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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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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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이 기독교계에 침투한 1970년대 후반 1979년대 운동권 중 상당수가 기독교신자로 위장하고 있었음을 황석영은 이렇게 서술한다: “아닌 말로 김지하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이 무차별한 반공법으로부터 자신의 운동논리와 사상을 보호받기 위하여 쉬운 방편으로 교회의 처마 밑에 은신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황석영 1988, 63). 그런데 남민전은 단지 종교 보호막을 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이용려는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기독교계에 침투하였다.

1960년대에 남미에 해방신학이 등장하자, 1970년대에 한국에서 민중신학이 등장하였던바, 1970년대 운동권의 좌익이념 형성에는 민중신학의 영향도 있었음을 박노해는 이렇게 기록한다:

스탈린의 '숙청'이미지로 인하여 마르크스, 엥겔스와 러시아 혁명과 레닌은 정서적으로 멀게 느껴졌고,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제3세계에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마오 이즘의 영향, 배우기 쉬운 일본어 강습과 일서의 광범한 유통, 해방신학의 도입으로 친밀해진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 그리고 이영희 교수의 중국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 선구적 업적 등이 70년대 남한 운동가들의 학습 풍토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박노해 1989, 89).

민중신학과 남민전은 종북 이념의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양자가 쉽게 융화하여 운동권 정치 이념을 형성해 갔다. 노무현 정부 시절 한명숙(韓明淑)이 총리 지명자였을 때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은 유신체제 말기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용공서클 사건이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용공서클에서 활동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무엇이 진실인가? 당시 ‘종북세력’이란 용어가 없어서 용공서클로 표현된 것일 뿐, 그 사건은 분명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라는 ‘종북세력’이 연루되어 있는 사건이었다. 한명숙과 더불어 또 한 명의 크리스챤아카데미 출신 서경원이 훗날 간첩으로 활동했던 것도 그들이 그곳에서 어떤 이념 교육을 받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사실 1978년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 터지자 검찰은 상당히 관대한 의견을 내놓았었다. 검찰은 이우재와 한명숙 등 그 사건 연루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은 아니고, 다만 그 서클에 용공성이 있어 보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때 한명숙에게 2년 징역의 중형을 요구하였던 것은 여러 용공 이념서적들을 읽고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켰으며, 통일혁명당(약칭, 통혁당) 목소리방송 등 북한방송을 청취한 행위 들에 대해 한명숙 등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4권:1536-1551).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통혁당 및 남민전 도서들을 학습교재로 사용하였던바, 간첩단으로 알려진 통혁당과 남민전은 오늘날 이석기의 RO보다도 훨씬 강도 높은 종북세력이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라고도 표기되는 이 단체는 강원용 목사가 여성, 노동, 농민, 학생, 종교의 다섯 분야에서 중간집단을 한다며 세웠다. 중간집단을 위한 교육이란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노동자교육프로그램으로서 1979년까지 지속되었던 노조간부급교육이 있었다 (이준수 1989, 180). 여성 분야의 한명숙, 노동 분야의 신인령, 농민 분야의 이우재, 장상환, 황민영, 황한식, 권영근 등이 주도했고, 농민 분야는 총 23기에 걸쳐 1000여명의 운동권을 양성하였다. 함평 농민으로서 광주사태 주동자였다가 1988년 평민당 국회의원이 된 후 밀입북하였던 서경원도 농민운동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강기갑도 모두 이 크리스챤 아카데미 출신이었다.

이 단체는 농민들에게 경제학, 정치학, 사회사상, 사회운동사, 민족주의론, 조직론, 선전론 등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들의 사회사상은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사상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들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거쳐 간 인물들이었으며, YH노조지부장 최순영도 이곳 출신이었다. 1979년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재판 때 한명숙에 대한 공소사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골자 중 하나가 여공 등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화 교육’이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순진한 여공들을 대상으로 의식화시켰다는 사실은 최순영이 1979년 8월 YH 여공들로 하여금 신민당사에서 농성케 하였을 때 투신자살조와 할복조를 조직케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운동권 이념으로 의식화시켰던 크리스챤아카데미와 도시산업선교단체들이 종교단체들이었는가? 그들은 민중신학에 입각하여 행동하였다. 민중신학은 분실 자살한 전태일은 한국 예수이며, 데모하다 고난받는 한국인은 전세계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아가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복음인가? 지난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탈북자들은 인간어뢰라 불리는 자살특공대 소행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북한은 김정일이 자살을 전투 무기로 삼으라고 군대에 명령할 수 있는 전체주의 국가이기에 자살특공대가 있다. 그런데 1979년 8월의 YH사건 때도 자살을 투쟁무기로 삼으라고 부추긴 자들이 있었다.

YH무역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1965년 미국이 무상원조를 전면 중단하였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외화벌이 방법으로서 가발수출을 생각해 내었다. 바로 이 무렵 재미교포 장용호가 1966년 10 여명의 종업원으로 시작하여 YH무역주식회사라는 가발제조회사를 설립하여 불과 4년 만에 종업원 3천 여명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하였다. 그러나 가발수출이 한창 호경이었던 1970년대 초에 박정희 대통령은 10년 후에는 가발 수출로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될 것을 내다보고 그 대안으로 중화학공업육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200년 걸리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단 10년 만에 가능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 민족의 경제적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다. 경제건국기의 1970년대는 효율적인 정부 조직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건국은 어느 나라에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만약 어느 나라에서나 가능하다면 어째서 동남아와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들이 여전히 제자리걸음하거나 뒷걸음질치고 있는가? 많은 나라들이 산업화를 원하면서도 좌절되는 이유는 반대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위 운동권이라 일컫는 극심한 조국 근대화 반대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이 중요한 판단에서 누가 10년

앞을 정확히 내다보았는가? 10년 앞을 정확히 내다볼 때 1973년의 유신체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가발수출 호경기 시절은 불과 6년만인 1979년에 그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가발수출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던 산업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동남아 등에서도 가발 수출산업에 뛰어들 때 한국은 가격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부가가치가 높은 기술산업을 육성하시려 하였던 것인데, 크리스챤아카데미와 도시산업선교회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이론을 거꾸로 가르쳤다. 가발수출 시장이 계속 좁아지고 있었을 때 YH여공들은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시키는 대로 임금 인상을 위해 계속 투쟁하였다. 가발수출 시장이 줄어들어 엄청난 은행빚에 허덕이던 YH무역회사는 1979년 3월 29일 마침내 정문에 폐업공고를 나붙였다. 500여명의 여성근로자들의 눈앞이 캄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대로 이미 가발수출로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YH 파산 사건을 정치에 악이용하던 김영삼씨는 훗날 그의 대통령 재임시절인1997년 한보 등 몇몇 대기업이 부도났을 때 묘책을 내놓았는가? 운동권이 시키는 대로 투쟁만 하면 되는 줄로 여겼던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 4층 강당에서 농성하던 중 8월 10일 밤 11시에 투신자살조와 할복조를 조직하였다. 여공들이 4층 창살에 매달려 울부짖었으며, 그 중 몇 명이 실신하였다. 언제 추락사가 생길지 모르는 위험한 순간이 온 8월 11일 새벽 2시경 마침내 경찰병력이 투입되어 여기저기 매트리스를 깔아놓고 그물을 쳐놓고 사복경찰관들이 4층 비상구 문을 부수고 뛰어들어 창문을 닫고 사방의 창가 쪽을 막아 섰으나, 한 명의 자살은 막지 못하였다. 투신자살팀장 김경숙이 이미 자살한 후에야 경찰이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9년을 기점으로 한국이 가발수출에 가격경쟁력이 있는 시대가 지나갔기에 한국 경제는 끝장났었는가? 아니다. 중화학공업 육성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으며, 새로운 일자리들이 창출되고 있었다. 이럴 때 무엇이 가발공장 여공들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었는가? 곧 없어질 가방공장 임금인상을 위해 과격투쟁하도록 선동하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보다 유리한 조건의 새 일자리 정보를 주며 새 일자리를 위해 준비시켜 주는 것이었는가? 운동권은 전자를 선택하고 여공들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투쟁하도록 선동하였다. 따라서 도시산업선교회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들은 산업선교를 빙자하며, 그 사건을 보다 큰 시위 선동의 기회로 이용하였다.

한명숙이 그 여성부 간사였던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의식화된 영향으로 1979년 8월 투신자살팀을 조직한 여성근로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서경원처럼 1980년 5월 가톨릭농민회의 예비군 무기고 접수 음모 중심에 있었던 농민도 있었다. 광주 출신 여성근로자 김경숙 양이 투신자살한 YH 사건의 영향으로 그해 10월 중순 부마사태가 일어났으며, 부마사태가 김재규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혁명을 일으키려 하게 했던 직접적 계기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기회로 삼아 김대중 세력이 민중봉기를 집권 전략으로 삼았던 내란음모의 소산이 광주사태였다.

무장봉기의 때를 노리고 있던 종북단체는 남민전이었는데, 어째서 가톨릭농민회가 무장봉기 음모 선봉에 서게 되었는가? 1970년대 후반에 이강 등 남민전 전사들 및 광주운동권이 가톨릭농민회에 침투했던 사실을 그들의 동지 김상윤이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에서는 민청학련 내부에서 역할 분담이 있었다. 이강, 박형선은 농민운동 부문인 가톨릭농민회로 들어갔고 민청과 연계될 수 있는 이양현, 정상용 등이 노동부문을 담당했다” (김상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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