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추리소설 '함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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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추리소설 '함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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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1

김의 목표물은 식사 중이었다. 목표물과 여자가 같이 고급 레스토랑으로 식사하러 들어간 것을 본 김은 목표물을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 자리를 잘 선택해 목표물이 눈치채지 않도록 목표물을 감시했다.

그에게 목표물을 사살해 달라고 부탁해 온 자는 중년 남성으로 중키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손이 부드럽고 깨끗한 피부 상태로 보아 사무직 노동자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김은 그런 문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목표물만 확실히 제거하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물 사살을 부탁한 중년 남성은 그에게 5천만 원의 보상을 제의했다. 마침 돈이 궁하던 김은 잠시 망설이는 척 하다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망설이는 척 한 것은 조금이라도 보상을 더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목표물 사살을 부탁한 중년 남자는 김이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자 선수금으로 5천만 원을 지불하고 성공한 후 2천만 원의 현금을 추가로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김은 중년 남자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선수금 5천만 원을 지하철역의 몇 군데 사물함에서 받았다.

지하철역의 사물함을 이용한 것은 은행 계좌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천만 원을 받았어도 꼼꼼히 확인해야 할 절차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5천만 원에 달하는 현찰이 위조지폐가 아닌지 식별해 보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일일이 확인해야 했으나 귀찮았던 김은 적당히 현찰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확인을 끝마쳤다. 그리고 집 안에 숨겨 둔 금고에 5천만 원을 안전히 숨겼다.

김은 5천만 원을 금고에 넣은 뒤 목표물을 사살할 방법을 생각했고 그는 목표물을 추격하여 지금 목표물과 여자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레스토랑에까지 이른 것이다. 목표물 하나만 있다면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여자가 같이 있었다.

목표물은 돈을 받았기 때문에 죽여야 했으나 여자를 처분하는 문제는 중년 남성에게 명령받은 바 없었다. 결정적으로 김은 여자의 정체는 알지 못했다.

김이 제거해야 할 목표물은 중소기업인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밀수업자였다.
또한 거액의 재산을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만큼 밀수업계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은 처음 일을 맡을 때 이번 일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과거에 해왔던 "사업"보다 더 어려운 "사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밀수업자들은 배후에 비호세력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직폭력 단체의 밀착 경호를 받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공연히 일을 그르칠 경우 역공을 받아 죽거나 불구의 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조폭의 흉폭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의 조폭은 과거의 조직과 형태와 행동습성의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최근의 조폭은 조직의 덩치가 작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과거보다 행동대원의 숫자가 극히 적어 사법당국의 추적을 손쉽게 피할 수 있도록 변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학력 조폭 조직원이 늘어나면서 범죄 형태가 지능화되고 합법을 그럴 듯 하게 가장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으로 범행의 흉폭성은 날로 증가하여 그 수법이 잔인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조폭 조직의 덩치가 작아지면서 범행 대상에 대한 "상시적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생겨난 특징이었다. 확실히 짓눌러 둠으로서 감히 자신들에게 대들지 못하게끔 하려는 것이다.

요즘 활동하는 조폭 조직에 제대로 걸리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의 처지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죽어도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한다. 김은 조폭 조직의 잔인한 행각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자신은 신사적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목표물을 고문하지는 않고 비교적 깨끗하게 문제를 처리하니 말이다. 세상에는 죽어야 할 자가 있고 또한 그를 죽여야 할 자가 있는 법이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만고의 진리라고 김은 생각했다.
2

목표물은 여자와 즐겁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계산을 마친 후 여자와 함께 주차장으로 나갔다. 김은 여자와 함께 목표물이 계속 행동한다면 오늘은 "업무"를 치를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 철수하려고 했다.

여자를 목표물과 함께 죽일 수도 있었으나 왠지 여자는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가 상당한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예쁜 여자는 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이 느껴 본 바로는 예쁜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착하다는 법은 없었다. 적어도 그는 확실한 경험을 했다.

과거 그와 같이 마약 판매를 했던 동료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은 아름다운 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는 한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못했다. 직업이 킬러라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죽일 때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죽어야 할 자와 그를 죽여야 할 자가 존재하는 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따금 꿈에서 그는 그가 죽였던 자들을 다시 죽이는 꿈을 꾸곤 했다. 천만 다행인 것은 죽였던 자들이 꿈에서 살아나 그를 추적하거나 하는 꿈은 꾸지 않고 주로 그가 다시 그들을 죽이는 꿈을 꾼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런 꿈을 꿀 때도 고역이었다. 죽여야 할 대상이 어떤 방법을 써도 죽지 않을 때 꿈속에서 그가 느끼는 불안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수십 차례 난자한 인간이 죽지 않고 사방에 유혈을 뿌리면서 도망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난자한 인간을 따라 가서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따금 그런 꿈을 꾸고 난 뒤에는 식은땀에 젖은 얼굴로 깨곤 했다. 김은 언젠가 이 직업을 청산하고 좀 더 안락하고 부드러운 직업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전과가 있는 자신이 정상적인 기업에 취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방법은 자기 사업을 펼치는 것인데 그는 세차장이나 카센터를 열어볼까 궁리하고 있었다.

또한 세차장이나 카센터는 합법적인 형태로 서너 명 이상의 부하를 거느릴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에 다시 "위험한 사업"을 전개하는 때가 오더라도 그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김은 목표물을 권총으로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가 갖고 있는 권총은 러시아제 권총을 밀수한 것으로 소음기와 함께 거액을 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그는 권총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아꼈다. 권총은 그동안 그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었다.

이 권총의 특징은 탄환을 여러 종류의 탄환을 쓸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어서 경찰의 추격을 돌리기 편리했다. 첫 번째 살인에는 미국산 탄환을 사용했고 그 다음에는 벨기에 산 탄환을 사용해 목표물을 제거했다. 세 번째에는 독일 산 탄환을, 네 번째에는 프랑스 산 탄환을 이용했다.

다음 살인에는 앞서 사용했던 순서대로 탄환을 사용했다. 이번 살인은 프랑스 산 탄환을 사용할 차례였다. 이미 암살공작에서 권총이 사용된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경찰은 엽총이나 공기총 탄환이라고 애써 둘러대는 탓에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수많은 살인청부업자들이 밀수된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주차장에서 차에 오른 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들의 차는 고급 외제 승용차로 목표물은 운전석에, 여자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김은 그들의 차가 움직이면 천천히 미행하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목표물이 여자의 집으로 가거나 혹은 목표물이 사이에 여자를 내려주고 어디론가 갈 때 뒤따라갔다가 상황을 보아 제거할 생각이었다.

10분의 시간이 흘렀으나 그들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김은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 두 남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저 둘의 관계는 도대체 뭘까,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 걸까?

그때 김은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만일 둘이 사랑하는 관계라면...... 밀수업자, 그보다 더한 범죄자도 감정은 있는 법이다. 어쩌면 저 밀수업자보다 수 차례 살인을 되풀이한 자신은 더욱 거대한 범죄자가 아니던가.

김은 마음을 다시 잡았다. 자신은 살인청부업자가 아니던가. 지금은 사냥감을 감시하고 때를 보아 낚아채는데 신경을 집중해야 할 때인 것이다. 감상적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은 곧 죽음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차 문이 열리며 목표물이 차에서 밀려나왔다. 정상적으로 제 발로 나온 것이 아니라 밀려나온 것이다. 여자가 나와 목표물을 완전히 차에서 끌어내고 자신이 운전석에 옮겨 탄 다음 차를 운전하고 달아나 버렸다.

김은 순간 당황했다. 일단 중요한 것은 목표물이었으므로 여자가 운전하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서둘러 목표물에게 다가갔다. 목표물은 복부와 가슴의 사이에서 검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목표물의 입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을 김은 보았다. 김은 얼른 귀를 목표물의 입에 가져갔다.

"영....미..."

목표물은 숨이 끊어졌다. 권총이 그의 장기를 완전히 관통한 모양이었다. 김은 자리를 빨리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자리에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바로 그때 목표물의 손 옆에 수첩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김은 보았다.

김은 서둘러 목표물 곁의 수첩을 집어들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즉시 주차장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간 김은 정신적 혼란을 느꼈다. 죽여야 할 자는 죽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다. 어떤 여자가 죽였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목표물이 죽기 전에 말한 "영미"라는 단어는 뭘 말하는가? 여자의 이름인가? 아니면 특정한 암호인가?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금 5천만 원을 돌려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것은 살인청부업자 세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규칙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는 편안하게 눈감을 수 없다.

그는 부엌에 가서 빵과 우유를 꺼내 먹어치운 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는 한동안 잠을 자고 나면 머리가 깨끗해진다.

3

잠을 자고 일어난 김은 눈을 뜨고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한참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는데 따분한 뉴스들 뿐 이었다. 김은 무슨 정치인이 어쩌고, 수출통계가 어쩌고 하는 뉴스에는 별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려고 리모콘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아나운서가 살인 사건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를 경찰이 지목하고 추적중이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 ## 레스토랑 지하 주차장에서 벌어진 총기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이 지목하고 있는 인물은......"

김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 에 없었다. 아나운서가 용의자의 신상이라고 읽고 있는 내용과 용의자의 외모가 자신의 그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찰이 곧 그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김은 자신에게 사건을 청탁한 중년 남성을 생각했다. 그 자가 배후에 있었고 그 자가 여자를 움직여 목표물을 살해한 다음, 자신을 함정에 끌어넣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중년 남성의 배후에는 경찰 가운데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함정이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함정이다.

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권총을 챙겨들었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눈앞에 목표물이 갖고 있었던 수첩이 눈에 들어왔다. 김은 즉시 그 수첩을 집어들고 집을 뛰쳐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일단 중년 남자, 그 자와 먼저 대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중년 남자와의 교신은 전화나 이-메일이 아닌 제 3의 장소에서 주고받는 종이편지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중년 남자와 교신을 하기로 약속한 곳은 지정된 지하철역의 사물함 제 8번이었다. 김은 서둘러 지정된 지하철역으로 달려가 사물함 제 8번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 통의 편지가 들어있었다. 그는 즉시 편지를 뜯어보았다.

"미안하오, 수첩을 사물함에 넣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지켜주겠소. 추가 지불해야 할 비용과 함께 당신의 신상에 노출된 데 대한 보상도 하겠소."

순간 김은 망설였다. 수첩을 사물함에 넣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중년 사내는 자신을 배신했다. 적어도 이 자는 있을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김은 이 중년 남자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년 남자는 김을 이미 함정에 빠뜨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보를 경찰에 흘려주었다. 또한 그 여자 역시 이 중년 남자와 결탁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수첩에 생각이 미쳤다. 수첩을 사물함에 넣고 돌아가란 말은 곧 수첩이 어느 정도 가치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목표물을 죽이고 난 뒤 수첩을 회수해야 했는데 회수하지 못했던 것일까? 김은 수첩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차를 타고 지하철역을 떠났다.

운전을 하는 김의 머리에는 복잡한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이미 노출된 신상은 변장으로 숨겨야 하고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돈을 챙겨 해외로 도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해외 도피는 여객기나 여객선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밀항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변장을 한 상태로 위조 여권을 이용해 여객기나 여객선으로 도피해야 했다.

시간이 없다.

김은 일단 중년 남자나 중년 남자가 보낸 자들이 자신을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우선 김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집에 보관해 둔 금고의 현금부터 회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올 때 현금을 전부 회수해 갖고 나오지 않은 실수를 자책했다.

김은 중년 남자와 중년 남자가 보낸 자들이 그의 집을 이미 파악하고 미리 그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또한 미리 경찰이 그의 집 주변에 배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수첩을 회수하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수첩에 뭔가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수첩의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는 일단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수첩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그는 목표물이 숨지기 전에 말한 "영미"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수첩에는 별 다른 내용이 없었다. 많은 이들의 전화번호와 잡다한 낙서가 적혀 있는 수첩은 0페이지부터 100페이지까지 있었으며 끝 부분에 지하철 노선도와 세계 지도가 붙어있는 작은 크기의 수첩이었다.

김은 "영미"란 단어를 목표물을 살해한 여자의 이름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수첩의 내용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그는 수첩의 내용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수첩 안에 써있는 글자들은 김에게 있어 아무 의미 없는 글자들이었다.

수첩 안에는 전화번호, 약속장소, 사람 이름 등등이 써있었는데 김은 중년남자가 이 수첩 안에 적혀있는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 해 수첩을 빼앗으려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김은 차를 출발시키려 핸들을 잡았다. 그때 김은 차라리 경찰에 신고를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경찰 안에 중년 남자의 비호세력이 있다면, 그리고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는 경찰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이 문제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김은 마음을 굳게 먹고 차를 다시 집으로 몰았다. 중년 남자를 만나면 바로 죽여 버릴 것이지만 적어도 죽이기 전에 이런 못된 함정을 꾸민 이유가 무엇인지 배후에는 누가 있는지 이런 것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중년 남자에게 목표물을 살해한 여자의 소재 역시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 여자는 감옥에 가게 하지 않게 하리라. 목표물은 어차피 죽을 팔자였고, 목표물을 사살하고 수첩과 같은 중요한 물건을 챙기지 못한 것을 보면 여자는 아직 살인경험이 부족한 듯 싶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걸까? 불과 그녀를 본 것은 목표물을 추격하면서 단 몇 시간뿐이다. 김은 그녀에 대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관계를 가지고 싶은 욕정이라고 생각했다. 미인을 보면 누구나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여자와 관계를 가진 것도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졌던 여자는 지금 부동산 졸부의 후처가 되어 있었고 강남에서 일식집 개업을 준비중에 있었다.

김은 그녀를 사랑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와의 관계가 즐거웠었다는 것을 기억할 따름이다. 김은 갑자기 온 몸에서 성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목표물을 죽인 여자를 보면 이유를 파악하고 정체를 알아낸 뒤 관계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생존이 급했다. 안전하게 돈을 챙기고 가능한 모든 경로를 이용해 중년 사내의 소재를 알아낸 뒤 이 빌어먹을 함정을 판 이유를 알아내고 배후 인물을 찾아내 수첩을 가지고 협상을 벌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적지 않은 배상금을 받아내 서둘러 해외로 떠나 버려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목표물을 죽인 여자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그 여자도 찾아내어 함께 떠나야 하나.

4

그의 집 주변은 조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인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나 조용해
의심이 계속 솟아올랐다.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선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으나 잠시 멈칫했다. 이미 집 안에 침입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잠긴 문을 열고 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그러나 공격하는 자는 없었다.

집 안은 그대로였다. 전등은 켜둔 채 그대로였고 급히 나오느라 꺼버리지 못한 텔레비전 또한 그대로 있었다. 전등과 텔레비전을 끄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고 김은 생각했다.

김은 권총을 겨누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김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일단 금고의 돈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현관문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을 느꼈다.

김은 즉시 현관문을 주목했다. 손에 쥔 권총을 일단 뒤로 숨겼다. 만일 중년 사내가 아니라 동네 주민이라면 권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날 것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주목했던 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관문에 나타난 것은 목표물을 사살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김은 여자의 손에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은 것을 보고 여자 앞으로 다가갔다.

"수첩을 찾으러 왔어요." 여자가 말했다.
"먼저 해명부터 하는 것이 좋을 텐데." 김이 말했다.
"무슨 해명을 원하죠?"
"날 살인범으로 만들었잖아."
"난 모르는 일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가. 김은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내 외모를 경찰에 찔러 준 건 누구지?"
"나도 몰라요."
"당신은 뭐지?"
"내가 묻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먼저 대답해."
"난 밀수업자예요."
"당당하시군."
"당신도 떳떳한 직업을 가진 것은 아닐텐데요."
"사립탐정이야."
"거짓말."
"내 직업이 뭔 줄 알아?"
"살인청부업자"

김은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이 여자에게 총을 보여준 적은 없다. 김의 권총은 지금 김의 바지 뒷 주머니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중년 사내와 내통하고 날 함정으로 밀어 넣은 거 아냐?" 김은 물었다.
"중년 사내가 누구죠?"
김은 중년 남자의 외모를 대강 설명했다. 하지만 여자는 모른다고 답했다. 김은 점점 혼란을 느꼈다. 이 여자가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리라.

"사정이 어떻건 수첩은 줄 수 없어. 내 목숨을 보장받고 내 피해를 보상받기 전까지는 말야."
"우리 함께 도망쳐요."
"뭐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함께 도망치다니......

"그 남자가 숨겨놓은 재산을 가지면 평생 잘 살 수 있어요. 그리고 밀항할 수 있는 배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밀항?"
"그래요. 어선을 타고 바다에서 다른 나라 어선으로 옮겨 타고 공해상으로 나간 뒤 거기에서 다시 대형 선박을 타고 제 3국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위조여권 같은 것도 준비되어 있겠군."
"물론이죠, 성형수술 받고 살면 누구도 잡지 못해요."
"이 수첩에 무슨 비밀이 들어 있나?"
"나하고 함께 간다고 약속하면 가르쳐 주겠어요."

자신을 경찰에 신고한 것은 여자가 아니고 중년 남자며 중년 남자와 여자는 모두 목표물의 은닉된 재산을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찾는 결정적인 열쇠가 바로 이 수첩이다? 김은 생각을 정리하기 무척 힘들었다.

만일 여자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거라면? 혹은 여자가 경찰에 정보를 흘렸고 중년 사내는 그냥 자신에게 살인을 청부했을 뿐이라면?

그때 현관문으로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김씨, 수첩을 내게 주시오."

김은 잠시 멍하니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왜 나를 함정에 몰아넣었는지 먼저 설명해 보시오."
"이 여자의 잔꾀요."

그 때 여자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당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 자야, 이 자는 죽은 밀수업자와 거래하던 운반책이었어. 밀수업자를 죽이고 밀수업자가 은닉한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나와 당신을 매수한 거고, 당신을 살인범으로 감옥에 보내고 날 죽이려 했던 거야."

"그것은 거짓말이오, 이 여자는 죽은 밀수업자의 여자인데 밀수업자를 죽이고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고 했지." 중년 남자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거짓말 마. 밀수업자를 죽이려던 것은 당신이잖아!" 김은 말했다.
"그것은 밀수업자가 날 죽이려 했기 때문이오. 밀수업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저 여자를 보내 먼저 날 죽이려 했소. 그 다음에 난 다시 저 여자를 매수했지. 그런데 저 여자는 다시 날 배반했소, 날 배신하고 밀수업자를 죽인 뒤 모든 것을 가지려 했어."
"긴 말이 필요 없어요. 우리 함께 이 자를 죽이고 함께 떠나요." 여자가 말했다.

김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김이 권총을 꺼낸 것과 동시에 중년 사내도 칼을 꺼내 들었다.

"안 돼, 이봐 이러지 말자고. 여자 때문에 싸울 셈인가?" 중년 사내가 말했다.
"어서 쏴버려요. 그리고 도망쳐요."
"둘 다 조용히 해!" 김이 외쳤다.
"정말 궁금한 게 있어, 죽은 밀수업자가 말한 '영미'라는 게 무슨 뜻이지? 네 이름이야?"
김이 여자에게 물었다.
"몰라요."
"거짓말하지마! 너부터 쏴버리겠어!" 김은 소리쳤다.
"아니 너도 알지? 이봐 '영미'란 단어가 무슨 뜻이지?" 김은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저 여자를 쏴버려, 그럼 가르쳐 주지." 중년 남자는 말했다.
"안돼요...... 제발, 우리 함께 떠나요......"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아, 둘 중에 먼저 이야기해주는 사람을 선택하겠어. '영미'란 단어가 무슨 뜻이지?"
여자가 대답을 시작했다.
"그것은...... 수첩 뒤 세계 지도의 영국과 미국을 줄여........"

김은 수첩을 꺼내 들고 세계 지도를 펼쳤다. 영국과 미국에는 작은 글씨로 '0 p , me'라고 각각 쓰여 있었다. 김은 수첩의 0 페이지를 펼쳐 'me'란 단어를 찾았다. 그 단어 곁에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이 주소가........!" 그때 김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중년 남자 역시 쓰러졌다. 그리고 유유히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제 이 자들이 우리 모든 죄를 뒤집어 써주면 되는 거야." 여자가 그에게 안기며 말했다.
"어서 도망치자고" 남자가 말했다.
"그래 이 시체들을 치우고" 남자가 등을 돌려 시체를 치우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잘 가거라."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의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 역시 시체 위에 쓰러졌다.

여자의 권총은 러시아제로 프랑스 산 탄환을 장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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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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