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홉 그루의 영산홍으로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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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홉 그루의 영산홍으로 피어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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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 남명스님에 대한 추억

 
   
  ▲ 선암사 달마전 앞 샘으로 쓰이는 돌확
ⓒ 뉴스타운
 
 

* 이 이야기는 1981년 사월 초파일 하루 남명 스님과의일화를 간추린 얘기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 괴목마을 조계산 선암사. 삼월에 피는 꽃 작고 향기짙은 참 매화 향기 스러졌을테지만 아마 지금쯤은 붉으면서도 결코 빨갛치는 않은 400년 묵은 아홉 그루의 영산홍 피어 있으리.

그 영산홍 그늘 아래 서면 가만 가만 그리움으로 타올라 사나이라 할지라도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을 수 없으리니 그대도 언젠가 기회 있어 선암사 가시거든 한 방울 눈물로 세상 티끌을 씻고 오시라.

막 세수를 끝내고 요사채로 돌아가려는 참이었다.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설마 나는 아니겠지. 그냥 가려는 순간 이 번엔 좀 더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 오늘 내 심부름 좀 해야겠어."

순간적으로 직감이 왔다. 어젯밤 원주 현오 스님이 자랑 비슷하게 늘어놓던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절엔 글씨 잘 쓰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사월 초파일이면 이 근방은 물론 서울에서까지 글씨를 받으러 오는데 이 양반 성미가 워낙 괴팍해놔서 글씨 받으려다가 삐끗 잘못했다간 목침으로 얻어맞기 일쑤라는 것이었다. 오호라, 이 양반이 그 양반? 스님을 따라 심검당 안에 있는 스님의 거처로 따라갔다. 대청마루가 길게 깔린 방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서 먹과 벼루, 작설차를 내왔다.

"너 오늘 먹 갈고 차 좀 끓여야겠다. 오늘 내 손님이 굉장히 많이 올거다."

그리고나서 한참 있다 문득 생각난 듯이 덧붙이는 것이었다.

"너, 공양간에 가서 내가 달란다고 곡차하고 참외하고 안주 좀 가져 오너라."

아니, 뭐 이런 땡땡이 중이 다 있어. 절간에서 아주 드러내놓고 술을 마시다니... 허참. 내가 한참 망설이고 있으려니 스님은 다시 한 번 채근했다.

"아, 빨리 곡차 가져오라는디 뭐하고 있어, 이놈아"

스님은 방에서 방명록 겸 회계장부를 꺼내 왔다. 거기다 돈을 받는 대로 적으라는 것이다. 아침 9시가 되기 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청마루 앞이 북적거렸다. 스님은 먼저 온 순서대로 글씨를 써줬다.

글씨를 받아가는 사람이 농부면 농부에게 맞는 글귀를, 상인이면 상인에 맞는 글귀를.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글을 써주는데 그렇게 딱 맞는 글귀가 어디 숨어 있다가 뛰쳐나오는 것인지! 어느 때는 圓(둥글 원)자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기도 하고, 어느때는 글자 대신 그림을 집어넣기도 하는데 글씨보다 그 편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구경하는 사람의 입에서나 글씨를 받아가려고 서 있는 사람에게서나 끝도 없는 감탄사가 이어졌다.스님은 한 장 쓰고 나면 예외없이 곡차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글씨를 쓰기 위해 곡차를 마시는 건지, 곡차를 마시기 위해 글씨를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차 끓여 손님 대접하랴, 곡차 따르랴, 장부 정리하랴 나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글씨를 받은 사람은 묻는다.

"스님, 얼마나 시주할까요?"

"오백원도 좋고 천원도 좋고 아주 없으면 그냥 가던지."

그리고나선 꼭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이었다.

"영산홍이 아주 보기 좋습니다. 보고 가시지요."

그러다가도 돈 꽤나 있는 듯 보이는 사람이 예상보다 적은 돈을 내면 그냥 두지 않았다. 한 번은 이리 라이온스 클럽 사람들 20여 명이 몰려와서 단체로 글씨를 받아갔다. 글씨를 받은 사람들이 멀리 사라질 즈음 별안간 스님이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 갔다.

"너, 저 사람들 헌테 얼마 받았냐?"

"30만원이요."

"너 빨리 가서 저 녀석들 이리 끌고 와라"

"아니, 왜요?"

"아, 이눔아. 데려오라면 데려오기나 혀."

난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들의 발길을 돌려세웠다. 그들을 불러 앉힌 스님은 자기가 쓴 글씨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몹시 황당해서 어쩔 쥴 몰라했다 . 그들이 글씨를 내놓자 마자 스님은 그것을 쫙쫙 찢어버렸다.

"야, 이 녀석들아, 내 글씨가 그렇게 값어치 없는 줄 알어. 먹고 살만 헌 놈들이 그러면 못써."

그 사이에도 난 몇 번 씩이나 곡차와 안주를 가지러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소설 쓰는 전남대 송기숙 교수도 왔다 갔고 내노라하는 서울의 교수들도 왔다갔다. 드물게는 정치인들도 얼굴을 내밀었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었다. 박현채 선생과 안병직교수(서울대.경제사.한용운 평전을 씀)께서 오셨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안병직 교수가 배실배실 웃으면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이 친구 언제쯤이나 다시 감옥에 갈 건지 관상이나 한 번 봐주세요."

"당분간은 걱정 없겄어. 맘 편히 살어. "

키가 작달막하고 근육질로 다져진 체격을 가진 박현채 선생은 가만히 웃고만 계셨다. 한국 정치경제학의 선구자인 박현채 선생은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걸어온 분이다. 그렇게 십여분 쯤 얘기하다가 두 분은 스님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두 분을 배웅 나갔다.

"선생님, 몸 조심하시고 늘 건강하세요."

"그래, 우리 실천하면서 살자."

박현채 선생은 그 억센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쥐어주고 멀어져 갔다.

 
   
  ▲ 대전 송용억가의 자산홍. 이 집에도 선암사 못지 않게 화려한 영산홍과 자산홍이 피어난다.
ⓒ 뉴스타운
 
 

시간이 흘러 어느덧 프랑스 사람들이 '늑대와 개 사이'라고 부르는 황혼으로 치달았다. 그제서야 생각이난 듯 비로소 스님에게 법명을 물어봤다.

"나 말이야 ? 대천(大天)이라고 한다."

난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서 빈정거리듯 말했다.

"법명이 너무 너무 거창하신거 아니에요?"

"네끼 이 녀석, 그럼 남명(南冥)이라고 불러라."

"할아버지, 부대끼시겠어요?"

"왜 이 녀석아"

"아, 할아버지는 스님이기 전에 예술가잖아요? 그런데 오늘 그렇게 글씨를 마구 남발하셨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실까."

"예끼 이놈, 너 술이나 한 잔 쳐먹어라."

스님이 따라주는 술을 쭈욱 들이켰다.

"너말야, 차라리 입산해라."

"싫어요.난 절방에서 나는 홀애비 냄새가 너무 싫더라고요."

"그러지 말고 입산해 이놈아. 그래서 나한테 동양학도 배우고 부처님 말씀도 배우면 좀 좋으냐."

"할아버지, 난 할 일 많은 사람이에요.그 리고 이 절만해도 스님들 쌔고 쌨는데 왜 저 보고 그러세요?"

"그 놈들은 말귀가 어둡단말야. 가르치기 힘들어!"

"그런데 할아버지, 술 마시면 허무를 이길 수 있나요? 허무가 허무를 새끼치진 않던가요?"

"예끼놈! "

행색으로 보아 기생 같아 보이는 여자들 3명이 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순천의 기생들이었다. 시간으로 봐서 그들이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될 것 같았다. 그들은 스님에게 글씨를 청했다. 대답 대신 스님은 다짜고짜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여자를 방안으로 끌어당겼다.

"너희. 씨발년들은 부처님한테 올 때도 요렇게 시빨겋게 루즈 쳐바르고 오냐? 이리와, 이 년들아, 뽀뽀나 한 번 하게."

돌발적인 사태 앞에 여자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스님이 다시 고쳐 말했다.

"정 글씨 받고 싶으면 가서 세수하고 루즈 꺠끗이 지우고 와."

스님에게 글씨를 받은 여자들이 물었다.

"스님, 얼마나 시주해야돼요?"

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하더니 말을 내던진다.

"그냥 술이나 한잔 줘."

"그럼 있다가 저희들이 차를 보내겠습니다."

스님과 단 둘이 남은 방안에서 곡차잔을 기울였다. 스님이 천천히 참외를 깎으면서 말씀하셨다.

"너 아까 내한테 글씨 남발한다고 욕했지? 우리 절에는 범종이 없다. 그 종 만드는 돈을 내가 책임지고 있다. 2천만원 가량 만들어야 한다. 너, 방명록 한 번 갖고와 봐라."

지금 내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그날 하루 1천만원이 넘는 돈이 모였던 것 같다. 갑자기 스님이 얼마쯤인지도 알 수 없는 돈 뭉치를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넣어두거라. 먼 길 다니려면 돈이 필요할 게다."

난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게 스님은 스님이 아니라 그냥 할아버지일 뿐이에요. 제가 양말이라도 몇 컬레 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갑자기 참외를 깎던 과도를 내 목에다 들이대었다.

"이래도 안받을래?"

"안 받아요."

스님은 돈을 반쯤 덜어냈다.

"그럼, 이 돈만 받거라."

이번에도 나는 거절했다. 스님은 할 수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칼을 내렸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그림 두 폭을 꺼내왔다.

"이걸 가지고 다니다 돈 떨어지면 팔아라. 인사동 가지고 가면 몇 백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스님과 나의 술자리는 점점 깊어갔다. 스님은 자신의 앨범을 꺼내더니 내게 일일이 설명해주셨다. 거기 별 하나를 단 전두환이 부인 이순자와 스님을 모시고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었다.

어느 한 순간 스님의 눈길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듯 싶었다. 그러더니 어느 새 가느다란 흐느낌이 적막속으로 조용히 파고들었다. 한참 후에야 스님이 내게 말했다.

"이 사진이 내 마누라 사진이다."

스님은 젊었을 때 자신이 의사였다고 했다. 각시는 그의 첫사랑이었다. 둘은 결혼해서 한 3년 쯤 같이 살았는데 여자가 서독으로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오늘이나 돌아올까, 내일이나 돌아올까? 出門望이 10여 년, 기다리고 기다리다 36살의 늦은 나이로 입산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술 한잔 마시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이 철딱서니 없는 늙은 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대책없는 순정을 어찌할거나! 내 마음 속 밑바닥에서 연민이란 놈이 꾸역구역 올라왔다. 스님은 대중들이 모인 곳으로 나를 끌고 가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나서 다시 스님의 방으로 돌아와 몇 잔의 술을 나눠마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빵빵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왔다, 아까 그 기생들이다. 나랑 같이 가자."

"전 기생집 졸업 했습니다. 다녀오세요."

그는 방을 뛰쳐나갔다. 빌어먹을 생이여. 더 빌어먹을 사랑이여. 홀로 남은 방안에서 홀로 소리죽여 울었다. 늙은 중의 순정이 서러워 울고 티끌같은 세상이 덧없어 울었다. 나도 세상과의 연을 끊고 중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난 끝내 중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아아, 결국은 이렇게 도로 아미타불의 생을 살 것을...

지금도 영산홍 필 무렵이면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영산홍이 좋습니다. 구경하고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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