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위인전의 경우 눈 앞에만 있으면 닥치는대로 읽었다. 잠도 자지 않고 책 읽겠다고 버티는 나를 어머니는 기특해 하셨다.
그러나 동생이 강제로 불을 끄며 잠 좀 자자고 하소연 할 때는 괜시리 신경질이 날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책 읽겠다고 하면 신간은 빼놓지 않고 구입하며 적극 사주셨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무슨 책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소설가, 철학자가 나의 인생 철학에 영향을 끼쳤는지 누군가 물으면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빼곡히 집 안에 가득차 있는 책들을 무수히 읽었지만 지금 그 서재 앞에 서서 가만히 나란히 정렬되어져 있는 책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저 책을 읽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도대체 저 책이 나에게 말하려고 한 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하게 그렇게 책 껍데기만 바라보고 있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너무 화가 났다. 남들처럼 신나게 놀지도 못했고, 어릴때는 유난히 잔병치레가 심해 바깥 출입이 뜸했던 나는 내 시간을 고스란히 그렇게 책 속에 묻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독서란 좋은 것,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표어에 어쩌면 위로를 받으며, 종이 몇 장(?)에 내 젊은 시절을 바친 것이다.
책과 친구하느라 동네 아이들이 구슬치기 하자고 부르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책 읽기에만 시간을 보낸 나는 신학교를 중퇴한 이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읽었던 책의 주인공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한심스러운 나의 모습과 달리 어떤 친구는 '이 책에서는 말이지, 어느 책에 따르면, 내가 감명깊게 읽었던 책 어느 구절에서는' 하며 잘도 책 구절을 읊으며 지식의 충만을 즐기는 친구가 있었다. 이후 어느새 나도 책을 읽으면서 애써 그러한 부분을 찾아 노트에 열심히 적어 놓았다. 나도 언젠가는 저 친구처럼 '이 책에서는 말이지' 하며 남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겠지 하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무료한 날 내가 읽으면서 분명히 좋아했던 책, 하지만 여전히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저 책에서는 무엇을 말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은 못하는 책 중 한 권을 서재에서 꺼내 들었다.
시몬느 보봐르의「계약결혼」이었다. 한창 예민한 시기였던 10대 후반 무렵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냥 무심코 꺼내서 다시 펼쳐보았다. 책 앞표지에 수건을 두른 시몬느 보봐르의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 책을 다시 펼쳐보았지 다른 의도나 이 책에서는 어디 써먹을 만한 구절이 없나 하는 의도아래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 읽었던 책들 중 한 권을 그렇게 읽어가며 나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책을 주욱 훑어보면서 나는 어느 한 구절 매끄럽게 암기하며 이야기 할 수 있는 시나, 책의 한 구절은 없을지라도 내가 왜 그렇게 책에 열광했는지 책에 쏟아 부었던 시간들이 바보같다고 여기면서도, 왜 그렇게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읽었던 무수한 책들은 나를 위해서 읽혀졌던 것이다. 그 시절 읽으면서 내가 삐뚤삐뚤 그어놓은 구절을 보며 그 옆에 두서없이 긁적거려 놓았던 내 문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왜 지금의 '나'라는 인격체와 인생관으로 형성되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성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책들을 야금야금 읽으면서 내 머릿속은 무수히 여러 가지의 사슬이 얽히고 얽혀 현재의 김혜진이라는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책 속에서 그곳의 인물들과 저자들과 무수히 공감하고 무수히 비판하면서 나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현재의 '나'라는 제 2의 탄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그 누구들처럼 책 속의 유명한 구절들을 외우지는 못한다. 그들의 주의가 어쩌고 하면서 이야기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책 속에 투자한 시간들을 그저 흘러가는대로 죽이기 위해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봐르가 그녀의 책 속에 써 내려간 하나 하나의 문장이 어느새 내 마음과 머리속에 내 인생의 지표를 열어주는데 자리잡고 있었고, 중학교 시절 그렇게 열광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내가 인생을 걸어가는데 커다란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지금은 기억조차 못하는 여러 작가들과 책들이 그렇게 내 앞길에 가능성과 기회를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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