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주화가 최악의 선택이된 배경
스크롤 이동 상태바
한국의 민주화가 최악의 선택이된 배경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귤이 한국의 토양에서 변질된 탱자 민주주의가 된 것이다

▲ ⓒ뉴스타운

영국 속담에 "최선은 차선의 최악의 적이다(The best is the worst enemy of the better.)"란 말이 있다. 여기서 최선이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목표를 의미하며 차선이란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목표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 속담에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라는 것도 있다. 이 속담들을 한국의 민주화가 겪고 있는 혼란과 파행에 대입하면 적실성이 놀랍게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는 고대 유럽(그리스)의 산물이다. 수많은 섬으로 구성되고 토양이 척박하여 교역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에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다수의 소규모 도시국가(Polis) 즉 군사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정치적 실험은 전제정이 아니라 민주정, 귀족정, 군주정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두 축이되어 이끈 그리스에서 전쟁술과 교양은 또 하나의 축이 었다. 특히 후자는 자유민(시민)이 갖추어야할 덕목이자 폴리스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정국도 대내외적 충돌과 갈등 속에 있었다는 것은 아테네의 전략관이었던 투키디데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의해 쇠퇴하고 스파르타도 마케도니아에 복속된다.

후일 이탈리아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고대 그리스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는 허약한 체제라고 평가했다. 실지로 아테네의 민주정은 로마 공화정의 토대는 되었으나 천년의 실종을 거쳐 유럽에서 부활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영국과 프랑스란 유럽중북부의 새로운 무대 였다. 이곳은 중세말 도래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주의의 재발견이란 이탈리아반도의 르네상스 사조와 기술혁신을 결합한 것이었다.

일찍이 카이사르(J.Caesar)에 의해 로마화 되었던 영국은 바이킹 앵글로의 문화와 색슨 게르만 봉건주의에 의해 분권과 대의제(의회주의)를 실험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달리 장자상속제에 의한 귀족의 제한속에 진취적인 젠트리들에 의해 종획운동(농업의 상업화), 무역과 식민지확장 등으로 나아갔다.

영국과 달리 유럽대륙의 한복판에 있는 프랑스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즉 프랑스는 절대주의란 왕과 부르조아의 연합속에 영토국가, 상비군, 관료제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조는 (시민) 자유주의를 강조하는 살롱문화와 백과전서파의 발흥으로 왕권과 충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명예혁명(영국)과 대혁명(프랑스)이란 최종적 차이는 지적 혁명이란 공통속에 자유민주제로 통합된다. 반면 2천년 동안 프랑스와 경합해온 독일은 여전히 봉건주의의 잔재 속에서 국가통합에 뒤쳐졌다. 여기서 나타난 계몽군주는 독일의 관념론을 지배해온 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에게 철학은 특히 플라톤적 이상주의 철학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실용성과 진취성의 장애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에 뒤처진 봉건성의 잔재로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주도했다.

후일 독일은 보불전쟁에서 승리하며 통일을 동시에 이루었다. 제국통일을 선포한 곳도 프랑스의 항복조인서를 받은 베르사이유궁이었다. 이것은 선민의식이 있는 프랑스에게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이때 한중일 동양3국이 개국의 압력을 받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일본은 독일의 경험과 권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한반도는 미몽(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강제 개국 당하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했다. 아시아형 전제정의 암흑체제에서 지식적으로는 닫혀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절대빈곤으로 강대국들에게 버림받은 것이었다.

한반도의 현대사도 여기에서 출발했다. 일본이 미국의 견제 속에 감행한 태평양전쟁은 초기부터 반전되어 절망적 항전을 이어 갔으나 무단(사무라이)국가에 대한 응전은 결국 핵무기로 나타났다. 연합국에 의해 해방된 한반도는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화 정책에 일관되었으나 남한은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리버럴한 미군정의 대한정책에 국가적 지성이나 미래를 위한 희생을 찾기 힘들었다.

여기서 이승만 박사는 걸출한 지도자 였다.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간파해온 이승만 박사가 건국을 주도한 것은 행운이었다. 건국 직후 6.25가 발발하자 오히려 한미군사동맹으로 호국을 다졌다. 하지만 빈곤과 무자원의 대지에서 부국강병의 신화를 만든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청년장교들이 빈곤과 남북대치를 벗어날 혁명을 선택한 것었다. 군사정부는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조국근대화를 불과 30년만에 달성했다.

군사정부의 성공은 또한 민주화(87체제/6공화국) 이후와 대비된다. 한국의 방황과 지도력의 상실은 민주화 불과 10년만에 IMF로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과정에서 이루어진 정권교체였다. 김대중ᆞ노무현 양대정권이 자행한 것은 정권교체나 IMF 관리가 아니라 민주화의 미명하에 반공국가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전교조와 같은 반체제교육집단을 공식화하고 지원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은 남북대치상황에서 무방비상태로 놓이게 된 것이다.

이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으나, 이미 한국은 6.25 당시의 반공의식도 조국근대화 당시의 부국강병의 헌신도 사라진 뒤였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자유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규범과 질서가 균형잡힌 사회이며, 이러한 사회규범의 토대가 되는 시민윤리교육과 독서가 뒷받침 되는 사회인 것이다. 반면 한국의 민주화는 군사정부 시절 일본의 교육기본법과 시민윤리교육을 도입한 사실도 망각하고 형해화시키고 독서를 방치했다.

민주화 초기를 회상하면 당시 소위 '한국병'이란 국가지도력의 실종이 팽배 했었으나 이후 국가목표와 장기계획도 실종되었다. 지도자들은 단임제하에 순응하여 국가비전이나 카리스마, 국정운영능력 어느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종북정권들은 민주화와 통치행위로 서슴없이 여전히 적국인 북한을 돕는 반역(여적)행위를 자행한 점이다.

또한 이후 집권한 MB정부나 박근혜정부도 여기에 대한 일관된 정책이나 인식도 없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가 치명적인 것은 원칙과 방향을 상실한 것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 의식이 실종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전후 독일(서독)이 동독에 대한 일관된 정책과 강력한 국내의 규범(법집행)과 대비된다. 남한을 적대시하는 반인권 집단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지가 없는 지도층을 둔 한국의 비극인 것이다.

자유민주의 대원칙이 실종되면 민주주의는 미래도 성장도 질서도 없는 대중주의, 포퓰리즘에 빠지는 것이다. 최선(민주주의)은 차선(자유민주)의 최악의 적인 것이다. 또한 한국의 토양에서 변질된 탱자 민주주의가 된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