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해방 후의 공산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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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해방 후의 공산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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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소련의 대남공작과 남한 공산당의 뿌리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출근시간 대에, 일본의 군수기지 히로시마에 우라늄원자탄이 떨어져 14만 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가루가 되었다. 이로써 일본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그동안 참전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듭 묵살했던 소련은 약삭빠르게도 8월 8일 일방적으로 그리고 기습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곧장 만주를 거쳐 1945년 8월 24일 평양에 진주했다. 미국은 이보다 보름 늦은 9월 8일에야 서울로 진주했다. J.R.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육군 24군단이 일본으로부터 인천으로 상륙하였고, 9일에는 38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 방침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A.V.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미군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민주주의가 지배하는 미군정과는 달리 38선 이북에서는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들기 위한 소련의 눈부신 활동이 이어졌다. 소련군 제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은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정 실시기관으로 로마넨코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민정관리총국을 설치했다. 여기에는 정치·경제·교육·문화·보건·위생·출판·보도·사법지도부 등 군정에 필요한 9개의 지도부를 두었고, 이는 소련이 직접 지휘하는 사실상의 행정부 였다. 소련군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한편 38선 일대에 초소와 진지를 구축하여 남북을 왕래하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또한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 경원선 등 주요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고 교통, 통신을 폐쇄했다. 그리고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인민위원회(행정조직)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해방과 동시에 북한지역에서는 이미 공산주의자들이 살판났다며 우후죽순 격으로 공산당 조직들을 만들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튀는 조직은 조만식의 건준(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였고 이어서 각 도의 중심 도시에 속속 건준 지부들이 결성됐다. 이렇게 북한지역에서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치스챠코프 장군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여 평안남도에 설치된 인민정치위원회를 승인하고, 이어서 9월말까지 각 도에 지방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것은 소련군정이 북한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기도를 숨긴 채, 한민족이 주인이 되는 조직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고도의 위장 술책이었다.

각 도별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관료로부터 행정기관, 경찰관서, 경제기구 등 모든 국가기관을 접수하고 행정권을 인수했다. 소련군정 당국은 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에는 한국인을 기용했지만, 소련군 장교를 고문역에 임명함과 동시에 그들이 데리고 온 소련계 한인을 요직에 배치했다. 외관상으로는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 극동군사령부 예하 정찰부대인 88여단 제1대대장으로,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했다. 스탈린은 한반도를 동구유럽처럼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박헌영과 김일성을 놓고 저울질 했지만 결국 소련군정 총 사령관인 스티코프 중장의 강력한 조언으로 김일성(34세)을 선택했다. 소련군정 당국은 10월 14일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성을 북한 주민 앞에 내세워 찬란한 항일독립운동가로 소개했으며, 이때부터 김일성은 권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해방된 지 만 2개월만에 김일성이 위성국가의 수장으로 등장한 것이다.

▲ (좌)1945.10.14 소련군 적기훈장을 가슴에 단 김성주(김일성. 33세)가 점령군사령부 정치장교 메프레르 중좌와 조선인출신 통역관 강미하일 소좌와 함께 강연회 등단 직전 긴장된 모습. (우)평양시 소련점령군환영군중대회에 등단 '김일성'으로 소개 된후 환영연설을 하는 김성주 소련군 정찰대 대위의 모습 ⓒ뉴스타운

북한이 소련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을 때, 미군정은 남한에 준동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벌이는 폭동에 대처하기에도 역부족 상태에 있었으며 김구와 김규식은 사사건건 이승만이 하는 일에 발을 걸면서 김일성에 협력하고 있었다.

1945년 말인 12월 16일부터 미·영·소 3국 외상이 만나 25일까지 회의를 열어‘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5년간 미·영·중·소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여 이를 27일에 발표했다. 바로 이 시점을 계기로 하여 남한에는 찬탁과 반탁간의 치열한 내전이 이어졌다. 남한 공산주의자들은 처음 반탁으로 가닥을 잡고 선수를 쳤지만 하루도 안 되어 금방 찬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소련은 조선을 해방시킨 해방군이기 때문에 당분간 소련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박헌영이 월북하여 소련 군정의 지시를 받고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헌영은 여러 차례 남북을 왕래하고 있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기습을 당했고, 그로부터 장장 5년에 걸친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일본천왕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전 세계인들이 듣는 가운데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선언했고, 그 후 항복 식에 나타나 맥아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미국에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일본천황은 소련군 사령관 앞에서 “소련에 항복한다”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바 없다. 그런데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은 어째서 조선을 해방시켜준 존재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라 주장하는가?

이에 반탁을 주장하는 애국세력들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이런 야심과 계략을 간파하고 “찬탁은 이북 빨갱이들이 남한까지도 소련에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다”라는 구호를 퍼트렸다. 이는 맞는 말이었다. 모스코바 삼상회의를 기점으로 하여 1946년부터 남한 사회는 소련이 남로당 박헌영을 통해 벌이는 무시무시한 대남공작의 희생물이 되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과 재산이 무고하게 절단 났다.

스탈린은 평양에 진주한지 불과 5개월만인 1946년 2월 8일에 소련군정 총 사령관인 스티코프 중장의 강력한 진언으로 김일성(35세)을 내세워 “북조선최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임시위원회는 토지와 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한 사실상의 정부였다. 이어서 1주 후인 1946년 2월 15일, 남한에서는 여운형, 박헌영, 백남운, 허헌 등이 주도하여 조선공산당의 무력전위대인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을 결성했고, 그 후 1년이 지난 1947년 2월 22일에는 “북조선최고인민위원회”즉 내각이 설치되었다. 1948년 2월 8일에는 인민군을 창설했고, 남북연석회의 계절인 1948년 4월 2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이 발표되었다.

결론적으로 소련은 35세에 불과한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하는 북조선인민공화국을 사실상 해방 5개월 후인 1946년 2월 8일에 세워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든 후 이어서 남한까지 소련의 위성국으로 통일시키려는 공작을 맹렬히 진행했다. 35세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과연 이 어마어마한 대남공작을 스스로 지휘할 수 있었겠는가?

1948년 2월 8일, 평양역전 대광장에는 소련군 계급장과 비슷한 계급을 단 인민군 2만 5천명이 정렬하여 인민군 창군식을 거행했다. 창설 당시 북조선인민군은 5만이었고, 그 중 반이 광장에 집합된 것이다. 이들은 소련제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포, 고사포, 곡사포 등의 신형장비로 무장을 했다. 사열대에는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인 김일성,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G.P.Korotkov) 중장, 인민군 총고문 스미르노프 소장 등 군과 당정의 핵심들이 자리했고, 역전 주변에는 역사적 창군식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오전 10시,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 대장이 군악대 연주에 맞추어 열병을 했다. 상기된 얼굴로 등장한 35세의 김일성, 그는 여기에서이런 연설을 했다.(장준익, 북한인민군대사, 1991)

▲ 김일성은 소련군 지도하애 북괴정권창설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평양에서 '태극기'를 걸어 놓고 '조선인민군'을 창설 했다. 800만 북괴 무장력이 이 사실을 깨닫고 태극기 아래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는 날이 자유민주통일이 되는 날이다. ⓒ뉴스타운

“오늘 우리가 인민군대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 조국의 민주주의 완전자주독립을 일층 촉진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영웅적 소련 군대가 우리를 해방시켜 준 후, 우리 북조선에 있어서 조선인민은 해방 이후 2년이 넘는 동안에 소련군대가 자유로운 조건을 충분히 리용하여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있어서 민주주의 완전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모든 토대를 튼튼히 닦아 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우리 조국을 다시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해방 후 2년이 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은 지연되어 왔으며… ”

“오늘 우리가 창설하는 군대는 조선인민이 만든 조선인민의 군대인 것입니다. 즉 로동자, 농민, 근로인민의 아들딸로서 조직된 군대이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의 군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인민군대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성은 그것이 과거 일제의 가혹한 탄압 하에서 우리 조국과 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반일무장 투쟁에 일생을 바쳐온 진정한 조선의 애국자들을 골간으로 하여 창설된 것입니다 . ”

“우리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은 해내 해외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상대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해 왔던 것입니다. 비록 그창설은 오늘이라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장구한 혁명전통과 투쟁경험과 애국정신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선민족의 해방자이며 은인인 쏘련군대와 쏘련 인민과 그의 위대한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북한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가장 먼저 조선공산당 여운형이 나섰다. 1945년 8월 17일, 여운형은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을 만들고 145개의 지방조직을 만들어 일본 총독 엔도와 만나 일본인들의 무사귀환을 보장하는 대가로 일본총독부로부터 치안과 행정권과 자금을 이양받으려 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좌익범죄자 3만 여명을 석방시켰다.

반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 서울 종로 4거리 등 시내 곳곳에는 벽보가 나붙었다. “근로대중의 위대한 지도자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와 우리를 지도해 달라!” “박헌영 동지여 어서 출현하라!” “우리는 박동지를 기다린다!” 이에 박헌영은 8월 19일,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벗고, 전남 광주에서 상경하여 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위 벽보는 박헌영 추종자들에게는 박헌영이 곧 상경한다는 신호였고, 일반 대중들에는 박헌영이 위대한 사람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효과를 냈다.

1945년 9월 6일 오후 7시, 박헌영은 경기여고 강당에서 건준을 일거에 흡수하여 인공(인민공화국)을 창건함으로써 여운형을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인공)이라는 붉은 완장을 찬 ‘인공’세력이 남한사회 분위기를 사실상 지배했다. 해방이 되자 한동안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고, 미군정이 공산주의를 인정-묵인함에 따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온 공산주의자들은 활기에 넘쳐 한동안 남한사회를 붉게 물들였다. 미군정의 설문조사 결과 당시 국민의 78%가 공산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경우 인민투쟁위원장인 박경훈이 제주도지사를 했고, 인민특위 부위원장이 제주읍장을 했다. 도읍면에 걸친 169개 부락 전체가 ‘제주인민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22일, 오대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로부터 1주일 후인 9월 28일에야 비로소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1개 연대 병력이 제주도에 상륙했다. 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일본군 사령관 가스끼 중장으로부터 항복조인을 받고 그 다음날인 29일부터 군정청을 설치했고, 제주도 군정장관에는 스타우드 소령이 취임했다.

해방이 되자 남쪽에서는 1945년 9월 11일을 기해 박헌영과 강문석 등이 주축이 되어 또 다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고, 이와 발을 맞추어 북에서는 한 달 만인 10월 13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했다가 이내 12월 27일에 ‘북조선 공산당’으로 개칭 했다. 남한에 있는 인물들이 세운 공산당조직의 분국이 되기 싫었던 것이다. 이에 연달아 남한에서는 11월 20일,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를 공개적으로 열었고, 여기에 제주도에서도 4명(오대진, 김정노, 이운방, 최남식)이 대표로 참석했다. 이어서 1946년 2월 15일에 공산주의 폭력 전위대인 민민전(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의장단에는 여운형, 박헌영, 백남운, 허헌 등이 취임했고, 중앙상위 391명 중 3명(강문석, 오대진, 송성철)이 제주도를 대표했다.

제주도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매우 두드러졌다. 경제대책위 전국 41명 중 제주 대표가 2명(고준석, 부병준)이었고, 사회정책위 전국5명 중 제주 대표가 1명(고경흠), 노동문제연구위 전국 14명 중 제주도 위원이 1명(강문석)을 차지했다.

1946년 5월 4일, 정판사 사건이 들통나고 이어서 북한이 대규모 암살단을 내려 보내자 미군정청은 9월 7일, 조선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한은 평양보안국 특찰과 11명에게 ‘8월 30일까지 이승만, 장택상, 김성수, 장덕수 등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어 서울에 잠입시켰고, 다행히도 행동에 옮기기 직전에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박헌영은 10월 6일 오전 8시, 관속에 들어가 장례차로 위장하여 포천의 북쪽 양문리 근처에서 38선을 넘었다. 이어서 1946년 11월 23일,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됐다. 조선공산당 대표 박헌영, 인민당 대표 여운형, 신민당 대표 백남운이 3당 합당하여 남로당을 결성한 것이다. 따라서 11월 23일 남로당을 창건한 것은 이미 박헌영이 월북하기 이전에 합의된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스티코프 중장의 지휘가 있었다.

남로당 중앙당이 창당된 지 2개월 후인 1947년 2월 12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위원장에는 안세훈, 부위원장에는 이신호, 총무부장에 김영홍, 조직부장에 조몽구, 선전부장에 김용해, 재정부장에 이창옥, 부녀부장에 좌창림, 청년부장에 김은환, 농무부장에 김용관이 선출되었다. 이어서 2월 23일에는 민민전 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2월초부터 각 읍면에 민애청(민주애국청년동맹), 부녀동맹, 협동조합, 청년동맹 등을 결성한 후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의장단에는 안세훈과 현호경이 취임했다. 이어서 김정노 등 33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고, 사무국장에는 김정노, 선전부장에는 좌창림, 문화부장에는 김봉현이 지명되었다. 이로써 제주도의 공산당 조직은 남한에서 가장 악랄한 반국가 투쟁세력 즉 반란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인물은 김봉현이다. 그는 제주 한림읍 금악리 출신으로 오사카 간사이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귀향하여 오현중학교와 한림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수많은 주민들과 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 민민전 문화부장이 되어서는 3.1 사건과 3.10 파업투쟁에 전위적 역할을 수행한 골수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1948년 말,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달아나 조총련 오사카지부 서열 4위가 되었다. 1960년부터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3권의 역사책을 썼다. 1960년에는 ‘제주도 역사지’, 1963년에는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김민주와 공저), 1977년에는 ‘제주도 혈의 역사’를 썼다. 그리고 그가 쓴 역사책은 4·3 역사왜곡의 줄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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