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 아파트에 홈바와 대형 냉장고를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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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평 아파트에 홈바와 대형 냉장고를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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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소비 문화의 대표적 산물, 이것이 과연 필요한가

^^^▲ 어느 신혼집에 설치된 홈 바원래 설계에는 없는 홈 바를 설치하기 위해 베란다를 헐어내고 만들었다^^^
‘저는 커휘로 하겠어요’

1960년대의 흑백 영화에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텔리겐차 여성’이 다방에 가서 하는 말이다. ‘coffee’의 f 발음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듯이 발음하는데, 이것은 본디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라서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그냥 쉽게 ‘커피’라고 발음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굳이 ‘커휘’라고 발음하는 것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였다는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 영화를 보고 나온 젊은 여대생들은 그 길로 모두 다방으로 달려가 커피 대신 ‘커휘’를 달라고 한다. 그리고 며칠 동안 커휘를 주문 받고 난 여자 종업원은 커피 한잔을 달라고 소리치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눈을 흘긴다, ‘어머, 사장님, 무식하게 커피가 뭐예요, 커휘지’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커휘 라고 말했던 것은 실제 미국 생활을 했기 때문이고(이것을 사회학적인 용어로 인덱스(index)라고 한다), 그것을 본 여학생들이 커휘 라고 했던 것은 미국에서 생활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커휘를 즐겨 마시는 미국식 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일 테며(사회학적 용어로는 마커(marker)라고 한다), 여자 종업원조차 커휘라고 발음한 것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미국식화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이제 완전히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이 된 것이다).

이렇게 6,70년대에는 f 발음을 얼마나 정확하게 하느냐가 사회적 계층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되었다면, 80년대에는 t 발음을 얼마나 부드럽게 굴리느냐가 지표로 사용되었다. 제법 잘 차려 입은 신사가 레스토랑에 가서 ‘웨이러, 여기 라이러 좀 갖다 줘요’ 라고 말했더니, 종업원이 ‘재러리는 필요하지 않으세요?’라고 대답하더라는 우스개가 그 시절 유행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의 t 발음을 ㄹ 음가로 발음하다 보면, 어느 사이 한국어의 ㅌ 도 ㄹ 로 발음하게 된다는 무서운 예언이 숨어 있는 것이다.

요즘 TV를 보면 외국 생활을 오래 하여 한국어가 서툰 가수가 도리어 인기를 얻고, 그들이 내뱉는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매력 포인트로 작용한다. 그들에게 열광하는 소녀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어를 미국식으로 어눌하게 발음하는 것이 유행할 테고, 이것이 전반적으로 퍼지다 보면 결국 우리의 언어 생활에도 지장을 줄 것이다. 최근의 추세로는 r 발음이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온 후배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 오늘 점심은 레스토랑에서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뤠스토렁? 이라고 되묻는다.

80년대 초반 40평형의 대형 아파트에서 처음으로 안방에 부부전용 욕실을 설치하여, 1가구 2화장실 시대를 열었다. 주로 2,30평형 일색이던 80년대에 40평형은 무척 대형에 속했고, 그런 아파트에 화장실이 둘 있다는 것은 ‘중산층= 2 화장실’이라는 등식이 가능하게 했다. 실제 4인 가족의 경우, 아버지의 출근과 아이들 등교가 아침 시간에 몰리기 마련이어서 화장실이 2개 있으면 편리하다는 기능적인 이유도 있었다.

90년대에 들어 30평형대의 아파트에서도 화장실이 2개 나오더니, 요즘에는 20평형대의 아파트에도 화장실이 2개 나온다. 80년대 평균 4명이던 가족 수는 2000년대에 3명으로 줄어들어 아침 시간이 그다지 바쁘지 않게 되었고, 부모를 모시는 경우가 줄어 굳이 부부전용 화장실이 필요치 않을 텐데도 20평이라는 소형 평수에서까지 화장실을 2개씩 넣고 있는 것이다. 그 좁은 아파트에 어떻게 화장실을 하나 더 넣을 수 있는지, 선배의 탁월한 솜씨에 가끔 탄복하곤 한다. 선배님, 오늘 점심엔 요 앞 뤠스토렁으로 가쉴레요?

90년대에는 안방에 파우더 룸과 드레스 룸을 둔 중대형 아파트가 첫 선을 보였다. 50평형의 아파트에서 부부 화장실 옆에 파우더 룸과 드레스 룸을 두고, 60평형의 아파트에서는 거실 한 구석에 홈 바를 두기도 했다. 요즘은 30평 아파트에도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이 들어가고 때에 따라서는 홈 바가 들어간다. 앞으로 10년 정도만 있으면 20평짜리 아파트에도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 홈 바가 들어갈 것이다. 좁고 좁은 20평 아파트에 부부 화장실을 기본으로 해서 드레스 룸, 파우더 룸, 홈 바까지 집어 넣을 생각을 하면, 웁스, 벌써부터 스트뤠스 업!

드레스 룸이나 파우더 룸이 필요한 것은 서구의 독특한 의생활 문화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하는 예절이 있다. 잠을 잘 때는 잠옷을 입으며, 집 안에서는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다가도 외출을 하려면 격식 있는 옷차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낮 외출인가 밤 외출인가에 따라서 옷차림과 화장의 정도가 조금씩 다르다. 모닝 코우트, 이브닝 드레스, 나이트 가운, 이지 웨어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루에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몇 번씩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에 드레스 룸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명칭이 옷을 갈아 입는 장소를 뜻하는 드레싱 룸이 아니라, 벗어 놓은 옷을 걸어두기 위한 드레스 룸인 것 이다.

한국의 전통 복식에서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 종일 단정하고 정갈한 옷차림을 유지했기 때문에, 집안에 있던 평상복 차림에 두루마기만 걸치면 곧바로 외출복 차림이 되었다. 겉옷을 벗고 속바지와 속저고리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면 되었기 때문에 따로 잠옷이나 나이트 가운, 그리고 그 것을 갈아입을 공간이나 벗어 놓은 옷을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둘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 30평 아파트의 주방은 더 넓어졌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는 대형 냉장고를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량이 600리터가 넘는 그런 냉장고는 미국식 소비 문화의 산물이다. 미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매일 동네 슈퍼마켓에 가는 것 보다 한 달에 한번 대형 할인점에 가는 것이 더 일반적인데, 그렇게 한달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료품을 저장하도록 만든 것이 캐비닛 형 냉장고이다.

냉동 육류나 가공 식품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 식탁에서야 그런 냉장고가 유용할 지 모르나, 신선한 채소와 가공되지 않는 육류와 생선을 즐기는 우리 식탁에는 그다지 소용에 닿는 물건이 아니다. 더구나 아파트 단지마다 슈퍼 마켓이 있어 언제든 신선 식품을 구입할 수 있는데도 집집마다 그것을 끼고 살고 있으니, 그 덩치를 둘 만한 공간을 마련할 수 밖에. 앞으로 몇 년 후에는 20평형대 아파트에도 대형 냉장고를 둘 공간을 설계해야 할 텐데, 그 땐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진정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선량한 시민들이 살고 있는 20평 아파트, 가장 손 쉽게 접할 수 있는 20평 아파트, 신접 살림을 꾸미는 신혼 부부나 서너 살짜리 아이를 둔 가정이 사는 집, 그런 집에 드레스 룸과 파우더 룸, 홈 바가 있는 것을 걱정한다.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신혼 부부와 이제 마악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집이란 오로지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술을 마시는 곳으로 비춰 질까, 그것을 걱정한다.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추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고, 대형 냉장고에서 햄과 소시지를 안주 삼아 집 안에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는 미국식 소비 문화를 뼛속 깊이 친근하게 받아들일까, 그것을 염려한다. 마치 웨이러와 라이러 라고 발음하는 것을 본 어린 아이가 재떨이마저 재러리로 발음하게 될 까 두려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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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03-02-22 23:24:13
참 많은 것을 알게도 하고, 깨닫게도 하는 기사군요.

앞으로도 애독자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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