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11연대 작전(1948. 5. 15-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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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11연대 작전(1948. 5. 15-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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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제주도 인민유격대의 발악과 군경의 토벌작전

5월 4일, 경비대사령부는 수원에서 11연대를 급하게 창설했다. 제 2, 3, 4연대로부터 차출된 인력으로 연대본부와 3개 대대를 편성한 것이다. 하지만 병력 모집이 어려워 연대라 해 봐야 연대본부와 3개 대대의 창설에 불과했다. 5월 15일, 국방경비대사령부는 11연대 본부 및 예하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9연대(제주)의 오일균 대대를 11연대에 배속시켰다.

박진경 중령은 여단규모인 4개 대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박진경은 5월 6일 부임한 이래 공비와 주민을 분리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무공작에 주력했다. 하지만 공비들이 선무공작에 순응할리 없었다. 따라서 11연대 작전은 적극적인 소탕작전으로 전환됐다. 김익렬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었던 미군정 당국은 박진경 중령의 적극적인 토벌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6월 1일부로 그를 대령으로 진급시켰다.

공비두목 김달삼은 박진경이 김익렬과는 달리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펴는데다 부산의 5연대로부터 1개 대대가 증파되자 문상길은 김달삼과 긴급회동하여 정보교환, 무기공급, 탈영병 추진, 교양자료 배포 등을 합의했고, 이 합의에 따라 5월 20일 41명을 인민무장대에 보충해 주기 위한 탈영작전을 감행했다. 이들 41명은 99식 소총 1정씩과 실탄 14,000여 발로 완전무장한 후 트럭을 타고 진압군으로 위장하여 대정지서의 7개 초소에 5명씩을 배치한 후 “쏴라”하는 구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가해 경찰관 서덕주, 김문희, 이환문, 김일하 순경과 임건수를 사살했고 지서주임 허태주에 중상을 입혔다.

이들은 이어서 서귀포 경찰서에 가서 또 다른 트럭 1대를 빌려 타고 남원면 신래리 산으로 가려했다. 이때 당시 21세인 금촌오가 기지를 발휘했다. 엔진이 열을 받았으니 물을 떠와야 한다고 속여놓고 조수와 함께 경찰서로 달려갔다. 2대의 차량 중 나머지 차량 1대를 타고 가던 탈영병들은 대정면 중간산 부락의 집으로 들어가 아주머니에게 밥을 달라고 했다. 이를 문틈으로 내다 본 남편은 뒷문으로 나가 뒷담을 넘어 대정지서에 신고했다. 박진경 대령은 여기에서 붙잡은 20명을 연병장에 모아놓고 상부의 명령에 따라 대대 장병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시켰다.

이에 김달삼은 문상길 중위에게 지령을 내려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하도록 했다. 명령을 받은 문상길은 정보계 선임하사 양희천 상사에게 사살명령을 내렸다. 양희천 상사는 남로당 손선호 하사, 신상우 중사, 강규찬 중사, 배경용 하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6월 17일, 박대령은 그의 진급 축하연도 가질 겸해서 작전에 협조했던 도민들과 기관장들 그리고 연대 참모들을 제주읍 관덕정에 있는 요정 옥성정에 초청하여 화기애애하게 연회를 마쳤다. 박대령은 술에 취해 새벽 1시경에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연대본부 연대장실로 들어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암살조는 잠이 깊이들때까지 기다려 새벽 3시 15분에 M-1소총 2발을 두개골에 쏘아 박대령을 살해했다. 위생병이 달려와 통곡하면서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씻었다. 박진경의 시체를 매만지며 눈물을 쏟아내던 그 위생병이 바로 M-1소총을 발사한 손선호였다. 빨갱이라는 존재는 이렇듯 위장과 연기를 잘하는 소름 끼치는 작자들인 것이다. 손선호 하사는 10·1 대구 폭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경비대에 입대한 자다. 이때 박진경의 나이 28세였다.

일주일이 가도 암살범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답답해하던 차에 익명의 한 하사가 11연대 정보참모격으로 파견돼 있던 김종평 중령에게 “9연대 문상길 중위를 조사하라”는 투서를 냈다. 이로 인해 문상길, 최상사(연대정보계 선임하사)를 포함해 3명의 하사관과 문상길의 약혼녀 고양숙이 연행됐다. 고양숙은 서귀포 남로당 총책의 딸이었다. 이 고양숙이 연행된 것은 문상길이 9연대내 10여 명의 남로당 당원들과 오일균 소령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조사한지 3개월 만인 1948년 9월 23일, 문상길 일당 8명이 걸려들었다. 유배경 하사, 신상우 중사만 무기형을 받고 문상길과 손선호 등 6명은 사형당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형 집행 제1호 였다고 한다. 그리고 오일균과 연대에 숨어 있는 80여명의 남로당원들은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문상길은 얼굴이 예쁘고 내성적이어서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이세호 부대대장은 뜻밖의 사건에 너무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문상길은 이세호까지도 죽이려 했다고 고백했다. 문상길은 9연대를 남로당 군대로 만들기 위해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초대 연대장 장창국과 제2대 연대장 이치업을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극물을 넣었다. 이들은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시름시름 앓다가 중도하차 했다. 그 뒤를 이어 김익렬이 연대장이 되었다. 김익열은 9연대에서 대대장 겸 부연대장으로 있다가 연대장에 임명된 것이다.

문상길의 철통같은 보안의식 덕분으로 오일균 소령은 일단 순간은 면했지만 그의 부하인 문상길 등이 박진경 연대장 살해범이었다는데 대한 책임을 지고 서울로 압송됐고 약 1개월 후의 숙군 과정에서 처형됐다 한다. 하지만 여러 설에 의하면 오일균은 제주도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보됐다고도 한다. 제주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인원은 대부분 공비를 따라 입산했다가 하산한 피란민이었으며 오일균 수용소장은 이들을 심사하여 분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오일균은 무고한 사람은 빨갱이로, 빨갱이들은 무고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죽어야 할 사람은 살리고,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오일균의 이러한 만행은 또 다른 제보에 인해 백일하에 드러났고, 그 일당은 송요찬에 의해 체포되어 1949년 2월 수원에서 나이 23세에 총살형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종삼에 의하면 오일균에 대한 기록은 국가기록원에서도 사라지고 없다 한다.

6월 21일, 박진경 대령의 뒤를 이어 최경록 중령이 11연대장에 부임됐다. 부연대장은 송요찬이었다. 최중령은 주민과 공비를 분리하기 위해 피난민 수용소를 설치했다. 공비 가족에게 사상적인 계몽을 실시하면서 재생의 길을 폭 넓게 열어주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주민들이 조금씩 공비들과 분리되어 갔고, 물 잃은 고기 신세가 된 공비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 산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부터 경찰 주도의 작전은 국방경비대 주도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국방경비대는 공비들의 주력이 위치한 내륙지역을, 경찰은 지원세력이 있는 해안지역 경비를 담당했다. 이렇게 되자 김달삼은 숨어서 장기전에 대비했고, 습격과 매복 활동은 일단 중단됐다. 여기까지가 11연대 작전(5월 15일~7월 23일)이었다.

최경록 연대장은 부임할 때 당번도 부관도 다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독일산 셰퍼드를 꼭 잠자리 옆에 두었다. 문상길 중위는 체포된 후 그 셰퍼드 때문에 최경록을 죽이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7월 24일 제11연대는 수원으로 복귀하고, 제9연대가 재편되어 연대장에 송요찬이 임명됐다. 9연대에는 오일균 소령, 문상길 중위, 이윤락 중위 말고도 또 다른 남로당 요원인 육사5기 김창보 대위가 있었다. 김창보 대위의 꼬리는 송요찬 연대장에 의해 잡혔다. 우익 중대장 손영록은 “폭도들이 조천마을을 습격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조천 지서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출동했다.

이 사실을 놓고 김창봉 대대장은 손 소위를 향해 ‘명령 없이 움직였다’며 지나치게 호통을 쳤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손영록 중대장은 비밀리에 동기생인 정보과 김두현 소위에게 김창봉 대대장의 뒷 조사를 부탁했다. 김두현 소위는 김창봉이 조천리의 큰 부자 한의사와 평소 은밀히 만나는 것을 알아냈고 부하 5명을 데리고 한의사 집을 습격하여 증거물을 압수했다. 한의사는 큰소리를 치면서 딱딱 거렸지만 부인과 자식들을 붙들어다 위협하자 모든 것을 실토했다. 한의사는 김창봉 대위로부터 소총과 실탄을 받아 이를 공비들에 공급해왔고 기밀도 수 없이 빼내서 공비에 전달했다. 결국 김창봉은 헌병대 1개 소대에 의해 체포되어 후에 사형 당했다. 아마 오늘날 이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면 민주당, 민노당을 포함하여 통일연대 47개 단체, 민중연대 37개 단체, 전국연합, 범민련 남측본부, 전교조 등 대한민국의 모든 종북 좌익들이 대거 몰려와 ‘인권유린이다’, ‘공안탄압이다’ 온갖 언론들을 이용하여 사회를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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