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 꽃잎은 왜 갈라져 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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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팝나무 꽃잎은 왜 갈라져 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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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아가씨의 슬픈 사랑이야기

^^^▲ 물푸레나무과의 낙엽교목인 이팝나무 꽆잎
ⓒ 뉴스타운^^^

남명 스님은 사월 초파일 저녁 외출 후 한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선암사에서의 늦은 봄날은 점점 푸르게 우거져 몇 아름의 적막으로 자라났으며 이따금 산새들의 소리만이 이 늙은 절의 귀에 와 닿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딱히 어디로 가야겠다는 마땅한 계획이 없었던 나의 방랑 습벽은 평상시에는 음성적으로 잠복해 있다가도 밤 12시가 넘으면 수면부족 현상으로 찾아와 날 갈구어 댔다. 그리하여 저 어린 수목들이 신생의 기쁨으로 불타오를수록 오히려 내 내면은 끝도 없이 가라앉아 갔다.

그래, 떠나야겠다.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이렇게 마음먹자 내 마음은 어느덧 숨결 가쁜 아지랭이처럼 먼 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무료한 시간이면 까닭 없이 절 이곳 저곳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차면 기운다든가. 아홉 그루의 화사한 영산홍 꽃잎도 점점 이울어 갔으며 이 속절없는 봄을 서둘러 인화하려는 사람들로 이 영산홍 나무 아래는 늘 소란스러웠다.

어느 날 난 이곳에서 나이든 아낙들과 놀러와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대는 한 아가씨를 보았다. 아가씨는 마른 체구에 광대뼈가 불끈 솟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짐작컨대 고집과 오기로 똘똘 뭉친 아가씨가 틀림 없오 보였다. 아아,제 버릇 개주기가 얼마나 힘든 노릇인가. 난 개에게 던져주지 못한 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내 천부의 바람기를 활용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어이, 아가씨, 나도 사진 한 장 찍어주시오!"

아가씨는 불쾌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저런 개뼈다귀 같은 놈이 있지 싶었겠지. 그러나 그 따위 험악한 얼굴에 놀랄 내가 아니다. 몇 마디 가시돋힌 말이 오갔다. 그럴수록 나의 심중은 점점 오기로 들끓었으며 그에 따라 아가씨의 무차별 반격도 매서워 갔다.

마침내 난 아가씨에게 한가지 비상한 제안을 하기에 이르렀다. 남명 스님의 붓글씨를 한 폭 주기로 하고 사진을 찍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아가씨도 남명스님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며 마침내 분위기는 급전직하 장작불처럼 따사로워졌다.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린 근처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결국 난 이 하동에 사는 김미정이란 아가씨에게 나의 짐의 일부를 맡기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불일암 법정 스님이 내게 준 송광사 방장을 지내고 입적하신 구산 스님의 유고문집인 <돌사자>라든가, 각종 문집들, 스님들에게 받은 선물 따위였다.그 것은 또한 내 다음 행선지가 하동으로 낙착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며칠 후 난 광양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높이가 약 300m 쯤으로 기억되는 탄치재 위에 있었다. 봄 햇볕이 제법 따가웠다. 근처에 있던 무등암이란 절에 들러 물을 마셨다. 바위굴 속에 들어 있는 절집은 아늑했다. 몸이 아늑해지면 정신은 자꾸만 눕고 싶어하는 법이다. 더 늘어지기 전에 길을 재촉해 나아갔다. 두끼비강_섬진의 面目이 눈 앞에 펼쳐졌다. 드디어 "白沙靑松"의 고장 하동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김미정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나자마자 우리는 근처에 있는 선술집으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봤다.

맥주를 몇 병 나눠 마셨다. 바야흐로 취기가 모든 쑥쓰러움을 즐겁게 용납하기 까지 그냥 마셨다. 적막이 김미정씨의 입가에 잠시 머물다가 술잔 위로 맥없이 내려 앉았다. 그는 내게 앞으로의 행선지등을 물었고 난 그냥 아무 대책이 없다고 했다. 사실 기쁨도 눈물도 없이 막막한 때에 젊다는 것은 얼마나 위태로운 함정인가. 그렇다면 난 진작부터 그 함정에 걸려 있는 셈이다. 우리의 술자리는 서서히 달아올랐으며 가슴 밑바닥에서는 잡초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우거지고 있었다.

술이 달아오른 김미정씨가 그의 생애에서 결코 은총이 되지 못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자와 그는 고등학교 다닐 무렵 부터 장장 7년을 사귀었다. 어쩌다가 그가 폐병에 걸리자 남자는 딴 여자와 결혼을 해버렸다. 이젠 페병도 다 나았지만 김미정씨는 집안의 결혼 강요를 물리치고 또 다시 그 남자가 돌아 올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남자가 결혼한지도 벌써 5년이 지나가고 있다 했다. 여자의 비길 데 없는 순정에 비해 뉘우침 없는 세월은 저 홀로 섬진의 물결처럼 무덤덤하게 흘러갈 뿐인 것을...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점점 사랑을 믿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아가씨들은, 아니 젊은 여우들은 제 나름으로는 늑대를 감별할 줄아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 아마 저 늑대는 착할거야.아니, 착해야돼! 그 환상은 너무도 지독해서 도끼가 제 발등을 내려 찍을 때 까지 까지 게속되는 것이다. 난 김미정씨를 위로했다. 재수없어서 일찍 "늑대의 발톱"을 경험한 것 뿐이라고.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위로한답시고 뇌까려야하는 사람의 꼬라지라니! 나는 대충 김미정씨를 달래어 집에 데려다주고 근처 여관으로 갔다. 쉬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젠가 읽었던 싸르트르의 글귀가 떠올랐다.

"불가사리는 창자까지 나눠가며 사랑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창자까지도 빼먹어가며 사랑을 한다? 그리하여 그날 밤의 알맞은 취기는 나를 부추겨 한 편의 졸시를 낳게 하였으니, 아뿔싸! 마르지 않은 희나리가 여기 있고나!! 詩가 되지 못한 슬픈 넋두리여.

조용한 슬픔
_김미정에게

쉬 물들지 않는 슬픔으로
혹은 세상의 바다
한 방울 부끄러움으로 떨어지기 위하여
지금 나는 허리를 낮춥니다.
오늘 밤 깊은 정적으로
내게 머무는 그대여
아직 빼앗을 온전한 꿈이
상처받을 또 다른 노래가
내게 남아있던가요.
날카로운 그대의 삽질
내게로 떠 넘겨지는
저 헐벗은 달빛
아아, 헛구역질 같은 發聲(발성)으로
저무는 밤마다
나는 자꾸만 살점을 털어냅니다.
물방울이듯 영롱한 이 아픔을

다음날 일찍이 김미정씨가 왔다. 허름한 음식점에서 아침을 먹고 우린 걸어서 설천면 노량리 남해대교까지 갔다. 길이 660m의 현수교를 건너 우린 죽은 불가사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갯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우린 남해 바다의 노을이 몇 마장의 파도를 자신의 오랜 불면증으로 간직하는 순간을 물끄러미 바라며 마냥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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