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는 도도했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백두산 천지는 도도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계환 기자의 백두산 기행

 
   
  ▲ 특별한 장터가 없어 도로에서 장이 열리기 때문에 거리가 매우 복잡하다.
ⓒ 김계환
 
 

여객선에 설레임을 싣고!

우리민족의 영산(靈山)이라는 백두산을 오르기 까지는 사실 그동안 많은 갈등을 갖고 있었다.

국내에 있어도 가보지 못한 산들과는 달리 메스컴이나 수많은 자료를 통해 백두산을 접해 왔던 필자에게는 백두산 답사에 바라는 기대에서 그다지 신비스러움이나 보고 싶은 욕구가 미미한 정도였으며 가봐야 볼 것도 없을 것이라는, 어쩌면 우리민족 정기의 근원이 되는 뿌리(백두산)에 대한 무관심 심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서 일 것이다.

“그래도 한번 가보자”는 일행들의 권유로 준비를 서두른 필자에게는 그동안 단체행사로 또는 가까운 사람들과 수년에 한번씩 등산을 다녀온 외에는 기껏해야 마을 뒷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등산의 대부분이었기에 배낭이며 의류 등 모두를 준비해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 중에는 33만원이나 하는 기능성 등산복도 있었지만 “기자의 체면에 고급품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자주 갈 것도 아닌데 적당한 수준에서 준비하라”는 의견 중 형편상 후자를 선택했는데도 다행히 전문점 주인이 상당한 금액을 스폰해주어 비교적 가볍게 마련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한민국 화폐와 달러를 사용할 수 있지만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돈이 우리나라 1천 원짜리라며 “한 3만원을 바꿔가라”는 경험자의 조언에 따라 은행에서 교환하고 동생이 마련해 준 중국화폐도 주머니에 안전하게 챙겼다.

출발 당일인 3일 15시까지 인천항에 도착해서 출국수속 등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 중국과 1주일에 두세번 운항한다는 동방명주호(적어도 건조 40년이 됨직한 고물선)를 타고 중국과 백두산에 대한 상상을 하며 17시 40분 경에 출항하였다.

모두들 흥분과 설레임으로 우선 사진부터 찍고 밤바다에 보이는 것이 없어 손발을 닦기 위해 세면장으로 갔는데 오물이 배출되지 않아 악취와 불결상태가 최신 시설일 것이라는 기대를 시커멓게 색칠했다.

과거 적대국에 첫발을!

일부는 잠을 청하고 일부는 일행들끼리 술자리가 진행되는 출항 세 시간 쯤 부터 걱정했던 멀미가 시작되었지만 이미 터득한 방법(중요한 비밀이지만 비법은 코골며 자는 것)으로 극복하고 다음날 아침 7시 경에 중국 단동항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는 필자가 낮선 외국 땅에, 그것도 사회주의 국가이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적대감이 깊은,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무역의 최대교류 국가인 중국땅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익숙치 않은 중국문화에 낮설어 하며 가이드의 안내로 휴식의 틈도 없이 버스에 탑승했다.

자신이 한민족이며 올해 27세라고 소개하는 가이드는 대한민국을 잘 알고 있는 듯 중국의 경제수준을 설명하며 우리보고 불편함을 이해하라고 말했다.

첫 관광지인 압록강 까지 1시간 동안 타고 가는 낡은 버스(여행기간 중 계속 이용한 버스) 차창 박으로 보이는 중국의 환경은 실로 예상에 못 미치는 실상이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풍경

포장 반 비포장 반으로 만들어진 도로에서는 자동차들이 차선도 없이 운행하고 주택은 물론 상가 건물과 간판들은 낡고 초라하였으며 주택 주변과 도로변은 오물과 각종 쓰레기 투성이었다.

그 때 누군가가 “우리나라 60년데 수준”이라고 말하자 일행 모두에게서 공감하는 동의 어(語)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게다가 주민들의 복장은 본래 빨래를 하지 않는 듯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주민들은 건물을 짖고 땅을 이용할 수 있으나 국토가 국가소유이기 때문에 토지를 이용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중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한 되는대로 생활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이해를 한다 해도 집 주변의 오물과 쓰레기도 치우지 않고 방치하는 부분에서는 문명을 모르는 무지의 국민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TV에서도 북한의 실상과 관련한 배경으로 자주 비치는 압록강, 중국과 북한의 경계를 이루며 말없이 흐르는 우리민족의 한이 맺힌 압록강에 도착하여 유람선을 타고 수풍댐을 향해(방향은 감을 잡을 수 없고) 올라가는데 강을 경계로 보이는 양국간의 차이가 실로 엄청나다. 

 
   
  ▲ 장군총 앞에서 (좌로부터 필자, 이상훈 교사, 김만길 사진기자)
ⓒ 김계환
 
 

남북통일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북한 땅

강변 중국땅에는 가끔 새로 신축한 건물들이 보이고 산에 나무들이 자연 그대로이며 도로와 모종의 시설물들이 경제적 빈약한 국가경제와는 달리 그림처럼 조성되어 있다.

반면, 중국보다 북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행들의 시선에 비치는 강변 북한은 그야말로 60년대에 교과서에서 배운 사진들과 변함없는 실상이다.

강변에서부터 야생동물들도 살 수 없을 것 같이 70∼80도 비탈진 험난한 산꼭대기의 경사진 곳 까지 옥수수를 심었고 집은 페인트를 칠하지 않고 쓰러져 가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수평(坪) 면적의 허스름한 집들이 수백여 미터 간격으로 지어져 있다.

간혹 옥수수대 사이로 북한주민들이 보이면 일행들은 반가움으로 손을 흔들었지만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무반응에 무표정이 역력했으며 그들의 옷은 진흙탕에서 뒹굴고도 그대로 입는 듯 더럽고 지저분했다.

중간 쯤 상류에서 조그만 목선을 타고 어린 딸과 고기를 작고 있는 주민을 발견하고 일행들은 손을 흔들면서도 내 가족 같은 느낌이 들어 코끝이 찡함을 느끼는 분위기 였다.

필자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을 보며 가능하다면 여행비를 아껴 모두 주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어린 딸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는 북한주민이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는데, 그리고 그 사상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세계 최고의 정책이라고 믿는 어리석고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감을 느꼈다.

유람선 동행 일행 중 최경숙(48, 서울)씨는 비록 북한주민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철저히 믿고 있다고 하드라도 어려서부터 외국의 선진문명을 모르고 오직 공산주의 교육만을 받고 성장하였기 때문이라면서 그동안 북한에 쌀을 지원하는 것을 반대하던 입장에서 직접 현실을 보고 마음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보고 싶었지만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 같은 북한의 현실을 바라보며 강 중앙을 거슬러 올라가는 유람선에서 필자는 늦었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중국과 아직도 김일성 주체사상이 최고라며 교류의 빗장을 잠그고 문명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의 실상들을 직접 비교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는 압록강 상류를 막은 수풍댐 앞에서 북한 땅 산 중턱에 있는 “위대하신 김일성 동지 추체사상 만세”라는 글씨를 바라보며 남북평화통일을 운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집안시(市)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어스름한 초저녁 밤길을 달리는 도로는 대부분 높은 산의 형태대로 건설하였기 때문에 급커브가 많았는데도 반사경 하나도 설치하지 않았고(하기야 반사경을 제대로 설치하려면 한 코스에 수 백 개가 필요할 듯) 곳곳에는 대충 3톤 정도 무게의 바위들이 도로 중앙부위까지 무너져 내려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중국에는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겠다고 말하고 얼마 후 아니나 다를까 밤길에 누군가가 도로를 기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확인해 보니 도로에 떨어진 직경 2m 크기의 바위에 다리를 크게 다쳐 도로가로 피하고 있는 주민을 우리 일행들이 붕대로 감아주는 응급처치를 해주기까지 하였다.

무려 세시간을 달려 중국 국가에서 운영한다는 집안호텔(두 번째로 좋다는)에서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는데 중국요리로 화려한 메뉴들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편식을 하는 필자에게는 음식에서 풍기는 향료와 기름기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일의 일정을 위해 무언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을 때 일행이 챙겨 온 우리나라 고추장과 김을 보니 갑자기 식욕이 돋고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최고여”라는 우리농산물 홍보 멘트가 “정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고추장이 이처럼 맛있는 줄을 처음으로 느끼며 식사를 끝내고 일행들을 보니 일행 중 이상훈(신기중학교 교무부장, 국민윤리 교사)씨도 고추장으로 비벼서 소식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행들은 중국요리가 체질에 맞는지 모두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편식하지 말라고 야단을 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괜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밤에 배멀미로 고생한 우리 일행들은 낮선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기념하기 위해 숙소에서 일행이 챙겨 온 소주와 복분자 술을 나누며 각자의 여행담을 나누고 샤워를 하는데 물이 황색이기에 일행에게 물었더니 호텔 이용자가 없어 파이프의 녹슨 물이라고 했다.

그래도 안하는 것 보다는 났다는 생각으로 샤워와 속옷 빨래를 하고 우리나라 군대 모포로 시트를 만든 침대에서(일행 중 일부 여자분들은 발맛사지라나 전신맛사지라나 암튼 뭔가를 받고) “아무튼”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오늘도 일정이 바쁘다며 새벽 6시(현지시간, 우리나라 보다 1시간 늦음)에 모닝콜을 하는 가이드의 요구대로 어제 저녁처럼 고추장을 아껴서 대충 아침식사를 끝내고 7시에 전용버스에 탑승했는데 일행들의 피로한 얼굴들이 말이 아니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버스의 가이드는 27세의 청년이지만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책임감이 강한, 딱 필자의 맘에 드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공군을 제대하고 직장에 근무하다 앞날을 생각하여 가이드를 선택했다는데 차내 마이크로 멘트를 시작하려면 “그래가지구”라는 말로 멘트를 연결하였으며 진실로 여행객을 위하는 그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중국을 제압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 릉에서

이날따라 따거운 햇빛 때문에 일행들이 땀을 흘리며 숙소에서 버스로 10분 거리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호태왕비, 장군총을 답사하였다.

가이드의 서두르는 안내에 따라 한바퀴 돌고나니 과거 395년에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으로 왜군을 소탕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402년에 후연나라를 쳐서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요하와 흔춘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국가 임을 과시했던 광개토대왕의 능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는데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20대 장수왕이 부친의 업적과 왕권 강화를 위해 세웠다는 거대한 광개토대왕 비가 고구려 멸망과 함께 흙 속에 묻혔다가 1880년경에야 발견되었다는 점과 도굴을 당하여 빈 석관(石棺)만 남은 왕릉에 대한 허술한 관리, 또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보물이라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한 중국의 이기적인 관리가 후손인 우리 일행들을 화나게 했다.

뿐만 아니다. 고구려 2대 유리왕이 AD 3년에 천도하여 고구려를 부흥시킨 국내성이 지금은 일부 석성의 외벽만 남은 채 보존되고 성내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는 현장을 답사하며 비록 외국이지만 우리민족의 혼이 담긴 문화유적이 함부로 방치되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력한 국력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거주한다는 최병해(50)씨는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고구려의 유적들이 이 같이 허술하게 방치되고 있는 것은 역사와 문화를 소흘하게 생각하는 중국이 과거 고구려에게 당했던 치욕감을 위장하려는 행위라면서 세계문화 유산인 만큼 앞으로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구려 유적 답사를 마치고 대한민국에서 왔다는 우리들에게 성의를 다하는 듯한 식당에서 대충(중국음식이 체질인 사람은 빼고) 점심식사를 끝낸 일행은 전용버스로 내일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오늘 숙박지인 송강하로 장장 7시간이나 타고 갈 전용버스에 탑승하였다. 

 
   
  ▲ 묘향산주점 공연묘향산 주점에서 직원들이 북한 노래등을 부르며 공연을 하고 있다.
ⓒ 김계환
 
 

누군가가 개판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다른 농작물 재배가 안되고 옥수수 재배에 적절하다는 가이드의 안내대로 차창 밖의 풍경은 그야말로 산 아래의 옥수수밭 뿐이었다.

민가들은 대부분 정원이나 다른 공간이 없고(차가 없으니 당연히 주차장도 없고) 집 주변부터 산 중턱까지 옥수수밭으로 이어지는데 옥수수를 정부에 매상하여 받는 돈으로 일상생활의 경제활동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집 추녀까지 옥수수를 심어야 하는 주민들의 입장에 이해가 간다.

어쩌다 마을이 형성된 시가지를 지나는 버스가 계속해서 크락숀을 울려야 하는 이유도 특별하다.
도로 중앙부위 까지 펴 놓은 상업인들의 물건은 그러려니 하드래도 차가 오든 말든 도로를 걷는 주민들, 갈지자(之字)로 게으르게 가는 자전거, 틈남 있으면 코앞까지 달려와서 상대방 보고 비껴가라는 자동차 운전자들 모두가 답답한 사람들이었으며 도대체 사회질서를 모르고 배려와 양보를 전혀 모르는 개인주의 국민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이 이러하니 당연히 어린이들도 그렇고 하물며 도로 1차선을 차지하고 누워 있는 소나 도로 중앙으로 뛰우뚱 거리며 걷는 오리와 닭 등의 가축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시가 형성된 시가지나 촌마을 의 주택들도 별 차이 없이 초라하고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좁은 집안에는 오리와 돼지, 닭이 방사식으로 주민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분뇨처리시설이 없이 화장실에서 넘치는 오물들이 그대로 집 밖의 마당이나 도로로 배출되고 외형적 생활정도로 보아 비닐봉지와 흰색 종이가 없을 것 같은데도 집 주변이나 도로변에는 각종 쓰레기들이 엉켜 있다.

이번 여행에서 동승한 이석진(56, 수원 이목중학교 교감)씨는 국민들이 이처럼 어렵게 생활하는데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중국의 정책에 이해가 안된다면서 하루속히 중국의 젊은 사람들이 세계의 문명과 공존의 유익성을 배워서 중국을 건전하고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반응 없이 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산이 높으니 계곡이 깊은, 때문에 하천이 넓은 산 속의 도로를 굽이굽이 잘도 달리는데 구석구석에 있는 농가들을 제외하고는 도로변에 자연상태로 있는 야생화들의 꽃잎이 원색적으로 아름답고 넓은 하천의 모래와 자갈들이 이끼가 끼지 않고 깨끗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에도 그 같은 산과 물이 있다면 벌써부터 펜션이다 모텔이다 하며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미 훼손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우리나라 자연생태계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전날 미리 와서 숙박을 해야 한다는 송강하까지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어가는 시간이었으며 고산지대의 날씨 탓인지 더한층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는 일명 “마적단”들이 외지인들을 보면 무차별하게 폭행하여 벌목공이나 탄광지대로 끌고 간다며 호텔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가이드가 몇 번인가 당부한 것을 생각하며 식사 후 혼자서 시장구경을 갔었지만 주민들의 눈빛이 차겁고 느낌이 오싹하여 호텔로 되돌아갔다.

호텔예약에 착오가 있었는지 샤워실 물이 그대로 방안으로 흘러드는 방에서 일행들과 약간의 소주를 마시고 참을 청하였는데 장시간 버스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모기가 윙윙거려도 쉽게 잠이 들었다.

악을 쓰고 올랐더니 천지는 없고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백두산을 오르는 날이라며 가이드가 현지시간 새벽 5시에 깨우는 바람에 서둘러 준비를 하고, 아침식탁에서 일행 중 김경희(49, 충남서산 하나부동산 대표)씨는 백두산을 오르기 위해 고생을 감수해 온 보람을 위해 천지를 꼭 보아야 한다면서 날씨 걱정이 태산이다.

아침 6시에 버스로 출발을 하였지만 벌써 백두산 중턱의 주차장에는 차가 만원이라 버스로 올라갈 수 없다며 중턱까지의 대략 3,5km지점에서 일행들을 풀어 놓았다.

이 때부터 시작되는 백두산 오름의 걷기는 고행이었다.
관광객을 위해 등산로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었으나 계속해서 오르막인데다 승용차들의 매연이 눈이 매웠으며 산줄기를 끼고 만들어진 도로를 오르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숨을 몰아쉬며 지치지 않도록 일정한 보폭과 속도로 중턱에 마련된 휴게소까지 오르고 여기서부터 1,236개의 계단을 올라 천지가 보이는 정상에 올랐다.

사실 정상이 아직도 멀었으려니 하고 무지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비옷을 입고 소란스러운 움직임에서 나 자신이 정상에 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맑고 푸른색의 천지는 보이지 않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작은 물방울들이 이슬비처럼 얼굴을 스치며 천지를 덮고 있었고 방수 옷을 꺼내 입었는데도 모두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어린애 얼굴 같은 백두산의 날씨는 순간적으로 구름이 걷히는 듯 하다가도 어느새 뒤따라 온 구름이 다시 산을 덮었다.

양심적으로 부정한 나에게는 천지의 신비함을 볼 수가 없었는지 일순간 구름이 걷히면서 천지의 일부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한 일행들은 아쉽지만, 천지의 영험한 비경을 보지 못하는 것도 팔자려니 생각하며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천지를 보아야 한다는 욕심으로 앞만 보며 오르느라 고산지대의 식물과 자연생태계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필자는 백두산에서만 자생한다는 각종 이름 모를 식물과 야생화들의 아름다운 꽃잎을 보며 내려오는 도로에는 차들이 엉키어 제자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운전자들이 눈만 껌벅이고 있는 것을 보니 버스를 두고 오르자고 했던 가이드의 현명한 판단이 고마웠다.

천지수가 흐르는 금강대협곡의 기암들이 모진 비바람에 깍여지면서 비수 같이 날카로운 형상으로 서있는 기암절벽을 관광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장장 6시간 동안이나 안전벨트도 없는 의자에서 어쩌지 못하고 잠자기와 맞은편 남에 의자 까지 다리 뻗기, 시원찮은 에어컨 조작하기, 밀리는 의자의 시트와 씨름하기를 반복하며 집안시의 집안호텔에 도착했다. 

 
   
  ▲ 북한 전경압록강에서 바라 본 강변의 북한 산꼭대기 까지 나무를 뽑아 내고 옥수수를 재배하고 있다. 그래도 사진 속의 산비탈 사정은 양호 한 편
ⓒ 김계환
 
 

동포애는 우리들만의 마음일까?

가이드가 백두산에서 하산을 재촉하고, 차내에서 승객들의 소변볼 시간도 없다면서 길을 재촉한 특별한 이유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의 기대만큼이나 조금은 화려한 치장을 한 바로 북한식 음식점이라는 묘향산 식당의 식탁에는 인절미가 크게 썰어져 있었고 몇가지 우리나라와 비슷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모두가 두리번 거라며 음식 맛을 음미할 때 공연을 준비했다며 북한식 치마저고리 복장을 한 아가씨들(써빙, 여기서는 의뢰원 동무)이 올갠을 연주하며 “반갑습니다”와 “찔레꽃” 그리고 가사를 모를 노래들을 부르는데 우리들은 일단 동포애서인지 박수로 장단을 맞추기도 하였다.

방금 웃으면서 노래를 부른 의뢰원 동무들은 공연(길어야 10분)이 끝나자 각자 바쁘게 일을 시작하고 얼굴에 웃음이 사라져 버렸다.

저 얼굴들이 우리 동포이면 그 마음속에 있는 김일성 주체사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유가 뭔지 모르고 주체사상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상으로 알고 있는 저들과 통일이 되면 어떤 사회가 될까? 궁금하지만 생각을 접었다.

내일은 단동으로 가서 압록강의 유람선으로 신의주 쪽을 보고 단동항에서 출국해야 한다며 가이드가 또다시 설쳐대는 바람에 정신없이 잠을 청하였다.

오늘도 아침 6시부터 어제 그 버스에 탑승했는데 웬지 시원한 느낌이다.
가이드 설명으로는 에어컨을 고쳤다나 뭐라고 했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치사하게 마지막 날 잘해주느냐”며 비꼬았지만 더위에 질색인 필자에게는 어쨌거나 좋은 일이었다.

또다시 6시간을 거쳐 단동시의 압록강에 도착해서 유람선을 타고 북한의 신의주 강변을 돌아보고 항상 그랬듯이 재촉하는 가이드의 안내대로 점심을 먹고 쇼핑을 하는데 물건이 대부분 가짜란다.

이번 여행을 스폰해 준 몇몇 분께 답례라도 하려고 구경을 하였으나 가짜를 선물할 수가 없어 버스에 타려는데 버스가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며 밀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들 결국은 “퍼졌구나” 하면서 밀고 있을 때 일행 중 김만길(52, 사진기자, 서울 수풍통신 대표, 가두리낚시 프로)씨가 차를 미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었는데 사진을 보니 나도 좀 힘을 쓴 자세로 찍혀 있었다.

뭔지 모르고 수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을 때 우리들은 어느새 단동항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국 고구려유적지 문화 탐방이라는 명분으로 중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낸 일행은 우리를 귀국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단동항에서 필자는 그래도 기행문의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일행 중 몇몇에게 소감을 질문하였는데 응답자 중 모두가 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산을 제외하면 좋게 평가 할 부분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훈 교사는 세계가 디지털시대를 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국민들은 아직도 세계문화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라면서 대도시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의 농촌지역을 위해서는 우리나라가 60∼70년대 추진했던 새마을 운동 같은 강력하고도 효과작인 개발운동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김만길(본 기행문 사진자료 제공)씨도 중국의 광대한 국토면적이 균형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점은 농사를 많이 짖는 농부가 전 면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대충 필요한 부분 위주로 관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그러나 각종 산업자원과 인적자원이 풍부하여 멀지 않아 세계의 경제 강국 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파도를 넘어 고국으로!

중국의 거대한 면적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이 협소하게 지은 단동항 출입관리소에서 출국수속을 마친 일행은 대한민국으로 선수를 향하고 있는 동방명주호에 승선하여 중국의 현실만큼이나 바닷물도 뿌연 중국을 뒤로하고 17시에 출항하였다.

중국을 지나간 태풍의 여파로 파도가 거센 바다를 무려 16시간이나 달리는 선실에서 원고 초안을 정리하는 필자는 이번 여행을 통해 중국의 모습을 보았고 백두산 천지에 오르면서 그동안 고정되어 있던 중국과 북한에 대한 관념들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이번 백두산 여행에서 비록 거대한 중국의 극히 일부분만을 경험 하였지만 “중국 국민들이 무질서한 행동이나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의 국민성을 버리고 세계의 문명을 도입하여 건전하고 건강한 중국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백보경 2005-08-13 20:42:34
얼마전에 백두산에 다녀왔는데 저두 올라갈때 비가 오고 했는데 막상 올라가니깐 해가 나서 좋았습니다...
다만 너무 상업적인 냄새를 많이 풍겨서 유쾌하진 않았지만 즐거운 백두산 등정이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