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1948년의 전국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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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1948년의 전국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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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주도 공산화의 뿌리와 인민군 야산대의 태동

소련은 이미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북한을 20개 위성국가 중의 하나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허술한 미국을 내쫓고 남한까지 북한에 합병하려고 대남공작을 자행함으로서 남한 사회는 그야말로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소위 ‘정읍발언’을 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

이를 놓고 좌파들은 이승만이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첫 의사표명이라 주장해 왔다. 1946년 2월 8일 북한에 세운 북조선 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으면서 남북분단의 책임을 전적으로 이승만에 돌려온 것이다. 하지만 1946년 6월 3일의 정읍 발언은, 1946년 2월 8일에 북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설립한 소련의 야욕을 비난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남한에 정치-행정적 구심체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소련을 북한에서 내쫓자는 말이었다.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12일 해체되었고, 한국 문제는 미국의 제안으로 9월 17일 국제연합(UN)에 상정 되었다. 한반도 문제가 소련의 손을 떠난 것이다. 이에 자극받은 남북 노동당은 음모공작을 구사하기로 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방해하기 위해 김구를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이승만과 한민당에 주도권이 가게 되고, 이렇게 되면 김구의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김일성은 김구에게 “만일 선생이 오시면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돼도 북한에서는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평소 김구와 아주 가까운 홍명희를 시켜 김구를 설득했다. 김구와 홍명희는 “단독정부는 미국과 이승만의 음모임으로 깨야 한다”는 데 합의 했다. 이 때 김구는 북한의 일정에 따라 연석회의를 연다는 것에 합의 했다. 이후 홍명희가 김구에 코치를 했다. “김구, 김규식 이름으로 북한에 연석회의를 제의 하십시오.”이에 김구는 연석회의 제안을 김일성에 보냈다. 허수아비 노릇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꾸며놓은 김일성은 이 편지를 받고도 싹 무시했다. 순전히 각본에 의한 고도의 연극이었던 것이다. 이 연극에 말려든 김구 일행은 평양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연석회의에는 처음부터 참석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마지막 장면에 참석해 아부성 발언만 하고 돌아 왔다. 김일성은 김구 등을 처음부터 연석회의에 참여시키면 혹시 엉뚱한 발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한 듯 하다.

이 흑색공작을 성공시킨 홍명희는 1949년 9년 9일 조선인민공화국 설립 당시 부수상이 되었다. 김구를 가지고 논 공적으로 홍명희가 출세한 것이다. 평양 연석회의에 가서 김일성의 들러리를 서준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김구 입장을 살피면 이해가 갈 것이다. “양쪽에 단독정부가들어서면 북한에는 김일성, 남한에는 이승만이 출세하지만 통일국가를 세우면 김구가 대통령이 된다” 이것이 당시의 김구 마음이었을 것이라는데 많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북한은 영화와 노동신문을 통해 이런 김구를 아낌없이 농락하고 있다.

북한은 당시 김구의 방북 사실에 초점을 맞춰 “위대한 품”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KBS 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 김구는 김일성을 장군으로 불렀다. 김구가 김일성 한테 읍하고 “김일성 주석님, 받으십시오”하며 ‘임시정부’의 옥새를 바치는 장면도 나왔다. 영화의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통일이 되면 주석께서 황해도 고향에다 몇 평 주시면 과수원이나 하며 말년을 지내겠다”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도 나왔다. “지난 날 장군님을 몰라 뵙고 반공운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말도 나왔다.

1997년 5월 26일(월), 로동신문은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신념과 절개를 목숨 바쳐 지킨 성시백 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두고-” 라는 제목으로 장장 2개면에 걸쳐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글을 실었다.

이하 로동신문 발췌본

1946년 11월 11일, 당시 서울에서 발행된 한 신문은 이달 호에 “20여 년간 해외에서 독립광복을 위하여 분골쇄신하던 정향명 선생 일행 서울착” 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열혈청년 시절에 나라를 광복코자 황해를 건너갔던 정향명 선생, 해방 소식에 접하자 귀로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타국에 의연히 남아 방랑하던 동포들을 모아 귀국을 종결짓고 떳떳이 환국했다. 정향명,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 정향명은 해방 전 독립운동 시기에 이국땅에서 부른 성시백 동지의 가명이었다. 성시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근 반세기 전에 우리의 곁을 떠나간 전사,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1992년 12월에 성시백 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성시백 동무는 나를 위해, 자기 당과 자기 수령을 위해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잘 싸운 충신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충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는 이름 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위훈담들은 공작내용과 활동범위로 보나 투쟁방식으로 보나 성시백 동지의 지하공작과는 대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1947년 정초 였다.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저 서울을 떠나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성시백 동지였다…“장군님 말씀을받고 보니 앞이 탁 트입니다. 지금 저의 심정은 당장 남으로 달려나가 장군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힘껏 싸우고 싶은 것뿐입니다. 룡마를 타고 장검을 비껴든 것만 같습니다…”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만나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경원시하며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북의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반가와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이렇게 드리대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오늘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중상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 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 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었다…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 라고 물으셨지요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 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 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이렇게 말하며 그에게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 입니다”

김구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런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 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 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 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 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 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 선생의 얼굴이 크나큰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주실 줄은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주시었으니 기어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1950년 6월 27일 5시, 적들은 이 새벽에 성시백 동지를 사형장으로 끌어내었다. 성시백 동지가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친 것은 서울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기 24시간 전이었다.

이처럼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끝까지 방해했고, 정치적 욕심 때문에 김일성에 농락당해 북한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그는 문익환 목사처럼 통일을 빙자한 국가 반역자였다. 그는 꼿꼿하지도 못했다. 거구를 가지고도 이승만에 배 아파하는 졸장부에 불과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노무현 시대에 여야 국회의원 거의 모두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았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독서가 없는 건달들인 것이다.

남한의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졌다, UN의 결의에 따라 남한지역 총 200의석 가운데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전국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정당별 분포도를 보면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 지지파)가 54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고, 한국민주당이 29석, 대동청년단 12석, 조선민족청년당 6석, 대한독립촉성농민총동맹이 2석, 그 밖이 95석(무소속 84석 포함)이었다. 이때의 투표율은 75% 정도였다. 투표율이 이 정도에 그친 것은 전국적으로 남로당이 펼친 선거방해공작 때문이었다.

5월 10일에 형성된 제헌국회는 5월 31일에 개원됐다. 이날 동대문 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무투표로 당선된 이승만이 재석의원 198명 중 188표로 국회의장에 선출됐다. 이승만은 제헌국회의 의장이 됨으로써 헌법 제정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주도로 제정된 헌법이 공포됐다. 3권분립주의, 대통령중심제의 행정부, 단원제 국회, 농지개혁, 주요 산업의 국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초대 대통령 선출은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재석의원 196명 중 180명이라는 압도적 다수의 지지표를 획득했다. 부통령은 이시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9년 10월 1일 3군 체제를 갖춘 국군이 창설됐지만 그 수는 불과 8만이었다. 북에서는 약 2년 전인 1948년 2월 8일, 15만에 이르는 인민군이 창설됐다. 6·25 당시 북한군은 20만, 한국군은 불과 9만8천이었고,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된 시점에서 한강 남쪽 제방에 집결된 병력은 불과 2만 2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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