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기둥 - 3
소금 기둥 - 3
  • 이영철 소설가
  • 승인 2005.08.11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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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은 하루 종일 비디오를 보았다.

비디오 내용 모두가 납치, 살인 등을 다룬 것이었다. 전에 본 것들 중에서 다시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비디오를 보다가 조금이라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나오면 몇 번이고 되감기를 반복하며 메모했다.
오늘도 진희는 이 회장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보다는 앞으로의 일이 중요했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사소한 단서라도 남기거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그만큼 철저하고 완벽하게 처리해야 했다. 두 사람의 일에 있어 실수란 용납될 수없는 단어였다.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 추악한 섹스 파티를 벌이는 놈들이 판을 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인간들은 아주 철저하게 응징해 줄 각오였다. 그게 태진 자신이 할 일이고, 어쩜 이 땅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태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념이 더 확고해졌다.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할 일은, 진희가 이 회장에 관한 완벽한 정보를 하루라도 빨리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태진은 입이 심심해서,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뻥튀기나 구운 오징어를 씹으며 비디오만 봤다. 소파에 앉았다, 누웠다, 엎드렸다를 반복하며, 눈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떼지 않았다. 이따금 커피와 와인도 홀짝였다. 눈이 피곤하면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편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신이 평온했다.

소영에게서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전화가 왔다. 주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왔는데, 지금 막바지 야외 촬영을 하느라 오대산에 있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대산에 들어가 밤이 돼서야 나온다고 했다. 자신이 꼭 산짐승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 죽겠어요. 선생님도 제가 엄청 보고
싶죠?”

전화에 대고 소영인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태진은 소영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못 했다.

“왜 대답이 없어요? 제가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금세 토라진 소영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아, 아냐. 보고 싶어.”
“그럼 사랑한다고 말해봐요.”
“…….”

영낙없는 철부지였다.

“봐요. 말을 못 하잖아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쑥스러워서 그래.”

누가 그랬던가. 사랑에 눈이 멀면 정신 연령이 20년은 후퇴하게 된다고.

“어젯밤에 선생님 꿈을 꿨어요. 제가 부르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 가버리길래 꿈이지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꿈인데 뭘…….”
“그래도.”
“그건 꿈이라니까. 내가 왜 소영이가 부르는데 그냥 가겠어? 안 그래?”
“호텔 방에 혼자 있는데, 지금 선생님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 팔을 베고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다면…….”

태진은 소영의 비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아랫도리가 뻐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소영이 말처럼 같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인데,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소영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태진은 이 세상 누구와도 사랑을 할 수 없을 줄만 알았다. 아니, 사랑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줄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소영이를 통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한번 전화가 오면 보통 30분 이상 통화했다. 그러면서도 끊을 때는 미련이 남아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만 했다. 그녀가 서울로 돌아오면 곧바로 달려가 꼬옥 안아주리라 생각했다.

진희는 일 주일 만에 이 회장에 관한 정보를 완벽하게 조사해왔다. 태진은 조사해온 정보를 훑어보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희는 이 회장의 신상 명세서는 물론, 그가 아침에 집에서 출발해서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시간까지 한 시간 단위로 상세하게 체크해 놓았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회장이 집과 사무실을 오갈 때는 늘 같은 코스를 이용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 밖에 이 회장이 자주 이용하는 술집, 음식점, 사우나탕, 골프연습장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조사한 것치고는 거의 완벽했다.

“대단해! 납치할 만한 장소 몇 군데와 약도까지 조사했다
는 점은 완전 프로 같아. 정말 놀라워!”

진심이었다.

진희의 정보지에는 이 회장의 집 근처, 이발소 주차장, 골프연습장, 술집, 음식점 등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세밀하게 약도가 첨부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이 회장이 좋아하는 음식과 소스까지도 적혀 있어 태진을 놀라게 했다.

“이 회장이 도다리회를 좋아하고, 그걸 먹을 때는 초고추장에 와사비를 넣은 소스만 찍어 먹는다는 것까지 어떻게 알아냈어?”

진희는 태진의 칭찬에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그거야 간단하죠. 지난번 이발소 아가씨를 만났을 때 경제지 기자를 사칭했다는 걸 말했을 텐데요.”
“그럼 이번에도?”
“주방장에게 취재비조로 봉투 하나 주고 자세히 알아냈죠.
물론, 이 회장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그랬군.”

태진은 다시 한 번 수집해 온 정보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정도의 자료만 있으면, 그를 납치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희 생각엔 어디서 납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거 같아?”

태진은 조바심이 났다. 오늘이라도 당장 납치하고 싶었다. 그가 납치된다면 매스컴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특종으로 다룰 것이 분명했다. 그 짜릿함을 한시라도 빨리 느끼고 싶었다. 이 회장을 납치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태진의 피는 벌써 흥분하고 있었다.

“내일이 좋을 거 같아요.”
“납치 장소로 어디가 좋을 거 같냐니까?”
“L호텔 이발소 주차장요.”
“이발소 주차장?”

태진은 의아한 눈으로 진희를 보았다. 어떻게 이 회장이 내일 이발소에 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밤 늦게까지 서초동 '‘제비’ 룸살롱에 있는 것을 확인
하고 왔어요. 내일은 이발소에 갈 것이 틀림없어요.”
“하지만 주차장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 지나다니는 차들
도 있을 거고, 무엇보다 CCTV에 녹화될 위험이 큰데.”

태진은 진희의 생각이 좀 무모하다고 판단했다. CCTV에 두 사람의 얼굴이 찍힐 것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납치할 때 사용할 차가 드러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제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세요?”
“?”
“선생님과 제가 완벽하게 변장을 하면 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가발도 쓰고, 선글러스도 쓰고, 수염도 붙이고, 거기다 모자까지 눌러 쓴다면 얼굴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차가 문제잖아.”
“그것도 다 준비가 됐죠.”

진희는 여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차를 한 대 훔쳐 번호판을 가짜로 달고 유료 주차장에 숨겨놓았어요.”
“차까지 훔쳤어!”
“어차피 일을 할 바에는 철저하게 해야죠.”

태진은 그녀의 대담함과 치밀함에 감탄했다. 진희는 자신과 단 한 번의 납치를 실행했는데도, 어느 새 프로다운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 참, 지난번에 취재한다고 만난 이발소 아가씨가 그만둔 걸 확인했어?”

아무리 변장을 해도, 이 회장이 납치된 걸 알면 그 아가씨가 진희의 얼굴을 기억할지도 몰랐다. 납치 장소가 CCTV가 설치된 이발소 지하 주차장이라면 보다 완벽을 기하는 것이 좋았다.

“물론이죠. 그 아가씬 그 날 그만뒀어요. 벌써 두 명의 다른 아가씨가 와서 일하고 있고요.”

어느 한 구석 틈이 없었다.

“진흰 타고났어.”
“지금 칭찬하는 거예요?”
“그럼 욕으로 들려?”
“아니에요. 칭찬 같아요.”

그들은 마주 보고 웃었다. 웃음이 한번 나오자,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중에는 서로가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태진은 긴장됐다.

‘실패하면 어떡하지?’하는 초조감이 자꾸만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럴리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가슴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만약에 대비해 준비한 전자 충격기와 가스총을 점검해 보았다. 그런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 한쪽에는 설렘도 있었다. 그 설렘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전율감으로 다가서기도 했다.

진희는 표정 없이 창 밖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강심장이 틀림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느끼지만, 태진은 그녀에게서 두껍고 높은 벽을 발견하곤 했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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