역임을 알려주는 붉은 문
ⓒ 김신일^^^

^^^▲ 신어도혼령이 다니는 길은 신도요, 왕이 다니는 길은 왼쪽(사진)으로 조금 낮게 만들어진 어도다.
ⓒ 김신일^^^

^^^▲ 판위홍살문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으로 왕이 가마에서 내려 절하는 작은 돌바닥이 보인다.
ⓒ 김신일^^^

일반에게 개방을 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같은 능역에 있는 선릉처럼 이곳에는 능 안내표시판이 없다. 선릉의 경우에는 능침에 대한 세세한 설명이 정자각 근처에 세워져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홍살문을 들어서자 마자 당연히 있어야할 판위가 보이지 않는다. 소실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복구되어야 할 중요한 판위이다. 사진속의 판위는 선릉 홍살문 옆에 있는 것이다.

^^^▲ 정자각선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 사진속의 정자각은 선릉에 있는 정자각이다.
ⓒ 김신일^^^

^^^▲ 정자각 주변 박석들자연스럽게 잘 정렬되어 있어 그 자체로 하나의 고풍스런 느낌이 든다.
ⓒ 김신일^^^

^^^▲ 정자각 왼편 계단인 서계축관이 축문을 태우기 위해 내려가는 계단
ⓒ 김신일^^^

^^^▲ 정릉 소전대 VS 선릉 소전대소전대란 예감이라고도 하며, 축문을 태우는 장소다.
ⓒ 김신일^^^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느 것이 정릉에 있는 '소전대'일까?

오른쪽 있는 사진이 정릉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새로 만든 것임을 알수 있다.

위에서 판위가 없다는 것이 이제 자연스럽게 이해가 간다.

복원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생각을 갖고 해야한다. 돌도 잘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 비각능에 세우는 비석을 보관한 곳
ⓒ 김신일^^^

비석이 세워진 높이를 잘 보자. 정자각과 함께 비교적 높게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곳이 여름철 침수가 빈번한 장소임을 말해준다.

비각 위에 보이는 다양하고 기이한 석물들을 보아라.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썼던, 당시 '죽음의 미학'을 창조해낸 장인들의 솜씨가 느껴진다.

^^^▲ 신로정자각 뒤편에서 작은 동산으로 이어진 혼령들이 다니는 길
ⓒ 김신일^^^

멀리서 바라본 중종능침

정자각 뒤편으로 신로를 따라가면 작은동산(사초지)이 바로 보인다. 이것을 능원이라 한다. 원래부터 산등성이를 깍아 만드는 경우도 있으나 흙더미를 쌓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사초지 꼭대기에 중종능침이 있고 그 뒤쪽으론 산 숲이다.

중종 능침은 현재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다. 사진은 최대한 가까이 찍었다.
능역을 삼등분으로 나누었을 때 가장 ‘상’에 위치하는 것은 능역을 중심으로 망주석(무덤 양옆에 있는 돌기둥)과 혼유석이다. 그리고 능역 주위를 보호하는 석호와 석양의 석물들이다.

가운데 ‘중’의 위치에는 장명등(명복을 비는 의미)이 있다. 여기에는 문인석과 석마도 포함된다. 마지막 무인석과 석마는 ‘하’에 있다. 상과 중을 가르는 기준은 바닥에 일렬로 놓여있는 박석이다. 중과 하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무인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무덤 양옆에 세워져있는 망주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사진에서 능 양옆으로 세워진 가느다란 기둥) 현재로선 음양의 조화, 무덤위치표시 그리고 왕릉의 생기를 보존하기 위한 시설로 여겨지고 있다.

^^^▲ 정자각과 뒤편 사초지정자각 뒤편으로 작은 동산(사초지)이 보인다. 그 끝자락에 중종능침이 있다.
ⓒ 김신일^^^
^^^▲ 정자각과 뒤편 사초지정자각 뒤편으로 작은 동산(사초지)이 보인다. 그 끝자락에 중종능침이 있다.
ⓒ 김신일^^^
조선 11대왕 중종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사이에 아들로 태어난 중종은 성종의 맏아들 연산군에 이은 2번째 아들인 셈이다. 연산군 12년(1506)에 중종반정이 일어난다. 1506년에 즉위한 중종은 1544년(재위 39년) 11월 14일에 승하한다. 19살에 왕위에 오른 셈이다.

아버지 성종이 13살에 왕위에 올라 수렴청정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결코 늦지 않은 나이다.
3명의 왕비와 후궁들에게서 9남 1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아버지 성종은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었다.

2005년 정릉

현재 개방되지 않는 이유로는 원형 보존을 위해서라고 한다. 확인을 할 수는 없었으나 중종능침에 있는 무인석의 코가 일반적으로 좀 컸다고 한다. 옛날 이곳을 찾아왔던 여인네마다 그 코를 갈아 갔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코는 상당히 망가져 있을 것이다.

정릉 건너편도 선릉과 마찬가지로 도심 길가다. 그러면 “왜 왕릉전체 주위가 바로 도심 속으로 연결되었을까?” 의문을 가져보았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우리 땅을 개발하거나 식량문제로 농지로 개간하면서 그 영향이 왕릉 주위까지 미친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왕릉을 훼손하거나 기를 꺽어 버리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문정왕후와 역사의 가정

중종은 단경왕후 정비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7일 만에 폐위 되고 만다.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이 중종반정에서 반대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계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죽는다. 이어 등장하는 여인이 희대의 왕후인 2계비, 문정왕후이다. 그녀는 명종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능은 당시 그녀의 세력만큼이나 오늘날 잘 알려진 ‘태릉’이다.

문정왕후는 사후 자신의 무덤을 중종 곁에 묻으려한다. 그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의 시작이었다. 처음 중종의 능은 고양군에 있는 서삼릉 능역에 있는 1계비 희릉에서 오른 편 언덕 쪽에 조성했다. 그곳이 원래 정릉이었다. 잘 모셔져 있는 능을 문정왕후가 ‘천장’(왕릉을 이전)을 하려했다. 여기에는 당시 승려였던 보우가 합작한다. 이전한 장소가 지금의 선정릉이다.

그리고 중종능을 선정릉으로 옮긴 후에 문정왕후는 그녀도 이곳에 함게 묻히길 원했다.
그러나 역사는 꼭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더 많다.
현재 정릉이 있는 이곳은 여름에 침수가 잘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현재의 재실(공사중)도 다른 왕릉보다 높이가 높다고 한다.

계속된 침수예방에 돈은 자꾸 들어가고 결국 문정왕후 사후에 그녀의 힘도 함께 사그러지면서 그녀 또한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의 ‘태릉’에 묻히게 된다.
결과적으로 잘 있던 중종능만 외로이 쪽박 찬 신세가 된 셈이다.

조선왕릉에서 정릉처럼 왕비와 떨어져 외롭게 왕릉이 조성된 경우는 장릉(단종)과 건원릉(태조)뿐이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 조금 더 노련하게 보복하며 정치를 계속 했다면 중종반정은 없었을까?
중종이 문정왕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좀더 성군정치를 펼쳤을까?

아무튼 중종반정의 회오리 속에서 정비인 단경왕후를 폐위시키면서 까지 왕위를 유지했던 중종의 심리상태는 ‘왕권강화차원’을 떠나 처음부터 성군의 정치를 기대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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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2005-09-22 12:26:18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이야기네요.
사진으로 왕릉을 보니 새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반석 2005-09-22 15:27:25
서울에 살면서도 이런곳이 있었는지 몰랐네요.

기자분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시간나면 한 번 가보고 싶네요.

오해피 2005-09-22 17:56:28
정말 왕릉에 미치(?)신 것 같은 느낌인데
기사내용 좋습니다.
문정왕후 기대됩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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