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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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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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 깨어났군요. 우선 이 약부터 드세요.”

눈앞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기사와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태진은 승객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한 아가씨가 내미는 까만 알약 몇 개를 물과 함께 힘겹게 삼켰다.

“선생은 이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수.”

운전기사가 알약을 준 아가씨를 가리켰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선생이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걸 이 아가씨가 침과 지압으로 살려냈단 말이오.”

아가씨는 들꽃처럼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를 풍겼다.

“급체에 식중독까지 겹쳤어요. 일단은 제가 응급조치를 했으니까 큰 탈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빨리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진심이었다. 태진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춥던 것도, 배 아픔도 어느 정도 견딜 만큼 잦아들어 있었다. 태진은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따라서 아가씨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뭐하는 아가씨기에 침과 지압으로 자신을 구했는지 궁금했다.

“선생님은 기가 너무 많이 상해있더군요. 맥박과 자율신경이 아주 약해서 애를 먹었어요.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을 하나봐요.”
“…!”
“방금 드신 알약은 만약을 대비해 제가 가지고 다니는 상비약이에요. 이대로 누워있으면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는 버텨낼 수 있을 거예요. 그동안 제가 몇 군데 더 지압을 해야겠지만…….”

차는 다시 출발하고 승객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몸과 마음을 최대한 편하게 가지세요.”

그녀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태진의 이곳 저곳 혈을 찾아 다시 지압을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꾹꾹 누루는 곳마다, 처음에는 몹시 아프다가 그 아픔이 가시고 나면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듯 시원함이 느껴졌다. 자꾸만 트림이 나왔다. 그리고 나른해졌다. 태진은 그녀에게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다시 깊은 잠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태진은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만 일어나세요. 서울에 도착했어요.”

그녀였다.
승객들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태진을 보며 빠져나갔다. 그녀 옆에는 운전기사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아가씨가 선생을 간호했다우. 한턱을 내도 단단히 내야 할 거요.”

자신이 느끼기에도 몸 상태가 한결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지러웠다. 어깨에 둘러멘 가방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차의 출입문 계단을 내려서던 태진은 무릎 관절이 꺾이며 그대로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가씨와 운전기사가 황급히 부축해 일으켰다.

“안 되겠어요, 기가 너무 상해서. 집이 어디시죠?”

태진은 낯선 여자 앞에서 허약함을 보이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제가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편한 자리에서 침도 더 맞고, 약도 시간 맞춰서 한 번 더 먹어야 하니까.”

그녀가 태진의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운전기사가 뛰어가 모범택시를 잡아왔다. 태진은 택시 뒷자리에 푹 쓰러졌다. 지금은 체면을 차릴 상황이 아니었다. 설사와 구토를 워낙 심하게 한 후라서 그런지 몸이 은단 먹은 병아리처럼 자꾸만 늘어졌다.

“이 큰 집에서 혼자 사세요?”

정원을 가로질러 태진을 부축해 가던 그녀는 의외라는 듯이 놀랐다. 방에까지 들어와 불을 켠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대로 치우지 않고 살아 난장판처럼 어지럽혀진 모습과 사방에 도배를 하듯 걸어둔 소영이의 사진들 때문이었다.

침대에 태진을 조심스럽게 뉘던 그녀가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습니까?”

태진은 아직 가시지 않은 복통과 현기증의 여진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오핸마세요. 선생님 때문이 아니고 저 때문에 웃은 거니까.”
“아가씨 때문이라뇨?”

태진은 그녀의 말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 갑자기 제가 참 겁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집에까지 왔잖아요. 더구나 혼자 사는 남자 집에요. 이 험한 세상에…….”

듣고보니 정말 그랬다.

태진도 아무 생각 없이 처음 만난 그녀를 집에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누구도 초대한 적이 없는 완벽한 그만의 공간에. 왜 그런 걸 전혀 의식조차 못했던 것일까.

태진은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런 때는 마리화나를 한 대 태우면 몸이 거뜬해지련만, 낯선 여자 앞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 아쉬운 대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좀 나을 것 같았다.

“인사가 늦었지만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아무리 몸이 아파도 내 집에 오신 손님이니 차 한 잔은 대접해야지요. 뭘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아니면 녹차?”

“됐어요. 마신 걸로 할게요. 그보다 참 고상한 취미를 가졌네요. 벽에 걸린 사진들이 예사 솜씨는 아닌 것 같고, 포즈나 분위기도 묘하게 잡힌 것들이 많아요.”

그녀는 벽에 걸린 소영이의 사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태진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소영이의 모습이 야하게 찍힌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필리핀 밀림에서 찍은 야릇한 모습들도 줄지어 걸려있었다.

“그 쪽 일을 좀 하다보니…….”

태진은 대충 얼버무리며 지나갔다. 그녀도 더 이상은 사진에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밤 늦은 시간에 낯선 여자와 한 방에 있다는 사실이 야릇한 감정을 주었다.

“옷을 다 벗으세요, 팬티만 남기고. 편하게 누워 침을 맞아야 하니까요.”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무얼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순순히 말을 따랐다. 고속버스에서 보여준 그녀의 솜씨를 믿었기에.

“엎드려 잠을 자듯 편한 자세를 취하세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회초리 맞은 개구리처럼 사지를 펴고 엎드렸다. 여자 앞에서 알몸을 드러내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겉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태진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태진의 빗장뼈 부근을 꾹 누르며 말했다.

“마리화나를 피우죠?”

태진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그녀의 두 엄지 손가락이 그의 빗장뼈 사이 움푹 팬 곳 부근을 찍어눌렀다.

“아!”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손가락에 눌린 양쪽 어깻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통증이 엄습했다.

태진은 덜컥 겁이 났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혼자서 은밀히 피운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렇다면, 과연 이 여자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머리끝이 쭈뼛 서는 듯했다.

“방 안에 배어 있는 이 냄새, 몸에서 느껴지는 미친 돌개바람 같은 기의 혼란스러움…….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몸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올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민첩하게 태진의 혈들을 눌러가고 있었다. 허리를 타고 앉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놀랄 건 없어요. 경찰은 아니니까.”

그녀가 지압을 하는 곳은 마치 작은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면 견딜만 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갈증도 났다.

“조금만 살살 해요. 너무 아파요.”

“입 다무세요, 기가 빠져나가니까.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 할 지경이 된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

어떻게 알았을까?

태진은 그녀의 정체가 정말 궁금했다. 분명한 것은 보기와는 달리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자신의 남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여자와의 접촉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부단히 노력을 해봤고, 많은 돈을 주고 여자를 사서 성공시켜 주기를 바랐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돈을 다발째 흔들며 그 방면에 도가 튼 여자들을 독려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모두 손을 들고 말았다.

포르노 비디오를 보거나 실제로 여자들이 눈앞에서 섹시한 몸짓으로 교태를 부리면 남자가 부풀어올랐다가도, 막상 인터셉트에 들어가려고만 하면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되고 말았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부풀어오르는 것을 보면 신체적인 결함보다는 심리적인 요인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해 왔었다.

“아가씨 정체가 뭐요?”
“…….”
“무공을 한 사람이오?”
“…….”

대답 대신 그녀는 태진의 몸을 뒤집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콧잔등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놀림 하나하나가 무척 진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태진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
세상에 저렇게 맑은 눈이 있을까. 그녀의 눈은 티끌 한 점 보이지 않는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눈을 감아요.”

낮고 부드러웠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손가락은 관자놀이에서 시작해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덧 통증으로만 느껴지던 그녀의 지압이 가려운 곳을 꼭꼭 찍어 긁어주듯 시원함으로 변했다. 어쩜 그렇게 가려운 곳만을 찾아서 긁어 주는 것일까. 그녀의 양손 엄지손가락이 가슴 부근을 더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낮은 볼트의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몸에서 열이 나며 짜릿짜릿했다.

그녀가 지압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따라서 엉덩이도 움직여, 자연스럽게 팬티 한 장만을 걸친 태진의 남자에 살짝살짝 닿았다. 실크의 감촉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 부끄럽게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남자가 서서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태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와 단전과 사타구니 근처의 혈을 찾아 자극을 가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태진의 가슴 위에 후두둑 떨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는 지압을 마치고, 손가락과 발가락 등 온몸에 새끼손가락 길이만한 금침을 꽂았다. 그러고 나서야 얼굴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

“불가에서 말하길 ‘이승에서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전생에서는 삼천 번의 만남의 인연을 맺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인연도 우연만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드는군요.”
“…….”

잠시 후 그녀는, 고슴도치 몸에 난 바늘처럼 손가락과 발가락에 꽂혀있던 침들을 뺐다. 그렇게 심하던 복통과 현기증이 거짓말처럼 나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야겠군요. 기를 너무 써서 피곤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야겠어요. 선생님은 이대로 몸을 방치하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반신불수가 될 거예요.”

그녀는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제가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요?”

태진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던들 차 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몰랐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떠한 것으로라도 답례하고 싶었다.

“됐어요.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래도…… 방금 말했죠? 불가의 인연에 대해서요. 염치 없는 부탁인지 모르지만, 제 몸이 정상이 될 때까지 치료를 부탁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전생의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

그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표정이 얽혔다.

“승낙한 걸로 알고 기다리겠습니다. 명함입니다. 어느 때든 좋으니까 연락을 주시지요. 오늘은 이대로 보내드리지만, 꼭 다시 만나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고요.”

그녀는 명함을 받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다. 태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에 명함을 쥐어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참으로 묘한 분위기를 주는 여자였다. 많은 여자들을 만나봤지만, 이런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를 대문까지 배웅했다.

언덕길 아래로 멀어져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오늘 일어났던 모든 일이 마치 도깨비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부터 방금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실제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 사는지, 나이는 몇인지,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평소 자신답지 못한 행동도 많았다. 처음 만난 사람을, 그것도 신원조차 알 수 없는 젊은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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