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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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번개와 천둥까지 동반한 비바람이었다. 이제 막 어둠이 슬금슬금 내리고 있는 도심은 폭우 속에 갇혀가고, 굵은 철사 토막 같은 빗줄기는 빌딩과 빌딩 사이를 넘나들며 휘몰이 장단에 춤을 추듯 흩뿌려지고 있었다. 몇 초의 간격을 두고 당장에라도 도시 전체를 하얗게 태울 듯이 내리꽂히는 번개가 나무 뿌리 같은 광선을 밤하늘에 수 놓았고, 곧 이어 귀가 멍멍할 정도로 천둥이 으르렁거렸다.

“우르르─ 꽝!”

창 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태진은 창문을 열고 꽁초를 손가락으로 튕겨버렸다. 꽁초는 맞바람을 안은 갈매기처럼 허공에 빨갛고 긴 포물선을 그리며 시야에서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나도 여기서 저 담뱃불처럼 뛰어내린다면…….’

마포 한강변에 위치한 강변 한신 16층 오피스텔. 태진은 완전히 어둠이 내린, 미친 비바람과 번개와 천둥이 어우러져 광란의 밤을 연출하는 것을 보며 불현듯 자살의 유혹을 느꼈다. 외로웠다. 붉고 뜨거운 피가 뚝뚝 묻어나도록 온몸을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좋았다. 누군가 온기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창가에 서서 오래도록 광란의 밤을 지켜보며, 언젠가 자살을 시도할 날이 온다면 오늘 같은 밤을 택하리라 생각했다.

창 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커튼을 치고, 비디오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 불도 켜지 않은 방 구석에 놓인 대형 텔레비전 화면에선 노랑 머리의 벌거벗은 남녀가 뱀처럼 뒤엉켜 오르가슴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양탄자를 깐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스토리도 없이 무작정 노골적인 정사 장면만을 보여주는 비디오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머릿속에선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다나에’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엄청나게 큰 여자의 젖가슴도, 가래떡처럼 길다랗고 시커먼 남자의 성기도 모두 낯설어만 보였다. 이제 쾌락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남녀는 서로의 몸뚱이를 핥고 빨고 깨물며 화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지만, 태진은 아무런 느낌도 일어나지가 않았다. 태진의 남자는 소금에 절인 오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서랍을 열고 마리화나를 꺼냈다.

LA 뒷골목 흑인한테서 산 최상급이었다. 마리화나는 이제 서너 번 피울 양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마리화나를 한 톨도 흘리지 않고 정성스럽게 말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최대한, 숨이 멈출 것 같은 순간까지 폐부 깊숙이 빨아들여 꿀꺽 삼키고,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마리화나의 연기가 폐를 적신 후 두개골의 뇌 속에까지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이제 풀무원 연두부처럼 물컹한 뇌를 연기가 훈제시켜가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길게 숨을 토해내고 다시 연기를 깊고 길게 빨아들였다. 연기는 처음의 속도보다 빠르게 말초 신경 구석구석까지 달구어갔다. 마리화나를 만 종이가 손끝을 태울 듯이 뜨거워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빨아댔다. 손끝이 타들어 가는지 노릿한 냄새가 났지만,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 속의 여자는 이제 흥분이 극에 달했는지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아니, 소리 지르는 입 모양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태진은 긴 소파에 배 부른 개처럼 배를 깔고 엎디어 리모컨으로 볼륨을 올렸다. 태진의 두 손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신의 남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푸쉬! 푸쉬! 아아 ― 아! 디퍼! 오, 마이 갓! 디퍼, 디퍼!”

쉬지 않고 정신 없이 지껄여 대는 노랑 머리 여자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고개 숙인 태진의 남자는 그때까지도, 사타구니에 붙어 있는 뼈 없는 작고 길죽한 고깃덩어리처럼 좀처럼 일어설 줄을 몰랐다. 밑에 있던 여자가 성이 차지 않는지 남자 위에 올라탔다. 여자는 허리와 머리를 바람타는 바람개비처럼 리드미컬하게 돌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엄청나게 큰 젖가슴과 엉덩이가 할미새 꽁지처럼 정신 없이 위아래, 좌우로 까불거렸고, 카메라 앵글은 집요하게 여자의 엉덩이와 가슴과 열락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시키고 있었다. 화면엔 언뜻언뜻 남녀의 질퍽하게 젖은 금색의 음모와 암나사와 수나사의 죔처럼 뜨겁게 결합된 성기가 보였다. 이 순간만은 적어도 연기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쾌락에 젖어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못 하는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을 몸부림치던 여자의 몸짓이 어느 한 순간, 허리를 활처럼 뒤로 휘어젖혀 우뚝 멈추고, 짐승의 소리 같은 괴성을 지르며 부르르 진저리를 치기 시작…… 그 순간 재빨리 리모컨 파워 스위치를 눌렀다. 일시에 방안 가득 먹물 같은 어둠이 찾아들며 절정에 달한 여자도 사라져 버렸다. 거기까지가 좋았다. 더 이상 본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포르노 비디오를 본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몰랐다.

마리화나의 효과가 온몸에 나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과 함께 순간순간 머리통이 고무풍선처럼 몇 배나 크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아무 것이나 어느 한 장면을 그리면, 생각한 장면만 떠오르고 주위의 모든 배경들은 포커스 아웃이 되었다. 청각도 극도로 예민해져 평소에는 듣지 못하던 미세한 소리까지 들려왔다. 침대 밑에서 바퀴벌레가 발뒷굼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는 발자욱 소리까지도 들렸다. 아니, 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제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눈꼽만큼도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었다. 환상과 몽환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소영이를 마음껏 끌어안고 섹스를 즐길 수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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