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는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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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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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아비꽃대
ⓒ 이상철^^^
혼자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외로운 일이다.

하물며 홀아비꽃대처럼 이름조차도 외롭다면 서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식물을 처음 대했을 때에는 이름이 주는 기구한 어감의 전이(轉移) 탓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어떤 내력에 대하여 신기하기만 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의 이름은 아기자기하거나 화려한 것이 대부분인데 간혹 몇몇은 그 이름부터가 처량하여 눈길을 끌기도 한다.

그리고 그 처량한 이름의 대부분은 이름 모를 들판에서 혼자 자라나는 야생화란 점이 억센 살이의 곤고함과 더불어 검질긴 생명력을 짐작하게 한다. 무전여행이 -지금은 배낭여행이라고도 하지만- 청년의 이름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다. 이 무렵 나도 작은 짐을 꾸리고 몇 푼의 여비만을 가진 채 주로 걷기만 해야 했던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소백산 자락의 어느 아리따운 분교 교정에 들렀을 때, 넘어진 아이의 환부에 이 식물을 찧어 발라주시는 노교사의 모습을 보고는 호기심을 발산하여 알게 된 것이 바로 홀아비꽃대였다.

은전초 혹은 홀꽃대라는 향명을 가지기도 한 이 식물은 여러해살이풀로서, 우리 산하의 어느 곳에나 분포하며 주로 그늘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피어나고 조용히 살다가 스러져 간다.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리면 꽃술 하나 하나에 물방울이 맺혀서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홀로 나고 자라 촛대를 닮은 꽃대 위로 한 송이의 꽃만을 피우는 사연으로 인해 홀아비꽃대라 불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한방에서는 종기치료와 이뇨, 중풍치료의 약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민간에서는 타박상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일전의 노교사도 홀아비꽃대의 잎으로 어린아이의 무릎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평생을 음지에서 침묵하며 한을 가다듬기 때문이던가. 서러운 눈물은 안으로 스며들어 혈맥을 타고 돌아 독이 되었나 보다. 다량을 복용하면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며 특히 임산부는 삼가야 할 약재이기도 하다. 하긴, 성스럽기까지 한 태아들에게 하마 일생을 저리게 살다 간 식물이 무에 도움이 되겠나 싶기도 하다.

물론 서러운 이름이 홀아비꽃대만은 아니다. 며느리밥풀꽃과 나도바람꽃이 그렇고 홀아비바람꽃과 너도바람꽃은 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판에 서 있어 본 사람은 안다. 사회성으로부터 이탈한 자유의 만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친 야성의 법칙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맨몸으로 바람과 부딪히는 일이 일상이며. 때로는 바코드처럼 내리는 장대비를 피할 곳이 없을 때의 참담함, 백 미터를 뛰어도 다시 들판일 때의 막막한 일들을 불과 몇 시간이면 배울 수 있다. 바로 그런 산하의 구석진 곳에서 말 없이 피었다 가는 저 홀아비라는 이름의 식물은 짐짓 민초들의 삶과도 닮아있다. 꽃이기는 하되, 잡초와 같은 부류로 인식되고 취급당하며 관상용 화초 앞에서는 밟힐 지도 모른다. 대다수가 누리는 삶은 그야말로 바람 속에서 날몸으로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일전에 동료 한 사람이 스트레스가 심하다며 차라리 노동을 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을 때, 지금도 몸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농을 한 적도 있었지만 과연 우리는 야생화처럼 그렇다. 살이의 굴곡이 그렇고 묵묵히 제 길을 가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홀아비인가. 우스개 소리지만, 외로운 것이 광부(曠夫)만은 아닐진대 더욱 더 외로울 것 같은 과수댁이나 여타의 것을 찾지 않고 굳이 혼자 사는 남자에 비유했을까 하는 고민을 조금 해 보았다. 아마도 음습한 곳에 자생하다 보니 [과부는 은이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는 속담처럼 홀아비가 갖는 궁색한 모양새를 빌어다 붙인 모양이다. 선인들에게 있어서도 혼자라는 건,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모진 질곡의 연속이자 삶의 미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손을 내밀어 만질 수 있는 그리운 누군가가 없다는 건, 건조하고 부박한 하루 하루의 경로를 대변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외로움은 여반장이 아니겠는가. 그리워하거나 사랑하며 사는 이들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차 반쪽이 되어 간다. 홀로 서 있을 때에는 몰랐던 의지(依支)와 상관(相關)을 경험하여, 스스로가 상대를 완성시키는 보충의 존재임을 깨달아간다. 하물며 이미 반쪽의 풍요를 경험했던 홀아비야 두말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혼자서 가는 나머지 생의 심란(心亂)은 가히 그 쓸쓸함을 짐작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고백하건대, 나 아직도 누군가가 그리운 일이 어찌 대견하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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